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0919 신이 되려는 인간 / 요 6:41-46

20210919 신이 되려는 인간 / 요 6:41-46

요 6:41-46/신이 되려는 인간

210919 주일설교 오병이어5
1. 프랑켄슈타인
1818년 영국소설가 메리 셸리는 너무 유명해서 읽지는 않았어도 이름을 모두 들어보았을 법한 소설 ‘프랑켄슈타인’을 발표합니다. 천재과학자 프랑켄슈타인 박사는 시체를 이용하여 사람을 창조하는 일에 성공합니다. 2m가 넘는 괴물로 태어난 그는 박사가 자신의 짝도 만들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것에 격분해 박사의 주변인들을 하나씩 해치기 시작합니다. 결국 박사와 괴물이 모두 죽는 비극으로 소설은 막을 내립니다. 이 소설은 인간이 창조주가 되려할 때의 일어날 비극을 보여준다고 종종 해석합니다.
‘사피엔스’라는 책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은 유발 하라리는 책의 마지막 장에서 21세기 인간은 프랑켄슈타인 박사가 하려던 일을 실제 이미 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유전공학, 로봇공학 그리고 비유기물공학을 통해서입니다. 유전공학은 우리 몸의 유전자를 변형하여 병들지 않고 오래 사는 몸을 만드는 것이고 로봇공학은 몸에 기계장치 같은 것을 연결하여 더 강하고 오래 가는 몸을 만드는 것입니다. 이 두 가지만 보면 인류의 미래는 장미빛인데요, 사실은 세 번째가 더 크고 근본적이면서 위협적일 수도 있는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합니다. 비유기물공학은 인간의 몸이 아닌 독립된 로봇이나 컴퓨터에 인간의 뇌의 정보를 업로드하거나 혹은 인간의 뇌를 빌릴 필요도 없이 AI 로봇이나 컴퓨터와 같은 새로운 종을 탄생시키는 것입니다. 이 세 번째 가능성이 현실화되면 그 새로운 종은 거의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질 터이고 인간은 그 훨씬 강하고 지혜롭고 늙거나 죽지도 않는 새로운 종에게 지구의 주인자리를 물려주고 종말을 맞이할 수도 있다고 합니다.
인간이 신의 자리를 탐냄으로 일어나는 비극을 오늘날 수많은 소설가와 학자가 경고하지만 사실 최근의 일이 아닙니다. 인류역사가 시작된 이래 늘 인간은 신의 자리를 탐냈고 그로인한 비극은 온 세상에 바이러스처럼 퍼졌습니다. 소설가와 학자들이 이 문제를 간파하기 수 천년 전에 이미 성경은 이를 통찰하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그 경고는 우리의 구원과도 깊은 연관이 있습니다.
2. 믿지 못 하는 이유
요한복음 6장을 계속 살펴봅니다. 지난 주에는 인간이 믿고 영생을 얻는 것이 어떻게 가능한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하시기로 한 결단과 택하심, 인도하심과 지키심 덕분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놀라운 은혜를 모든 이에게 주십니다. 오늘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왜 끝까지 믿지 못 하는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하늘에서 내려온 생명의 떡이라고 선포하셨지만 무리들 중에는 그 선언을 믿지 못 하는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36절입니다.
(요 6:36)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느니라.
‘그러나’ 즉 너희가 찾던 생명의 떡이 바로 나라고 가르쳐 주었지만 너희는 듣고도, 또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믿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41절입니다.
(요 6:41) 자기가 하늘로서 내려온 떡이라 하시므로 유대인들이 예수께 대하여 수군거려
수군거린다고 번역된 헬라어 ‘공귀조’에는 불평하다, 반항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선언을 받아들이지 않고 불평하고 반항한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왜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고도, 진리의 선포를 듣고도 믿지 못 하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들 마음의 방향 즉 의지 때문입니다. 5:40을 보십시오.
(요 5:40)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
3. 증거와 믿음
그들은 ‘원하지 않았’습니다. 믿지 못 하는 이유는 믿을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 아니라 믿기를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원리 한 가지를 발견합니다. 증거가 먼저일까요, 믿음이 먼저일까요? 옳은 순서는 증거를 보고 믿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에선 그 반대의 일이 종종 일어납니다. 믿음을 먼저 가지고 그에 부합하는 증거만을 찾아내고 부합하지 않는 증거는 무시합니다. 우리의 마음이 깨끗할 때는 증거가 우리를 믿음으로 이끕니다. 그러나 편견과 욕심이 자리잡으면 믿고 싶은 것의 증거만 찾습니다. 그런 일을 늘 보지 않습니까? 투자수익이 엄청나다는 소리를 듣는 순간 이성이 마비되면서 그 이익의 실현을 눈 앞에 그리며 그 투자가 정상적이고 성공적일 수밖에 없다는 증거를 기어이 찾아냅니다. 반면 사기일수도 있다는 증거는 애써 무시하고 외면합니다.
예수님을 찾아온 무리들은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없다고 이미 믿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비롯한 주님의 능력과 가르침과 선포를 모두 무시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없는 증거를 찾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그들이 잘 아는, 보잘 것 없는 배경을 가진 분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42절을 보십시오.
(요 6:42) 이르되 “이는 요셉의 아들 예수가 아니냐? 그 부모를 우리가 아는데 제가 지금 어찌하여 하늘로서 내려왔다 하느냐?”
갈릴리 가버나움에 모인 무리들은 갈릴리 나사렛 동네의 목수 요셉과 그의 아들 예수를 알고 있었습니다. 그가 하늘에서 온 하나님의 아들, 메시야라는 사실을 인정하기 어려웠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고향 나사렛에서 겪으신 일과 다르지 않습니다. 마가복음 6장입니다.
(막 6:3) “이 사람이 마리아의 아들 목수가 아니냐 야고보와 요셉과 유다와 시몬의 형제가 아니냐? 그 누이들이 우리와 함께 여기 있지 아니하냐?” 하고 예수를 배척한지라.
4. 원치 않는 마음
이런 불신앙의 뿌리에는 바로 이 마음, 믿고 싶지 않은 마음이 숨겨져 있습니다. 엄밀히 말하면 ‘믿고 싶은데 안 믿어져서 못 믿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기에 안 믿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믿고 싶지 않은 마음, 하나님께로 가고 싶지 않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을 사도 바울은 로마서 1장에서 잘 묘사해 주십니다.
(롬 1:20)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찌니라.
정직한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면 그 안에 담긴 창조주의 증거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반응은 어떠했습니까?
(롬 1:21)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하나님을 인정하고 감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간은 어떤 상태에 놓입니까? 21절 이하입니다.
(롬 1:21) …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롬 1:22)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둔하게 되어 (롬 1:23) 썩지 않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을 사람과 짐승과 벌레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지혜를 잃고 어리석게 되어 결국 온갖 우상숭배에 빠집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존재를 의식하고 있으면서도 왜 하나님을 섬기지 못 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를 28절이 설명해 줍니다.
(롬 1:28)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가 싫었기 때문입니다. 믿지 못 하는 것이 아니라 믿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왜 하나님을 믿고 싶지 않을까요? 구원과 영생과 온갖 복을 주시는 하나님을 도대체 누가 왜 믿고 싶지 않겠습니까?
5. 하나님이 되려는 마음
그 이유를 인간이 하나님을 거역한 최초의 사건 선악과 사건이 잘 보여줍니다. 뱀이 하와를 유혹할 때 무엇이라고 하였습니까?
(창 3:5)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는 너희 눈이 밝아 하나님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심이니라.
하나님 같이 되라는 겁니다. 창조주에게 의존하는 피조물, 창조주에게 순종하는 피조물, 창조주를 경배하는 피조물이 더 이상 될 필요 없다는 말입니다. 뱀은 지금도 똑같은 말을 우리 마음에 속삭입니다. “너는 의존적일 필요 없어. 자존적인 존재가 될 수 있어, 아무에게도 복종할 필요 없으니 네 마음대로 해, 아무에게도 고개 숙일 필요 없어, 모두가 너에게 고개를 숙이도록 해.” 이렇게 하나님처럼 되려면 하나님에게 가서 굴복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고 순종하고 경배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으려는 인간은 사실 자신이 신이 되려는 욕망을 품고 살아갑니다. 가인의 후손들은 자신의 안전을 창조주에게 의지하지 않고 스스로 성을 쌓고 타인을 위협하고 복수함으로써 지키려 합니다.
(창 4:17) … 가인이 성을 쌓고 그 아들의 이름으로 성을 이름하여 에녹이라 하였더라… (창 4:23) 라멕이 아내들에게 이르되 “아다와 씰라여, 내 소리를 들으라. 라멕의 아내들이여, 내 말을 들으라. 나의 창상을 인하여 내가 사람을 죽였고 나의 상함을 인하여 소년을 죽였도다. (창 4:24) 가인을 위하여는 벌이 칠배일찐대 라멕을 위하여는 벌이 칠십 칠배이리로다.” 하였더라.
창 11장에 이르면 사람들이 바벨탑을 쌓으며 무엇이라 말합니까?
(창 11: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그들은 하늘에 닿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올라가려는 것입니다. 자신들의 이름을 드러내려 했습니다. 창조주를 높이는 대신 말입니다. 하나님은 ‘생육하고 번성하여 온 땅에 충만하라’고 명하셨는데 그들은 뭉쳐서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려 하였습니다. 후에 예수님께서 오셔서 다시 제자들을 보내시며 예루살렘에서 성을 쌓고 살려하지 말고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와 땅끝까지 흩어져 당신의 제자가 되라 하시지 않았습니까? 창조 시의 명령을 회복하셨습니다. 인간은 성을 쌓고 모여서 자신들의 왕국을 세우려 합니다. 하나님은 온 세상에 충만하고 땅 끝까지 가서 모든 백성을 섬겨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을 거부하는 인간 내면에 깊이 자리잡은 욕망은 무엇입니까? 바로 신이 되려는 마음입니다. 우리가 누구에게도 고개 숙이지 않으려 하고, 누구에게도 신세지지 않는 존재라 믿고, 누구에게도 의지하지 않는 존재라고 믿으려 할 때 그것이 곧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입니다. 이 마음 때문에 사람들은 하나님을 전심으로 의지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습니다. 이웃과도 더불어 살지 못 합니다. 불신앙은 바로 이 하나님처럼 되려는 마음, 교만에서 싹 튼 잡초입니다.
6. 굴복하는 마음
예수님은 우리가 이런 마음을 마음을 버리고 겸손히 하나님에게 굴복하기를 명하십니다. 43-44절을 보십시오.
(요 6:4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너희는 서로 수군거리지 말라. (요 6:44)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면 아무라도 내게 올 수 없으니 오는 그를 내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리라.”
수군거리지 마라, 교만과 불신앙을 버리라, 신이 되려는 마음을 버리고 아버지께 굴복하고 이끌림을 받으라. 그렇지 않으면 믿음을 가질 수 없고 영생을 누릴 수 없다. 오늘 이 말씀이 교만을 버리지 못 하는 우리 모두에게 주신 말씀입니다.
우리 자신의 교만을 버리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헛된 욕망을 버리고 하나님에게 완전히 굴복하고 그리스도를 멀고 마시는 삶을 시작해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자신의 뜻을 버리고 아버지의 뜻에 굴복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에 응답해야 합니다. 순종이 제사보다 낫다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전도하려는 이웃의 마음 안에 있는 이 불신앙을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예수님도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의 믿음을 위해, 특히 베드로의 믿음을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사탄이 그들을 삼키려 하였지만 주님의 기도가 그들을 지켜내셨습니다.
C.S.루이스는 하나님의 포위와 압박에 굴복한 것이 그의 회심이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주님은 다메섹 가는 길에서 사도 바울을 포위하시고 압박하셔서 회심시키신 것처럼 루이스도 회심시키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지금 우리도 동일한 사랑으로 포위하시고 능력으로 압박하십니다. 그 분의 끝없는 사랑과 전능한 영광 앞에 엎드려 굴복하는 것이야말로 오늘 우리가 신이 되려는 헛된 교만을 버리고 우리의 창조주를 깨끗한 마음으로 만나는 길입니다. 이것이 구원입니다. 이것이 영생의 시작입니다. 은혜로우신 주님에게 굴복하시고 영생을 시작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