요 6:1-15/주님 손에 들린 인생
210711 주일설교 오병이어1
1.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호주에서 청소년사역을 하던 윤치영 전도사는 2004년 인생에서 가장 힘든 시기를 맞았습니다. 여러 비행, 가출청소년을 돌보던 그는 3년이나 돌보고 가르치던 한 소녀의 어머니에게서 전화를 받았습니다. 딸이 친구들과 파티를 하겠다며 3백 불을 달래서 주지 않았더니 어머니에게 입에 담을 수 없는 욕설과 폭행을 하는데 어쩌면 좋겠냐는 것입니다. 두 명의 제자와 함께 그녀를 청소년센터로 데리고 와서 훈계를 하였더니 자신에게도 욕설을 해대기에 기가막혀서 정신차리라며 등짝을 한 대 때렸습니다. 대드는 소녀를 제어하느라 다른 제자들도 그녀와 몸싸움 아닌 몸싸움을 했습니다. 겨우 진정시키고 부모와 화해를 시켜 사태가 끝나는가 했더니 그 소녀가 부모와 윤전도사와 제자들을 모두 경찰에 고소했습니다. 윤전도사가 납치, 집단폭행 등의 주동자로 몰려 결국 1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추방될 처지에 놓였습니다. 구치소로 처음 들어가는데 차가 컴컴한 지하로 계속 내려가더니 온 몸에 문신을 한 다양한 인종의 범죄자들이 가득한 구치소감방에 수감하는데 ‘지옥이 있다면 이런 곳이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춥고 벌레가 우글우글한 방에 오들오들 떨며 있으려니 얼마나 답답하고 기가막히고 억울하던지 하나님께 기도도 안 하고 일주일 동안 음식도 안 먹고 누워만 있었습니다. 분노와 원망이 치밀어올랐습니다. ‘하나님, 도대체 제게 왜 이러십니까? 말 안 듣는 온갖 문제아들 찾아다니며 사랑하고 복음 전하고 돌본 죄밖에 없는데 도대체 이게 뭡니까?’ 정말 기가막히고 답답할 노릇 아닙니까? 여러분은 이런 적이 혹시 없으셨는지요? 이처럼 극적인 경우야 대개 아니겠습니다만 사노라면 나름 답답하고 기가막히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하나님은 도대체 왜 그런 일을 허용하시는 것일까요? 오늘 본문은 그에 대한 답을 이렇게 주십니다.
2. 시험하시는 이유
우리는 드디어 야이로의 집을 나와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기억을 되살려 보신다면 요한복음 5장에서 베데스다 연못가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을 살펴보았습니다. 이제 6장으로 넘어와 무대는 갈릴리 호숫가 가버나움으로 바뀝니다. 예수님은 갈릴리 바다 건너편으로 가시는데 누가복음의 병행구절은 거기를 벳세다로 소개합니다. 거기서 예수님은 빌립에게 감당키 힘든 미션을 주십니다.
(요 6:5) 예수께서 눈을 들어 큰 무리가 자기에게로 오는 것을 보시고 빌립에게 이르시되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로 먹게 하겠느냐?” 하시니
요한복음은 우리라고 부드럽게 말씀하시지만 마태, 마가 그리고 누가의 공관복음을 보면 더 노골적으로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을 마을로 보내자는 제자들의 요청에 예수님은 단호하게 명령하십니다.
(마 14:16) 예수께서 이르시되 “갈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아무 것도 없는 제자들에게 오천 명을 갑자기 먹이시라니 이 무슨 황당한 요구이십니까? 기가막힐 노릇입니다. 네, 우리 인생은 종종 우리에게 기가막힌 요구를 합니다. 감당하기 힘든 사람을 돌보도록 만듭니다.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마주하게 만듭니다. 감당하기 모욕을 견디게 하십니다. 감당하기 힘든 일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요! 주님은 왜 빌립이 감당하기 힘든, 불가능해 보이는 명령을 하실까요? 거기에는 이유가 있습니다.
(요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이미 계획을 갖고 계십니다! 오천 명을 먹이실 방법을 다 생각해 두고 계십니다. 그러면서 빌립에게 그 일을 맡기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를 시험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빌립에게 믿음이 있는지를 확인하시고자 한 것입니다. 믿음을 갖는게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에게는 지금 문제를 해결하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제자들이 믿음을 갖게 하는 것입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갖게 할 수만 있다면 시험과 시련은 얼마든지 감당할 가치가 있습니다. 믿음이 무엇이기에 그렇습니까? 참 생명에 이르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이유로 여호와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100세에 얻은 독자 이삭을 바치라는 시련을 주셨습니다. 이것은 그의 믿음을 시험하는 것으로 시험을 통과한 그는 의롭다 하심을 얻었습니다. 영생을 얻었습니다. 부자는 자신의 전재산을 믿는 청지기에게 모두 맡깁니다. 믿지 않는 청지기에겐 한 푼도 맡기지 않습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만 있으면 무엇이든 맡길 수 있습니다. 주님은 믿는 자녀에게 영생과 하나님 나라를 상속하십니다. 중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저희 진리는 왜 학교에서 이렇게 숙제를 많이 내주냐고 징징댑니다. 더 놀아야 하는데 싫다는 것이죠. 아내는 불만이 없습니다. 진리가 숙제를 얼마나 열심히 잘 하느냐를 봅니다. 4학년에 필요한 학습능력을 갖추는지가 관심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왜 자꾸 내게 이런 시련을 주시냐고 묻습니다. 주님의 관심은 그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가 참된 믿음을 갖는지를 보십니다. 그 믿음은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도록 인도하며 그 안에서 영생을 누리도록 인도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믿음을 얻을 수만 있다면 시험과 시련은 견딜 가치가 있고도 남기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참된 믿음으로 시험을 거뜬히 통과하시고 영생에 이르시기를 축복합니다.
3. 빼놓아서 안 되는 변수
예수님의 말씀을 들은 빌립은 어떻게 반응합니까? 그는 이과생입니다. 합리적입니다. 그래서 계산을 합니다.
(요 6:7) 빌립이 대답하되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찌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
5천 명에게 조금씩이라도 먹이려면 2백 데나리온 약 2만 불어치의 떡을 사와도 부족할텐데 우리에게 그런 돈이 어디 있냐는 말입니다. 그의 계산은 정확합니다. 합리적입니다. 그 결론은 불가능입니다. 그의 말에는 답답함과 실망이 묻어나옵니다. ‘부족하리이다…’ 우리도 빌립처럼 늘 계산하고 계획하고 준비하지만 그럴수록 답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처럼 늘 낙담하고 답답합니다. 그러나 그가 계산에 빠뜨린 변수가 있습니다. 우리도 늘 빠뜨리는 그 가장 중요한 변수는 바로 그의 눈 앞에 마주 서서 그를 시험하고 계시는 예수님입니다. 빌립을 시험하고 계시는 예수님, 빌립이 과연 믿음을 보여줄지를 기대하고 계시는 예수님 그리고 어떻게 이 문제를 해결할 지 이미 알고 계시는 예수님, 그 분을 빌립은 계산하지 않았습니다. 6절을 다시 보십시오.
(요 6:6) 이렇게 말씀하심은 친히 어떻게 하실 것을 아시고 빌립을 시험코자 하심이라.
예수님은 문제를 어떻게 풀지 이미 아시고 계십니다. 그 문제를 풀 수 있는 분이십니다. 진정 인생의 문제를 풀 수 있는 유일한 분이십니다. 눈 앞에 답이 있는데 우리는 그 답을 무시합니다. 예수님이 손 대시면 병자가 일어나고 죽은 자가 살아나고 바람과 파도도 잠잠케 된다는 사실을 빌립은 잊었고 우리도 늘 잊어버립니다. 예수님은 열쇠입니다. 예수님은 정답입니다. 예수님은 해결책입니다.
찬송가 585장에는 이런 배경이야기가 있습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개혁은 지지부진하고 교황청의 박해만 늘어가자 그만 지치고 낙심하여 한 동안 자포자기 상태로 지냈습니다. 하루는 아내가 검은 장례식복장을 하고 방에 들어왔습니다. “아니, 누가 죽었소?” “네,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무슨 소리요? 하나님이 어떻게 죽으신단 말이오?” “하나님이 죽지 않으셨다면 하나님을 믿는 당신은 이렇게 낙심해 있단 말입니까?” 그 말에 마틴 루터는 크게 깨달았습니다. 다시 일어나 용기를 내어 개혁을 다짐하며 만든 찬송이 바로 585장입니다.
내 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 환란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이 장수 누군가 주 예수 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예수님을 빼지 마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계시는 예수님을 무시하지 바랍니다. 여러분의 모든 인생계획에 반드시 예수님을 계산에 넣으시고 그 분의 능력으로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문제를 해결하시는 손
모든 제자들이 예수님의 명령에 낙심만 한 것이 아닙니다. 안드레는 조금 다른 반응을 보였습니다. 8, 9절입니다.
(요 6:8)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요 6:9)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졌나이다.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삽나이까?”
안드레도 과연 이게 해결책이 되겠는가 생각했지만 중요한 것은 오병이어를 예수님 앞에 들고왔다는 것입니다. 무엇이 없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입니까? 그것은 바로 기대, 희망입니다. 전혀 눈꼽만큼도 기대가 없었다면 그는 어떻게 했을까요? 아이가 들고온 도시락을 보고 ‘얘야, 너나 먹어라. 그것 가지고 누구 코에 붙이려고 그래?’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그는 그 보잘 것 없는 것을 보고는 ‘예수님이라면 혹시나’하고 생각했습니다. 그의 기대는 눈꼽만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은 겨자씨만한 믿음이라고 부르셨습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가지고 주님 앞에 나오면 산을 옮기는 기적을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런 믿음을 제자들에게 기대하셨던 것입니다. 그 믿음을 보시고 그가 들고온 오병이어로 산을 옮기셨습니다. 11절입니다.
(요 6:11) 예수께서 떡을 가져 감사기도하신 후에 앉은 자들에게 나눠 주시고 고기도 그렇게 저희의 원대로 주시니라. (요 6:12) 그들이 배부른 후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남은 조각을 거두고 버리는 것이 없게 하라.” 하시므로
무엇이든 예수님 손에 들리면 해결됩니다. 예수님 손에 들리면 응답됩니다. 예수님 손에 들리면 부족함이 없습니다. 그리스신화에 나오는 마이더스 왕은 만지는 모든 것을 황금으로 바꾸어놓았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손은 만지는 모든 것을 치유하시고 살리시고 구원하십니다. 사탄의 손은 만지는 모든 것을 타락시키고 망하게 하고 죽입니다. 사탄은 예수님의 손을 십자가에 못으로 박았지만 하나님은 예수님을 다시 살리셔서 그 손으로 온 세상에 생명을 나누어 주도록 하셨습니다.
우리가 가진 것이 아무리 작고 보잘 것 없는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우리가 가진 문제가 아무리 크고 두려운 것이라도 상관없습니다. 예수님에게 들고가 그 분 손에 맡기십시오. 아무리 작은 것도 오천 명을 먹이는 큰 능력이 됩니다. 아무리 큰 문제도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처럼 해결됩니다.
여러분의 인생과 시련과 고민과 고난과 사명과 선교를 다 주님 손에 맡기십시오. 오병이어의 기적이 일어나는 것을 볼 것입니다.
5. 주님 손에 들린 인생
윤치영 전도사가 구치소에 갇힌 지 일 주일이 지나자 2인1실의 방에 있던 흉악하게 생긴 백인죄수가 묻더랍니다. ‘넌 무슨 죄목으로 왔냐?’ ‘납치, 집단폭행.’ ‘니 직업은 뭔데?’ ‘교회 전도사’ ‘뭐? 전도사가 무슨 납치, 집단폭행이냐?’ 그래서 여차저차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대화 중에 갑자기 성령님이 윤전도사의 마음에 역사하셨습니다. ‘그런데 너 하나님을 아냐?’ ‘모른다.’ ‘하나님이 널 사랑하시는 것을 아냐?’ ‘그럴리가 있냐?’ ‘생각해 봐라. 이 호주 전역에 구치소, 감옥에 전도사, 목사가 몇 명이나 되겠냐?’ ‘거의 없겠지.’ ‘죄수는 얼마나 많겠냐?’ ‘엄청 많겠지.’ ‘그 많은 죄수 중에 이 희귀한 전도사와 한 방 쓸 확률은 얼마나 되겠냐?’ ‘엄청 낮겠지.’ ‘그런데 니가 전도사와 한 방 쓰지 않냐? 이거야 말로 하나님이 너를 사랑하신다는 증거가 아니고 뭐냐?’ ‘정말이네.’ ‘맞다. 하나님이 그 수많은 죄수 중에 너를 사랑하셔서 이 희귀한 나를 이 방에 넣어주신 거다. 너는 선택된 거야. 넌 죄인 아니냐?’ ‘맞다.’ ‘하나님의 아들이 왜 십자가에 죽은 줄 아냐?’ ‘모른다.’ ‘너를 살리기 위해서야.’ 그 흉악한 범죄자가 무릎 꿇고 회개를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 시작했습니다. 밤새도록 1인 부흥회를 한 것입니다.
다음 날 아침 교도관이 그를 불러내더니 이유도 설명하지 않고 다른 방에 넣는 겁니다. 들어가니까 다른 죄수가 묻습니다. ‘넌 무슨 죄목으로 왔냐?’ ‘납치, 집단폭행.’ ‘니 직업은 뭐냐?’ ‘교회 전도사.’ ‘뭐? 전도사가 무슨 납치, 집단폭행이냐?’ 똑같이 전도가 시작되고 회개하고 부흥회를 했습니다. 그 다음 날 아침 또 방을 바꾸라고 합니다. 이유도 모른 채 일주일 동안 방을 옮겨다니며 매일 새로운 죄인을 전도하였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어 호주 교도소에서 1년 동안 윤치영 전도사를 통해 믿기힘든 부흥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어느 날 마음에 ‘아, 주님이 저 영혼들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감옥에 넣으셨나’ 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동시에 주님의 마음으로 죄인들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청소년을 사랑해서 사역한다 생각했는데 그것이 다 인간의 사랑이었고 진정한 사역은 하나님의 사랑이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을 배신한 그 소녀에 대한 분노, 억울한 일에 대한 원망이 다 눈 녹듯 사라지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사랑하게 되었습니다. 지금은 그렇게 깨달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님의 역사를 간증하는 윤치영 목사로 뜨겁게 사역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에게 계획이 다 있습니다. 감당하기 힘든 시련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에게 참된 믿음을 기대하시기 때문입니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어라.’ 하실 때 두려워하고 낙담하지 말고 무엇이든 주님 앞에 들고 나가 고백하십시오. ‘주님만이 먹이실 수 있습니다. 주님은 다 하십니다.’ 이 고백으로 기적을 경험하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