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6:35-40/누구의 결단인가
210912 오병이어4
1. 누구의 결단인가
기독교로 개종한 유명인사들에 관한 글을 쓰던 미국의 어느 저널리스트가 영국작가 C.S.루이스를 찾아가 인터뷰를 했습니다. 그는 루이스에게 어떻게 회심의 결단을 내렸는지 물었습니다. 루이스는 자신이 결단을 내린 적이 없다고 답했습니다. “그럼 어떻게 당신이 기독교인이 된 겁니까?” “하나님이 저를 구원하기로 결단을 내리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포위하셨고 나는 도저히 피할 수 없었습니다. 저는 굴복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이것이 제가 기독교인이 된 이유입니다.”
루이스의 인터뷰는 기독교 진리의 핵심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늘 그 저널리스트처럼 생각합니다. 우리가 결단하고 믿고 선을 행하여서 회심하고 개종하고 구원받는 줄 압니다. 세상 모든 종교가 가진 관점입니다. 그러나 성경은 우리의 결단이나 믿음, 선행이 구원에 결정적 요소가 아니라고 선언합니다. 루이스가 답했듯이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의 결단 때문입니다. 이것이 무슨 의미일까요? 오늘 본문이 그 답을 주십니다.
오병이어 기적으로 시작된 예수님과 무리의 대화를 3주째 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지난 주 읽은 본문의 마지막 절에서부터 시작합니다. 예수님은 당신이야말로 생명의 떡이며 당신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는다는 선언을 하시는 동시에 믿지 않는 무리들을 꾸짖으셨습니다. 이어서 도대체 왜 당신을 믿고 영생을 얻는 이가 있는 반면 기적을 보고도 믿지 못 하는 이가 있는지를 설명하십니다. 이 문제는 후에 종교개혁자 칼빈에게도 무척 궁금한 문제여서 예정론을 발전시키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오늘은 믿고 영생을 얻는 일이 어떻게 벌어지는지를, 다음 주에는 왜 믿지 못 하는 이들이 있는지를 살펴봅니다.
2. 구원의 동력
사람은 어떻게 기독교인이 됩니까? 우리가 복음을 듣고 판단하고 믿기로 결단함으로 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전혀 다른 관점을 보여주셨습니다. 37절입니다.
(요 6:37)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하나님 아버지께서 사람을 예수님에게로 이끄십니다. 사람이 스스로 가는 것인 줄 알았는데 하나님의 인도 때문에 예수님에게 가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인도가 없이 스스로 갈 수는 없을까요? 후문맥의 44절을 보십시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하나님의 인도가 결정적 요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예수님께로 인도하시기 위해 먼저 예수님을 우리에게로 보내셨습니다. 39절과 44절입니다.
(요 6:39) 나(예수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예수님을 보내셔서 우리가 찾아가 의지할 구원의 반석으로 삼으셨습니다. 그럼 예수님을 무엇을 하십니까?
(요 6:38) 내가 하늘로서 내려온 것은…
(요 6:37) …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9) …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요 6:44) …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이 땅에 오신 주님은 하나님의 인도를 받는 사람들을 환영하시고 지키십니다. 그리고 마지막 날에 그를 부활시키셔서 영생을 누리게 하십니다.
3. 중매장이
하나님은 사실상 예수님과 우리를 만나도록 소개하신 분, 중매하신 분입니다. 성경은 종종 예수님을 영적 신랑, 우리를 영적 신부로 비유합니다. 이 신랑과 신부를 만나도록 하신 분이 바로 하나님 아버지이십니다. 하나님은 왜 중매장이가 되셨을까요? 우리는 언제 중매장이가 됩니까? 사랑하는 자녀, 좋아하는 후배, 아끼는 동료가 홀로 있는 것을 보면 역시 아끼는 다른 이와 소개하고 싶어지지 않습니까? 중매하는 이의 마음입니다. 주님은 죄인인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당신의 사랑하는 아들과 영적인 부부가 되기를 원하셨습니다. 이 마음을 본문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부릅니다. 38-40절입니다.
(요 6:38)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요 6:39)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요 6:40)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 아버지의 뜻이 세 번이나 반복됩니다. 그 뜻은 아들에게 보내셔서 그 아들을 보고 믿는 모든 이들에게 영생을 주시는 겁니다. 여기서 뜻으로 번역된 헬라어 델레마는 의지, 목적, 소원의 뜻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단어는 주기도문에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처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하는 구절에서도 사용됩니다. 하나님의 간절한 뜻, 의지, 소원, 모든 행하심의 목적, 하늘에서도 이루어졌고 땅에서도 이루려하시는 그 계획은 무엇입니까?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상 하늘과 땅에서 일어나는 모든 구원사건의 동력은 바로 이 하나님의 뜻, 의지, 소원 때문입니다. 이것이 구원의 비밀입니다. 하나님의 이 뜻과 의지와 행하심이 없었다면 구원역사는 애초에 시작도 없었을 터이고 지속되지도 못 했을 터이고 완성되지도 못 할 것입니다. 이 의지 없이 인간이 구도, 길을 찾아서 구원에 이르려 하는 것은 마치 촛불로 우주를 밝히려는 것처럼 부질없는 짓일 겁니다. 하나님의 이 구원의지 덕분에 저와 여러분이 구원에 이른 것을 깨닫고 영원히 찬양하시길 축복합니다.
4. 믿음조차도
한 가지 의문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믿지만 우리 인간도 여전히 믿음의 결단을 해야 하는 것 아닙니까? 인간의 역할은 없는 건가요? 인간의 역할은 대부분 누리는 것입니다. 본문을 다시 보십시오.
(요 6:35) …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요 6:37) …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
(요 6:39) …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
(요 6:40) …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마지막 날에 내가 이를 다시 살리리라 하시니라
주님께 가면 주리지 않고 믿으면 영원히 목마르지 않습니다. 주님께 가면 환영받습니다. 주님으로부터 보호받고 부활합니다. 믿으면 영생을 얻고 부활합니다. 여기서 주리지 않고 목마르지 않고 환영받고 보호받고 부활하는 것은 일방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는 것은 딱 두 가지 주님께 가는 것과 믿는 것 뿐입니다. 이 두 가지는 사실 같은 행위입니다. 주님께 가는 것이 곧 믿는 것입니다. 구원에서 우리의 역할은 거의 대부분이 누리는 것이고 하는 것은 주님께 가는 것 곧 믿는 것 뿐입니다. 그런데 44절을 보면 주님께 가는 것조차도 누리는 것에 가깝습니다.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예수님에게 가는 것 곧 믿는 것도 아버지께서 인도해 주셔야만 가능합니다. 사실상 하나님이 믿을 수 있도록 불러주시고 판을 깔아주시고 보여주시고 깨우쳐주시고 결단하게 해주신 덕분이라는 의미입니다. 분명 인간이 자신의 의지로 결단하고 믿어야 하는 것 같은데 알고보면 이 인간의 결단과 믿음조차도 하나님의 뜻이요, 계획이요, 작품이요, 섭리라는 말입니다. 또 45절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6:45) (이사야) 선지자의 글에 ‘저희가 다 하나님의 가르치심을 받으리라’ 기록되었은즉 아버지께 듣고 배운 사람마다 내게로 오느니라.
하나님이 가르치셔서 우리는 예수님께 가서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5. 선물, 선물, 선물
비유로 설명해 봅니다. 우리 집에 TV가 없는 것을 보고 친구가 크리스마스에 최신형 80인치 삼성 벽걸이 TV를 선물해 주었습니다. 전화를 걸어서는 ‘친구야, 오늘 택배가 갈테니 사인하고 받으면 돼. 내가 설치비와 팁까지 다 지불했어. 메리 크리스마스.’하고 알려주었습니다. 마침내 택배차량이 도착하더니 친구가 말한 대로 TV가 도착해서 거실에서 커다란 TV로 온 가족이 재미있는 영화를 보았습니다. 제가 가족들에게 ‘이 TV가 어떻게 생긴 줄 알아? 아빠가 사인해서 여기 걸라고 했잖아. 이렇게 멋진 TV를 보는 것은 아빠 덕인 줄 알라고.’라고 한다면 어떻겠습니까? 아무 것도 모르는 아이들은 아빠 덕인 줄 알 겁니다. 하지만 아내는 어이가 없겠지요. ‘여보, 그게 어떻게 당신 덕이야. 당신 친구 선물이지.’
누구 말이 맞습니까? 사인하고 받은 내 덕입니까, 선물한 친구 덕입니까? 제 정신이라면 친구의 선물이라는 것을 모를 사람이 없을 겁니다. 그러나 영적 시각장애인인 우리는 그걸 모릅니다. 모든 것을 준비하여 선물로 주셨다는 성경을 읽으면서도 자꾸만 믿음으로 사인하고 선물 받은 것이 무슨 큰 공로요, 자격인 줄 알고 자꾸만 우리는 내가 믿어서 구원받았다 생각합니다. 우리가 믿은 것도 무한한 주님의 은혜입니다. 사도 바울의 말입니다.
(엡 2:8)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엡 2:9)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치 못하게 함이니라.
6. 끝까지 고정된 시선
그러므로 기독교 신앙이란 내가 하나님을 위해 뭘 하느냐를 주목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가 하는 것에 주목하면 할수록 율법주의와 교만에 빠지든, 절망과 자기비하에 빠지든 늪에 빠집니다. 참 신앙은 하나님이 나를 위해 뭘 하셨느냐를 주목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을 깨닫고 하나님의 능력과 은혜를 바라볼 때 우리는 자아숭배가 만들어내는 모든 교만과 자책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얻습니다. 진정으로 감사와 감격으로 하나님을 섬기는 능력을 얻습니다. 히브리서는 그래서 우리에게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이신 예수를 바라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주님의 결단이 우리를 구원하였습니다. 아버지의 음성을 듣고 십자가의 아들을 바라보십시오. 무한한 사랑과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심으로 영생의 길을 끝까지 달려가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