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17 신 부재의 단서 / 시 14:1-3

20211017 신 부재의 단서 / 시 14:1-3

시 14:1-3/신 부재의 단서

211017 신존재증명2
1. 신 부재의 단서
지난 주에는 신이 존재함을 보여주는 단서를 세 가지 살펴보았습니다. 우주의 존재, 우주의 정교함과 질서 그리고 우주의 아름다움과 의미 등이었습니다. 다양한 반응을 교우들로부터 받았습니다. 어려웠다는 이도 있었고 지루했다는 이도 있었습니다. 이런저런 법칙, 이론이 난무해서 어려웠을 수 있었겠다 싶고 쉽게 설명하지 못 해 송구합니다. 또 이미 하나님을 믿는 교우들은 하나님이 있다는 단서를 나열하는 것이 지루할 수밖에 없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반면에 궁금했던 문제의 답을 얻었다는 이들이나 전도할 이에게 설명할 방법을 찾았다는 반응도 있었습니다. 진한 에스프레소 한 잔을 마신 것 같다는 피드백이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교회에는 영아로부터 어르신에 이르기까지 전 연령대가 다 있는 것처럼 신앙에도 초신자로부터 평생 성경을 공부한 이들까지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하다보니 모두를 이해시키기 어려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저의 부족함을 성령님이 메워주시기만을 기도하면서 오늘은 신 부재의 단서를 살펴보겠습니다. 적지않은 이들이 신 존재의 단서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오늘 살펴볼 신 부재의 단서를 마주하면 믿기가 어렵다고 합니다. 지난 주도 그랬지만 오늘도 시간이 관건이니 세 가지 단서만 최대한 압축해 설명해보겠습니다. 이 세 가지 신 부재의 단서는 전체 유신론보다는 기독교 진리에 대한 반박에 가깝습니다.
2. 과학의 발전
먼저 현대과학의 발달이 신의 부재를 증명하지 않았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난 주에 잠깐 설명드렸지만 과학은 신의 존재도, 부재도 증명하지 못 합니다. 신은 애초에 과학의 탐구대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과학의 레이다가 신의 존재를 애초에 잡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고 신의 부재가 증명된 것은 아닙니다. 우리 군 부대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다고 적의 비행기가 없다고 결론내릴 수 없습니다. 레이더에 잡히지 않는 스텔스기를 가졌다면 말입니다.
‘하지만 성경과 과학은 충돌하지 않나요? 창조론과 진화론의 갈등만 봐도 분명하지 않습니까?’ 이 갈등에는 많은 오해가 있습니다. 창조론을 근거로 진화론을 공격하는 이들이나 진화론을 근거로 창조를 부정하는 이들이나 모두 비슷한 오해를 합니다. 두 주장은 같은 대상을 다루지만 다루는 영역이 다릅니다. 창조론은 생명의 기원에 관한 선언이고 진화론은 생명체의 생존방식에 관한 가설입니다. 예를 들어봅니다. 저희가 한국에서 간장게장을 얼리고 진공포장하여 보낸 택배상자를 받았습니다. 저녁식탁에서 게장을 먹던 아이 둘이 이렇게 다툽니다. ‘이건 할머니가 보낸 거야. 여기 할머니 이름이 적혀 있잖아.’ ‘무슨 소리야? 우체국이 보낸 거라고. 우체국 도장 안 보여?’ 누가 맞습니까? 둘 다 맞지요. 택배를 보낸 사람과 그 택배를 전달한 기관은 서로 대립되지 않습니다. 할머니가 보냈고 우체국이 전달한 거지요. 전혀 싸울 일이 아닙니다.
그럼 목사님, 진화론이 맞다는 말입니까? 저는 그것이 본질적 문제는 아니라고 믿습니다. 기독교계 안에도 성경의 창조선언을 문자 그대로 믿고 진화론을 전적으로 부정하는 보수적인 입장, 하나님이 진화를 통해 창조하셨다고 믿는 진보적 입장 그리고 종의 진화는 거부하지만 종 안에서의 진화는 받아들이는 중도적 입장까지 아주 넓고 다양한 스펙트럼이 존재합니다. 수많은 입장 중 어느 것이 맞습니까? 잘 모르겠습니다. 누구도 확답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받아들이는 모든 과학적 사실은 반증이 될 때까지만 받아들이는 유보적 진리입니다. 반증가능성이 없는 주장은 신념이지, 과학이 아닙니다. 과학은 늘 사물을 더 잘 설명하는 새로운 가설에 의해 과거 모두가 믿었던 가설이 대체되는 방식으로 발전해 왔습니다. 과거에 천동설이 지동설에 의해 대체된 것처럼 말입니다. 지금 우리가 자명한 진리로 믿는 것 역시 과학이 더 발전하면 또 다른 더 설득력있는 가설에 의해 분명히 대체될 것입니다. 21세기 초가 과학적 발전의 종착역이라고 믿는 이는 아무도 없지요. 그러므로 이 중 어느 입장이 가장 옳으냐를 지금 최종적 결론으로 내릴 수도 없으려니와 그럴 필요도 없습니다. 성경은 과학책도 역사책도 아닙니다. 우리교단의 신조인 웨스터민스터신앙고백과 교단헌법교리서가 선언하듯 ‘성경은 우리 삶과 신앙에 관한 무오한 진리’입니다. 우주와 생명의 기원이 하나님께로부터 왔다는 위대한 진리를 깨우치십니다. 이 성경에 의해 우리는 하나님으로부터 세상이 나왔음을 분명히 믿습니다. 그 방법이 어떠했는지는 계속 연구하고 더욱 밝혀내도록 과학자들에게 맡겨두십시다. 그러므로 과학이 신의 부재를 증명했다고 믿을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3. 악과 고통의 존재
이 첫째 신 부재의 단서가 이성적 장애물이었다면 두 번째 단서는 조금 더 감성적입니다. 세상의 악과 고통이 그것입니다. 선하고 전능하신 신이 계신다면 세상에 왜 이토록 많은 악과 고통이 존재하느냐는 것입니다. 그 신이 악을 처벌하고 고통을 없애주셔야 하지 않느냐는 것이지요. 세상에 만연한 악인들의 범죄와 악행, 빈곤과 질병을 마주하면 누구라도 금방 이런 생각이 들고 특히 그것이 자신과 사랑하는 이들에게 닥친 문제면 더욱 더 현실적인 도전이 됩니다. 그래서 악과 고통을 보면 세상에 신이 없는 것이 분명하다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순환논리의 늪에 빠져듭니다. 자, 우리는 왜 유독 인간세계에만 악이 아닌 선이 있어야 하고 고통이 아닌 행복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할까요? 자연을 보십시오. 강한 사자가 약한 사슴을 쫓아가 쓰러뜨려 잡아먹을 때 누가 사자를 악하고 사슴을 선하다고 합니까? 강한 침팬치가 살아남고 약한 침팬치는 먹이를 못 구해 병들어 죽을 때 누가 자연이 왜 이토록 잔인하냐고, 공정치 못 하다고 원망합니까? 자연에는 선도, 악도 없습니다. 자연의 법칙은 오직 약육강식, 적자생존입니다. 그것이 진화의 원리입니다. 자연세계에는 결코 들이대지 않는 선악의 기준과 고통없는 복지의 이상을 인간세계에만 들이밀며 모든 인간이, 그가 강하든 약하든 상관없이 선하게 보호받고 복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요구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선과 복지의 근거는 어디서 왔습니까? 바로 신에 대한 믿음에서 나왔습니다. 즉 신이 없는 근거라고 내세우는 선악과 고통의 기준 자체가 신으로부터 나왔다는 말입니다.
신이 없다면 그래서 세상은 우연히 발생했고 운좋게 진화해서 인간도 자연세계의 일부일 뿐이라면 우리도 선악도 없고 양육강식과 적자생존에 의해 강한 자만 살아남는 것이 필연적입니다. 그런데 왜 선이니, 악이니 하는 기준을 내세우고 양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이 아닌 모든 인간의 존엄한 권리를 내세우며 약자도 보호받아야 마땅하다고 우리는 주장하는 것일까요? 이미 우리 마음 깊은 곳에는 신이 있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 아닙니까? 또 있어야 한다고 믿기 때문은 아닐까요?
여러 번 말씀드렸지만 우리 문명은 신에 대한 믿음 위에 세워졌습니다. 참 신에 대한 믿음 위에 선 사회, 문화, 국가는 건강하고 발전합니다. 거짓 신에 대한 믿음 위에 선 사회, 문화, 국가는 병들고 신음하다가 결국 무너집니다. 오늘날 서구선진국은 무신론자이 엄청 많은데요? 네, 그 서구선진국을 오늘날의 모습으로 발전시킨 것이 2천 년 전 지중해 연안에서 시작되어 유럽으로 퍼져나간 기독교 문명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기독교의 기초 위에 세워진 번영한 사회에서 무신론을 주장하는 이들은 부모님의 은혜로 태어나 부모님 집에서 자고 먹고 부모님 차 타고 학교 가서 부모님 학비로 공부하면서 ‘엄마, 아빠가 내게 해준 게 뭐가 있어?’하고 투정부리는 사춘기 소녀와 뭐가 다를까요?

그럼 선하고 전능한 하나님이 계신다면 왜 세상을 고치지 않는 것입니까? 왜 내 문제에 개입하지 않으십니까? 하나님은 세상을 고치고 계십니다. 우리 문제에도 개입하고 계십니다. 다만 우리가 모를 뿐입니다. 마치 지구 위에 서서 지구가 시속 800마일로 자전하는 것을 못 느끼는 것과 같습니다. 지구가 돈다는 게 말이 돼? 그런데 우리가 어지럽지도 흔들리지도 넘어지지도 않아? 우리가 못 느낀다고 안 도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못 느낀다고 하나님이 일하지 않으시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일하심을 성경이 가르쳐주십니다. 하나님은 성육신하신 아들을 세상에 보내셔서 우리의 고난에 동참하십니다. 십자가와 죽으심을 통해서 악을 물리치고 고난의 원인을 해결하셨습니다. 부활과 승천과 재림을 통해 마침내 악과 고난을 영원히 심판하실 것입니다. 지구가 너무 크기에 그 빠른 자전을 우리가 못 느끼듯이 하나님의 일하심은 너무 깊고 오묘하고 크기에 우리가 못 깨달을 뿐입니다. 그러나 마침내 우리는 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악과 고난이 심판을 받고 의와 생명이 영원히 승리하는 것을 말입니다.
지구의 자전을 못 느껴도 해가 뜨고 지는 것을 보며 알 수 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일하심을 못 느껴도 세상을 자세히 보면 악과 고난 가운데서 여전히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역사하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이들이 철이 들면 비로소 얼마나 큰 부모님의 사랑과 돌봄으로 자신이 자랐는지 깨닫는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도 믿음의 눈을 뜨고 악과 고난과 싸우시며 최후승리를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역사를 볼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4. 문제 많은 기독교인
셋째 단서는 부도덕한 기독교인들입니다. 종종 도덕적인 무신론자보다 더 부도덕한 기독교인을 만나는데 이것만 봐도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기 어렵다 합니다. 영국에서 유학하며 기독교를 접한 간디도 말하기를, 성경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지 않기가 어려운데 기독교인을 보면 그리스도를 믿기가 어렵다고 했습니다. 대부분 기독교인인 당시 영국인들이 저지른 인도침략과 인종차별을 겪고 그렇게 느끼는 것이 이상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존재한다면 그 분을 믿는 기독교인들 중 문제 많은 이들이 왜 이렇게 많은지 몇 가지 답변이 있습니다.
첫째 메신저가 부실하다고 메시지가 거짓이라 할 수는 없습니다. 수학교사가 미분을 잘 설명하지 못 했다고 수학의 공리가 바뀌지는 않습니다. 설명을 잘 못 했다는 것은 그 교사가 수학의 공리를 제대로 이해 못 했다는 것이지, 그로인해 2+2=4가 아닌 5가 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기독교인이 부도덕하다고 기독교의 메시지가 거짓이 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아닙니다. 물론 심정적으로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어쩔 수 없지요.
둘째 교회 문이 열려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교인들을 자격심사를 하며 받아들이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다보니 사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들도 많이 들어옵니다. 그들이 일으키는 문제도 교회 밖에서 보면 기독교인이 일으키는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상황을 가리켜 알곡 사이에 뿌려진 가라지라고 하셨습니다. 아무튼 이런 비난이나 억울함도 교회가 안고 가야 하는 짐입니다.
마지막은 기독교의 복음이 가진 위대함 때문입니다. 복음은 다른 모든 종교와 달리 인간의 선함과 상관없는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로 선택받아 구원에 이른다고 가르치십니다. 구원받기 위해 선하고 도덕적인 사람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죄인의 모습 그대로 은혜로 구원해 주시고 심지어 죄가 더할수록 은혜를 더 크게 주신다고 하십니다. 주님은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고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자, 이 메시지는 의인과 죄인 중 누구에게 더 매력적일까요? 당연히 죄인 아닙니까? 죄인을 찾는다는데 죄인이 오지 의인이 오겠습니까? 반면 구원을 위해 도덕적이어야 하고 선을 행해야 하고 계명을 잘 지켜야 하는 종교에는 어떤 사람이 갈까요? 자기절제력이 뛰어나고 진리에 관심이 많고 선한 일을 많이 하는 이들이 아닐까요? 그래서인지 교회에는 죄인들이 많습니다. 예수님 곁에 의로운 바리새인들은 없고 세리와 죄인들이 가득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또 그래서인지 유명한 범죄자들이 감옥에서 개종하고 나왔다는 기사를 보면 열이면 열 기독교인입니다.
그래서 착시현상이 생깁니다. 마라톤을 하는데 한 사람은 출발선 10km 앞에서 시작하고 다른 사람은 10km 뒤에서 시작한다고 가정합시다. 두 사람은 무려 20km나 차이가 납니다. 이런 상황을 모른 채 반환점에 선 사람이 볼 때 어떤 일이 생길까요? 앞에서 시작한 사람은 천천히 뛰어도 죽어라고 뛰는 뒷 사람보다 한참이나 앞서 있습니다. 사람들이 그를 보면서 ‘당신은 왜 열심히 안 뛰는 거요? 저 앞 사람 봐요. 한참을 앞서 가더구만. 당신은 뭐했소?’ 하지 않을까요?
범죄자 가정에서 태어나 절제가 무엇인지 모른 채 온갖 나쁜 일만 하며 살던 사람이 뒤늦게 십자가의 도를 깨닫고 회심을 했다고 합시다. 반면 유복하고 교양있는 집에서 태어나 좋은 교육을 받고 성공적 경력을 쌓으며 사는 지도층 인사가 있는데 기독교의 복음을 모른다고 합시다. 제 3자의 눈에 누가 더 도덕적이고 훌륭한 사람입니까? 누가 봐도 후자가 아닌가요? 하지만 교회는 누가 다닙니까? 아직 죄악의 물이 덜 빠진 전자입니다. 은혜는 누가 입었습니까? 자신의 과거가 부끄러워 고개도 못 드는 전자입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이는 누구입니까? 여전히 몸에 밴 나쁜 습관을 버리려고 애쓰지만 잘 되지 않아 늘 괴로운 전자입니다. 구원받은 천국백성은 누구입니까? 전자입니다. 왜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오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5. 위대한 복음
(눅 5:32)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
부도덕한 사람들이 교회에 있다고 해서 하나님이 없다고 할 수 없습니다. 가라지가 섞여 들어오는 한이 있더라도 하나님은 교회 문을 활짝 열어 온 세상 모든 사람들을 부르십니다. 세상 모든 공동체에서 의로운 사람, 선한 사람, 괜찮은 사람, 자격있는 사람에게만 문을 열어줄 때 교회만은 어떤 죄인도 외면하지 않고 문을 열어줍니다. 이것이 복음의 위대함이요, 교회의 위대함이요, 하나님의 놀라운 사랑입니다. 이 진리를 모르기에 사람들은 편협한 생각으로 이런저런 문제가 있다고 하나님까지 부인하려 듭니다.
(시 14:1) 어리석은 자는 그 마음에 이르기를 ‘하나님이 없다’ 하도다. 저희는 부패하고 소행이 가증하여 선을 행하는 자가 없도다. (시 14:2) 여호와께서 하늘에서 인생을 굽어 살피사 지각이 있어 하나님을 찾는 자가 있는가 보려 하신즉 (시 14:3)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
하나님의 부정하려는 것이 오히려 하나님의 크심을 모르는 무지와 오만의 증거가 아닐까요?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과 섭리를 깨닫고 겸손히 하나님을 인정하는 모든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