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220 위기의 사람들 / 삼상 28:4-7, 30:1-8

20220220 위기의 사람들 / 삼상 28:4-7, 30:1-8

삼상 28:4-7, 30:1-8/위기의 사람들

220220 주일설교
1. Online Only Christian
팬데믹 이후의 교회를 예상하는 기사들이 쏟아집니다. 빠지지 않는 지적은 이제 Online only Christian 즉 온라인으로만 예배 드리는 교인들이 늘어날 것이라는 예상입니다. 팬데믹은 수십 년간 지속하던 삶의 패턴을 뒤흔들어 놓았습니다. 강제로 온라인 예배를 드리게 만들었는데 익숙해지니 의외로 편합니다. 이동시간도 줄이고 옷 고를 필요도 없고 사람들과 부대끼는 일도 없고 헌금도 온라인으로 되고 목사얼굴도 더 또렷이 보이는데 얼마나 좋습니까? 이제 팬데믹이 끝나도 온라인으로만 예배해야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러나 과연 좋은 점만 있는 것일까요? Online Only 신앙생활은 과연 정상적인 신앙생활이라 할 수 있을까요? 여기 위기의 두 남자에게서 그 답을 들어봅니다.
2. 위기의 남자들
오늘 본문 사무엘상 28장과 30장은 기원전 1007년 경 곡창지대인 가나안 북부 이스르엘 평원을 차지하기 위한 이스라엘과 블레셋의 길보아산 전투를 배경으로 합니다. 전투가 벌어지기 전 큰 곤경에 빠진 사울과 다윗을 각각 소개했습니다. 사울은 모여든 블레셋의 대군을 보고 겁에 질립니다. 블레셋 군대는 수도 많았지만 이스라엘엔 없는 철제 무기와 병거를 가진, 당시로서는 첨단군대였습니다. 사울은 도저히 이 곡창지대를 지켜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한편 같은 시기에 사울의 살해위협을 피해 블레셋에 망명해 있던 다윗은 더 큰 위기를 만났습니다. 그들이 망명해 살던 마을에 아말렉인들이 침략하여 마을을 불사르고 모든 재산을 약탈하고 가족들까지 남김없이 납치해 간 것입니다. 이 상황에 절망하고 분노한 부하들이 다윗을 탓하며 그를 돌로 쳐 죽이려고까지 하여 크게 다급했습니다. 사울과 다윗, 이 두 위기의 남자는 절체절명의 위기를 어떻게 극복했을까요? 먼저 다윗은 하나님을 의지합니다. 30:6-7입니다.
(삼상 30:6) … 다윗이 크게 다급하였으나 그의 하나님 여호와를 힘입고 용기를 얻었더라. (삼상 30:7) 다윗이 아히멜렉의 아들 제사장 아비아달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에봇을 내게로 가져오라.” 아비아달이 에봇을 다윗에게로 가져가매
에봇은 제사장이 입는 조끼처럼 생긴 겉옷으로 그 주머니 안에 하나님의 뜻을 묻는 우림과 둠밈이라는 돌이 들어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바라보았고 제사장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묻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다윗은 용기를 내어 아말렉을 추격하고 결국 재산과 가족을 모두 되찾을 뿐 아니라 아말렉이 다른 마을에서 약탈한 것까지 전리품으로 얻습니다. 위기가 오히려 기회가 된 것입니다.
(삼상 30:18) 다윗이 아말렉 사람들이 빼앗아 갔던 모든 것을 도로 찾고 그의 두 아내를 구원하였고 (삼상 30:19) 그들이 약탈하였던 것 곧 무리의 자녀들이나 빼앗겼던 것은 크고 작은 것을 막론하고 아무것도 잃은 것이 없이 모두 다윗이 도로 찾아왔고
반면 사울은 크게 실패합니다. 그는 무당을 찾아갑니다. 28:7입니다.
(삼상 28:7) 사울이 그의 신하들에게 이르되 “나를 위하여 신접한 여인(무당)을 찾으라. 내가 그리로 가서 그에게 물으리라.” 하니 그의 신하들이 그에게 이르되 “보소서, 엔돌에 신접한 여인이 있나이다.”
그 결과는 어떠했습니까? 참혹한 비극입니다. 31장으로 가봅니다.
(삼상 31:6) 사울과 그의 세 아들과 무기를 든 자와 그의 모든 사람이 다 그 날에 함께 죽었더라. (삼상 31:7) (이스르엘) 골짜기 저쪽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과 요단 건너쪽에 있는 자들이 이스라엘 사람들이 도망한 것과 사울과 그의 아들들이 죽었음을 보고 성읍들을 버리고 도망하매 블레셋 사람들이 이르러 거기에서 사니라.
사울과 세 아들이 모두 길보아산 전투에서 죽고 전투도 대패하여 곡창지대의 마을을 모두 빼앗깁니다. 인생의 위기를 만나면 사울처럼 헛된 곳을 찾아다니지 말고 다윗처럼 하나님을 찾음으로 위기를 기회로 바꾸어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하나님과 단절된 삶
그럼 도대체 사울은 왜 하나님을 찾지 않고 무당을 찾았을까요? 사실 사울이 하나님을 찾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무당을 찾기 전에 먼저 하나님을 찾았는데 그 음성을 듣지 못 하였습니다. 28:6입니다.
(삼상 28:6) 사울이 여호와께 묻자오되 여호와께서 꿈으로도, 우림(제사장)으로도, 선지자로도 그에게 대답하지 아니하시므로
사실 사울은 절망하여 무당을 찾았던 것입니다. 그럼 하나님은 왜 다윗의 기도를 들으시면서 사울의 기도는 전혀 듣지 않으셨던 것일까요? 6절은 하나님 음성을 듣는 세 가지 통로를 소개합니다. 꿈, 우림, 선지자. 꿈은 구약시대 성도가 개인적으로 받는 응답입니다. 우림은 제사장을 가리킵니다. 앞서 설명하였듯, 제사장이 입는 조끼 에봇 주머니에 있는 돌로서 둠밈과 함께 하나님의 뜻을 물을 때 씁니다. 우림으로 대답하지 않으셨다는 말은 사울의 곁에 하나님의 뜻을 전할 제사장이 없었다는 뜻입니다. 선지자는 제사장과 달리 제도화되지 않은 하나님 음성의 전달자입니다. 제사장이 자격을 갖추고 성전에서 항상 활동하는, 제도화된 하나님의 메신저라면 선지자는 특정한 자격요건이 없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때에 누구라도 성령의 역사로 부름받아 한시적으로 활동하는, 비도제도화된 메신저입니다. 그 선지자도 전혀 보내주시지도 않았다는 말입니다. 한마디로 사울과 하나님의 관계는 철저히 단절되었습니다. 개인적 채널, 제도적 채널 그리고 비제도적 채널이 모두 막혀버렸습니다. 도대체 왜 이렇게 된 것일까요? 그 답은 삼상 21-22장으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나옵니다.
21장을 보면 다윗이 사울의 위협을 피해 도망치다가 당시 성막이 있는 놉으로 가 제사장 아히멜렉에게 음식을 얻어먹고 블레셋땅으로 피합니다. 이 사실을 전해들은 사울은 진노하여 제사장 일가를 다 잡아와 죽이려 합니다. 그 정황이 22장에 이렇게 나옵니다.
(삼상 22:17) (사울) 왕이 좌우의 호위병에게 이르되 “돌아가서 여호와의 제사장들을 죽이라. 그들도 다윗과 합력하였고 또 그들이 다윗이 도망한 것을 알고도 내게 알리지 아니하였음이니라.” 하나 왕의 신하들이 손을 들어 여호와의 제사장들 죽이기를 싫어한지라. (삼상 22:18) 왕이 도엑에게 이르되 “너는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죽이라.” 하매 에돔 사람 도엑이 돌아가서 제사장들을 쳐서 그 날에 세마포 에봇 입은 자 팔십오 명을 죽였고 (삼상 22:19) 제사장들의 성읍 놉의 남녀와 아이들과 젖 먹는 자들과 소와 나귀와 양을 칼로 쳤더라.
여호와를 두려워한 호위병들이 제사장을 죽이려 하지 않자 여호와 신앙이 없는 이방인 에돔사람 도엑을 시켜 엘리의 후손 85명의 제사장과 그 가족을 몰살시킵니다. 겨우 한 명 살아남은, 제사장 아히멜렉의 아들이 블레셋 지역의 다윗에게로 도망쳤는데 그가 앞서 아말렉을 추격할 때 다윗 곁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던 아비아달입니다. 이제 사울 곁에는 누가 남았습니까? 그를 위하여 하나님의 뜻을 물을, 자격을 갖춘 제사장이 다 죽고 한 명도 남지 않았습니다. 혹 다른 지방에 흩어져있던 엘리의 후손이 있었다 할지라도 과연 그가 사울을 찾아와 그를 돕겠습니까? 사울이 하나님의 종 제사장을 다 죽여버린 것은 그가 하나님을 어떻게 여기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도 당신의 제자들을 영접하는 것이 곧 당신을 영접하는 것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사울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제사장들을 다 죽이자 하나님은 그에게 제사장의 우림으로 말씀하지 않으시는 것은 물론 꿈으로도 말씀하지 않으시고 선지자를 보내 말씀하지도 않으셨습니다.
4. 온라인신앙생활
결국 사울이 무당을 찾은 것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기 때문이며, 그 단절은 스스로 초래한 일입니다. 바로 이 지점이 오늘 우리가 온라인온리신앙생활이 가능한지를 물을 때 고려할 점입니다. 온라인온리신앙생활은 하나님과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왜입니까?
사울이 원했던 꿈, 제사장, 선지자를 통한 하나님의 응답을 오늘날 우리에게 적용하자면 개인경건, 설교과 예배 그리고 성도간 교제에 해당합니다. 꿈은 개인경건생활 곧 QT, 성경읽기, 기도 등입니다. 제도권 채널인 제사장은 목회자의 설교와 상담, 공예배 등입니다. 비제도권 채널인 선지자는 전문목회자는 아니지만 바른 신앙을 가진 성도간 교제와 권면 등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음성을 개인기도시간에도 듣고 설교와 상담, 예배를 통해 듣고 또 성도간 교제와 권면을 통해서도 듣습니다.
온라인온리신앙생활은 이 중 비제도권 채널인 성도간 교제의 단절을 초래합니다. 자녀를 학교에 보낸 학부모들은 아시지요? 학교의 공식레터만으로 자녀의 학교생활과 진학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다 얻습니까? 그 못지않게 같은 학부모들, 지인들, 아이들, 사회뉴스 등 다양한 방식으로 정보를 얻지 않던가요?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목회자와 공예배를 통해서만 하나님의 뜻을 듣는 것이 아닙니다. 구역모임에서, 부서모임에서, 사역과 봉사 중에, 또래모임에서 교우들끼리 주고받는 권면과 공감과 확신과 위로가 얼마나 큰 지 모릅니다. 그래서 히브리서 10:25은 모이기를 권합니다.
(히 10:25) 모이기를 폐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제도권 채널인 설교와 예배, 상담도 마찬가지입니다. 상담을 하기는 무척 어렵습니다. 온라인으로 설교와 예배는 물론 드립니다만 이 역시 어려움이 생깁니다. 2년 여 팬데믹 동안 우리가 겪어서 알지만 온라인 예배를 드릴 때 우리의 마음가짐은 긴장을 유지하기가 무척 어렵습니다. 세수도 않고 잠옷차림으로 소파에 기댄 채 영상을 켜기 일쑤입니다. 접속이 잘 안 되어 예배가 끊어지거나 아이들이 부르면 예배 중에 자리를 뜨기 십상입니다. 예배당과 달리 집안의 온갖 일이 다 눈에 보이고 신경이 쓰여 작은 화면에 집중하기 어렵습니다. 예배는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온 마음과 정성을 다하여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집중하여야 합니다. 한 시간 화면을 켜고 있었다고 예배가 아닙니다.
(요 4:24) 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이렇게 성도간 교제가 없고 목회자와 공예배의 교류가 없으면 개인경건시간도 건조해질 수밖에 없습니다. 사울을 보십시오. 그가 제사장을 몰살했는데 제사장 뿐 아니라 꿈으로도 하나님은 응답하지 않으셨습니다. 예배와 성도의 교제에 소홀한 데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을까요? 예배와 성도의 교제를 사랑하지 않는 이에게 하나님의 응답이 개인으로는 허락될까요? 어렵습니다.
5. 세상을 충만케하는 교회
즉 온라인온리신앙생활은 교회와 단절된 채 하나님을 섬기겠다는 말인데 이는 불가능한 시도입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주님이 세상을 충만하게 축복하시는 통로이기 때문입니다. 에베소서 1장은 그리스도와 교회와 세상의 관계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엡 1:22) 또 만물을 그의 발 아래에 복종하게 하시고 그를 만물 위에 교회의 머리로 삼으셨느니라. (엡 1:23) 교회는 그의 몸이니 만물 안에서 만물을 충만하게 하시는 이의 충만함이니라.
머리되신 주님의 몸이 교회이고 그 발 아래 만물이 있습니다. 그리스도가 발 아래의 만물을 충만케 복주려 하실 때 당연히 어디를 통하지 않을 수 없습니까? 몸된 교회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세상에 은혜와 진리의 복을 수여하는 축복의 통로입니다. 교회를 외면하고 교회와 단절된 채 홀로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복을 누릴 수 있는 성도는 없습니다. 그러므로 교회와 단절된 온라인온리신앙생활은 불가한 시도입니다. 우리 교회과 온라인사역을 강화하려는 것은 온라인으로 세상과 접하는 세대에 접근하여 그들을 교회로 초청하려는 것이지, 온라인에만 머물러 있도록 환경을 만들어주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교회를 통해 성도와 세상을 복주십니다. 말씀을 통해 은혜와, 예배를 통해 진리를 선포하시고, 성도간 교제로 충만한 복을 주십니다. 그런 이들에게 개인적 경건을 통해서도 만나주십니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대면예배에 나와 주님을 만나십시오. 사울이 되지말고 다윗이 되십시오. 예배와 교회를 사랑하셔서 어떤 위기도 기회로 바꾸는 다윗같은 승리자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