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7:1-9/성공이냐 하나님이냐
211112 요한복음
1. 오판하는 인간
2차세계대전에 참전한 독일군 병사들 허리띠 버클에는 Gott mit uns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글귀가 새겨져 있었습니다. 주변국을 침략하고 유대인, 장애인, 집시들을 학살하는 일을 하면서도 그들은 ‘하나님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고 믿었고 제국교회 목회자들은 전투를 앞둔 군인들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축복하였습니다. 도대체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믿을 수 있었을까요? 인간의 이성과 도덕성은 참으로 믿을 게 못 된다는 생각이 듭니다.
올 해 저는 총회서기를 맡아서 섬기면서 교단 내 이러저런 분쟁에 대처할 일이 많았습니다. 지난 주간에도 어느 교회의 갈등이 일으킨 상황을 해결하러 총회임원진과 함께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혼란스러울 때가 종종 있습니다. 갈등하는 양측 다 확신에 찬 눈빛으로 하나님의 뜻을 행하느라 이럴 수밖에 없다고 합니다. 왜 같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이 서로 정확히 반대되는 입장에 설 수밖에 없는 것일까요? 적어도 둘 중 한 쪽은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으며 사실은 하나님을 거스르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어떤 경우엔 양쪽 다 하나님을 거스르는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일은 총회 뿐 아니라 교회에서 흔히 마주 합니다.
우리는 왜 이토록 쉽게 자주 오판하는 것일까요? 어떻게 하면 진짜 하나님의 뜻을 찾을 수 있을까요? 오늘도 우리의 어두운 눈을 열어주시는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2. 갈릴리에 머무신 이유
요한복음 7장으로 들어갑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 머물고 계십니다. 그 이유를 1절은 유대인들이 당신을 죽이려고 하였기 때문입니다.
(요 7:1) 이 후에 예수께서 갈릴리에서 다니시고 유대에서 다니려 아니하심은 유대인들이 죽이려 함이러라.
유대인들 즉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왜 예수님을 죽이려 했습니까? 바로 앞 장인 6장에서는 예수님이 갈릴리에서 오병이어의 기적을 행하신 사건으로 예루살렘 지도자들이 등장하지 않습니다. 그 앞 장인 5장에서 유월절 기간 예루살렘을 방문하신 예수님이 안식일에 베데스다 연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유대인들의 살해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이 7장의 사건은 5장 상황에 이어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2절을 보면 초막절이 가까웠습니다.
(요 7:2) 유대인의 명절인 초막절이 가까운지라.
유월절은 봄이고 초막절은 가을이니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후 갈릴리로 피하시고 반 년 정도가 지났다고 볼 수 있습니다. 초막절 역시 유월절처럼 유대 성인 남자라면 누구나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절기를 지키는 때입니다. 예수님의 동생들이 등장해 예수님에게 권합니다.
(요 7:3) 그 형제들이 예수께 이르되 “당신의 행하는 일을 제자들도 보게 여기를 떠나 유대로 가소서. (요 7:4) 스스로 나타나기를 구하면서 묻혀서 일하는 사람이 없나니 이 일을 행하려 하거든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 하니
3. 불신앙의 동생들
번역이 대단히 형식적으로 들립니다만 이들은 동생들이 아닙니까? ‘형님, 이 갈릴리 촌구석에 묻혀 지내시면 어떻게 성공하겠습니까? 유대로 올라가셔서 제자들을 모으셔서 핫하게 뜨셔야지요.’ 이런 뉘앙스 쯤 되겠습니다. 동생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려는 일이 다른 유명 랍비들처럼 자신의 가르침을 퍼뜨려 제자를 모아 일가를 이루려 하는 것으로 이해한 듯 보입니다. 성경에 없지만 당시 진보와 보수유대학파를 대표했던 힐렐과 샴마이, 성경에 나오는 바울의 스승이자 힐렐의 손자였던 율법사 가말리엘 같은 대학자로서 성공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성공을 기대하는 동생들로서 당연한 바람이요, 하등 이상할 것이 없습니다. 그러나 동생들의 말을 요한복음은 어떻게 평가합니까? 5절입니다.
(요 7:5) 이는 그 형제들까지도 예수를 믿지 아니함이러라.
불신앙입니다. 이것이 왜 불신앙일까요? ‘형제들까지도’라는 표현에 답이 있습니다. 6장에서 오병이어를 경험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또 다시 기적을 행해주시기를 기대하며 몰려들었습니다. 그 태도를 예수님은 불신앙이라고 꾸짖으셨습니다. 그들의 불신앙처럼 이 동생들도 불신앙의 사람이었다는 의미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세상에 드러나 성공하는 것을 바랐기에 예수님을 위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것은 신앙이 아니라 오히려 불신앙이었습니다. ‘세상에서 드러나 성공하는 것’이 결코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의 반응에서 분명히 드러납니다. 6절, 8절 그리고 9절입니다.
(요 7: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 때는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거니와 너희 때는 늘 준비되어 있느니라… (요 7:8) 너희는 명절에 올라가라. 나는 내 때가 아직 차지 못하였으니 이 명절에 아직 올라가지 아니하노라.” (요 7:9) 이 말씀을 하시고 갈릴리에 머물러 계시니라.
4. 성공과 하나님
6절, 예수님의 때는 예루살렘에서 유대지도자들에게 고난당하고 십자가에 달리실 때입니다. 너희 때는 동생들이 말한 세상에서 드러나 성공하는 때입니다. 8절, 세상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무 때나 할 수 있지만 십자가를 지는 것은 아직 기다려야 한다, 나는 성공하러 온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러 왔기에 너희 말처럼 올라가지는 않겠다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성공이 아니라 십자가입니다. 성도를 교회로 부르신 이유는 성공하라는 것이 아니라 십자가를 지라는 것입니다.
(마 16:24)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누그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을 것이니라.”
바로 이 점을 우리는 잊어버리기에 오판합니다. 십자가가 아닌 성공을 쫓습니다. 성공과 하나님의 뜻을 동일시합니다. 나의 욕망과 하나님의 바람을 동일시합니다. 그래서 자꾸만 자기 뜻을 행하면서도 하나님의 뜻이라고 우기고 자기 성공을 포장하려고 하나님의 영광을 들먹입니다. 여기에서 온갖 문제가 발생합니다.
그럼 기독교인들은 성공하면 안 됩니까? 기독교인들은 실패만 해야 하나요? 예수님을 좇는 것은 성공이냐, 실패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좇는 것을 세상이 보면 성공처럼 보이기도 하고 실패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세상에선 그것이 중요하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별로 중요한 문제가 아닙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의 삶은 대부분 당대에는 그보다 더 비참할 수 없는 실패로 보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에서는 영원한 성공입니다.
우리의 시선이 교정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의 성공과 하나님 나라의 성공을 혼동하는 잘못을 자주 저지릅니다. 목사, 선교사가 되고 믿음을 지키기 위해 귀한 것을 버렸다는 간증자들이 부자였을수록, 높은 지위를 가졌을수록, 성공한 사람일수록 더 은혜를 받습니다. 우리는 자신도 모르게 그들의 희생이 부자가 아니거나 별 지위가 없거나 성공하지 않은 이들의 희생은 덜 가치있다고 여기는 것 아닙니까? 사도 바울은 자신이 예수님을 믿기 위해 버린 것이 다 배설물과 같다고 했는데 말입니다.
고난을 이긴 이들이 큰 부자가 되거나 성공했다는 간증을 들을 때 용기를 얻습니다. 고난을 통과했는데도 별 부자가 되지 않았거나 세상의 기준으로 성공을 거두지 못 한 채 살아간다면 별다른 은혜를 받지 못 합니다. 하나님의 복주심을 세상의 부자됨과 성공으로 우리는 혹시 여기고 있는 것이 아닙니까? 성경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예수 믿고 부자되거나 성공한 이가 없습니다. 오히려 믿기 전에 가졌던 재산을 잃고 실패하고 고난당하는 자리로 떨어졌습니다. 현실에서도 믿음으로 고난을 통과했는데 다시 성공하여서 부자가 된 이가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고난을 통과한 후에도 여전히 가난하고 몸이 아프고 주변에서 괴롭힘 당하는 이들이 믿음을 지키기가 어렵습니까? 후자가 훨씬 어렵지 않나요? 믿음으로 몇 년 잘 버티면 모두 부자 만들어주신다면 얼마나 믿음 지키기가 쉽습니까? 잘 버텼는데도 여전히 고난과 가난과 박해가 끊이지 않는데 믿음 지키기가 훨씬 어렵지 않나요? 그런데 우리는 후자보다 전자에 더 은혜를 받습니다. 왜일까요? 우리도 어서 속히 고난을 끝내고 그들처럼 성공하고 부자되고 싶어서가 아닐까요?
우리의 시각이 이렇게 잘못되어 있기 때문에 넉넉하게 신앙생활 하다가 고난을 만나면 성도들과 함께 기도로 이길 생각을 하지 못 하고 교회를 떠나버립니다. 창피해서, 자존심 상해서, 실패한 사람으로 보일까봐… 그럼 사도들은 창피해서 모두 도망가야 마땅한 사람이 아닙니까?
5. 십자가를 지는 성도
주님을 좇는 일은 십자가를 지는 길입니다. 예수님도 오늘 본문에서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습니까? 7절입니다.
(요 7:7)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지 못하되 나를 미워하나니 이는 내가 세상의 행사를 악하다 증거함이라.
세상이 예수님을 미워하였듯 그 분을 따르는 이들도 미워합니다. 주님을 좇는 일은 세상의 성공과 아무 상관이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소위 예수 잘 믿어 성공했다는 분들의 간증을 소개하기가 조심스럽습니다. 성공과 부유함은 하나님의 은혜임에 틀림없지만 자기를 부인하고 십자가를 지는 길과 반드시 겹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일반은총에 속하는 것이기에 많은 변수가 영향을 미칩니다. 시험성적을 예로 들어봅시다. 좋은 머리를 갖고 난 아이, 집중력이 높은 아이가 당연히 유리합니다. 다소 재능이 부족해도 그를 잘 도와줄 수 있는 집안에서 태어났거나 좋은 학교, 교육시스템이 있는 사회에서 자란 아이도 행운입니다. 재능이 있는데 몸이 약한 아이는 운이 나쁠 수 있습니다. 원치 않게 가정에 문제가 생기거나 사회적으로 큰 혼란이 발생해도 운 나쁜 결과를 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런 다양한 변수 때문에 아이가 공부를 잘 하거나 못 하거나 그것이 하나님의 사랑을 입고 사명자로 사는데 별 영향을 미치지 못 합니다. 하나님은 작은 자를 들어 큰 자를 부끄럽게 하시는 분입니다.
구원받은 삶은 우리의 재능, 성공, 부유함, 교양 따위가 변수가 되지 못 합니다. 오직 하나님의 무한하고 큰 사랑과 능력만이 우리를 구원하십니다. 그 압도적인 하나님의 존재 앞에서 인간의 희생, 인간의 성공은 모두 보잘 것 없는 변수일 뿐입니다. 성공이 곧 하나님의 뜻이 아니기에 성공이 자랑일 수 없고 성공이 목표일 수도 없습니다. 성도의 자랑은 오직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이요, 성도의 목표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좇아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시각이 이렇게 바뀌면 비로소 우리의 오판이 현저히 줄어듭니다. 나의 성공을 하나님의 뜻으로 포장하지 않으면 많은 경우 어리석은 판단을 버릴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좇기 위해 십자가를 지고자 하면 많은 경우 문제가 해결될 뿐 아니라 문제가 발생하지도 않습니다. 우리는 어떻게 성공할까, 어떻게 내 뜻을 이룰까가 아니라 어떻게 하면 내가 이 가정에서, 이 교회에서, 이 일터에서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좇을까를 구해야 합니다.
‘목사님, 우리가 십자가를 지면 결과적으로 성공은 하나님이 덤으로 주시지 않나요?’ 이런 질문도 더 이상 하지 마십시다. 이 질문의 기대정답은 ‘네, 하나님이 성공은 알아서 해주십니다. 내가 하나님 일을 하면 하나님은 내 일을 알아서 해준다고 하지 않습니까?’ 아직도 우리는 십자가보다 성공에 더 방점을 찍고 있지 않습니까? 네, 하나님이 우리 일을 도와주시지만 그것이 우리가 기대하는 성공과 부유함이 아닐 가능성이 아주 큽니다. 십자가를 지려면 성공에 대한 이런 미련 자체를 버려야 합니다. 이 십자가만 지면 성공을 주시겠지, 이 생각은 십자가를 지는 것이 아닙니다. 쟁기를 잡고 뒤를 돌아보는 자가 합당치 않듯 십자가를 지고 성공을 기대하는 것도 합당한 일이 아닙니다. 십자가를 지고 오직 우리 앞서 생명의 길 가신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을 좇는 것이 성공입니다. 예수님을 모시는 것이 부유함입니다.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이 최고의 행복입니다. 오늘 우리의 시선에 무엇이 가득 차 있습니까? 성공입니까, 예수님입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을 부르며 눈으로는 성공만 좇아가고 있는 것은 혹시 아닙니까? 우리 주의 성령님이 우리의 어리석고 미련한 마음을 고쳐주시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바라보도록 바꾸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와 여러분의 두 눈이 예수님으로 가득 차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