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0 아버지가 누구냐 / 요 8:37-47

20220320 아버지가 누구냐 / 요 8:37-47

요 8:37-47/아버지가 누구냐

220320 사순절3주
1. 신분제와 선민의식
한국인과 친한 미국인들과 대화하다 보면 한국인의 라스트네임은 다 김, 이, 박이라고 농담할 때가 있습니다. 실제 한국인 절반이 김씨, 이씨, 박씨, 최씨이고, 한국인 다섯 명 중 한 명은 김씨입니다. 이런 현상은 이들 가문이 실제로 이렇게 번성했기 때문일까요? 16세기 조선 초만 해도 성씨를 가진 이는 왕족과 양반, 양민 등 10%에 불과했습니다. 조선 후기 광해군이 돈을 받고 신분과 벼슬을 파는 공명첩 제도를 실시하면서 노비와 천민 등이 소위 족보세탁을 하면서 90% 이상이 성씨를 가졌습니다. 이 때 더 비싸도 왕족, 귀족의 성씨를 선호했기에 지금처럼 김씨, 이씨, 박씨 등이 급격히 늘어난 것입니다. 그래서 학자들은 오늘날 족보의 90% 이상이 가짜일 것이라고 추정합니다. 당시 사람들이 왜 이렇게 족보세탁에 혈안이 되었을까요? 신분에 따라 다른 자질과 권리, 운명을 타고났다고 믿어 그들이 누리는 사회적 특권, 대접, 당하는 차별과 멸시가 하늘과 땅차이의 신분사회였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카스트제도가 남아있는 인도를 떠올리시면 됩니다.
그런데 조선시대나 인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신분에 대한 믿음과 차별이 덜하지 않는 사회가 있다면 바로 1세기 유대사회였습니다. 스스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믿었던 정통 유대인들이 가진 하늘을 찌를듯한 자부심과 반면 율법을 모르는 평민, 혼혈 사마리아인 그리고 타민족에게 가한 멸시와 차별은 상상을 초월하였습니다. 그들이 공개적으로 면전에 대고 개, 돼지 취급을 하는 것이 낯선 일이 아니었습니다. 유대사회에서 그들의 이 민족적 자존심을 건드는 것은 엄청난 반발은 물론이고 심지어 생명의 위협을 감수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오늘날까지 이어진 이 삐뚤어진 선민의식은 이스라엘이 팔레스틴 난민들을 위협하고 몰아내는데 큰 몫을 차지합니다. 이 이데올로기에 목숨을 걸고 도전하신 분이 바로 오늘 본문의 예수님이십니다.
2. 누구의 자손이냐
요한복음 8장으로 돌아왔습니다. 예수님과 유대인들의 대화가 계속됩니다. 39절을 보면 유대인들은 자신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임을 강조합니다.
(요 8:39) 대답하여 이르되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 하니…
이는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자부심의 표현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들이 하나님과 상관없는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를 퍼부으십니다. 44절입니다.
(요 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그 이유는 그들이 하는 짓이 마귀의 짓을 그대로 닮았기 때문입니다.
(요 8:44) “… 그(마귀)는 처음부터 살인한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없으므로 진리에 서지 못하고 거짓을 말할 때마다 제 것으로 말하나니 이는 그가 거짓말쟁이요 거짓의 아비가 되었음이라.”
(요 8:39) … 예수께서 이르시되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면 아브라함이 행한 일들을 할 것이거늘 (요 8:40)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하지 아니하였느니라. (요 8:41) 너희는 너희 아비(마귀)가 행한 일들(살인과 거짓)을 하는도다.” …
반면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님을 죽이려 하지 않고 사랑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요 8:42) 예수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이는 내가 하나님께로부터 나와서 왔음이라…”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스스로 믿고 주장하는 바가 아니라 행위를 근거로 판단하셨습니다. 이는 열매를 보고 나무의 종류를 판단한다는 당신의 말씀대로입니다. 자신이 아무리 포도나무라고 믿고 주장해도 무화과가 맺힌다면 그 나무는 무화과나무인 것과 같습니다. 예수님을 해치려 하고 거짓을 말하는 것은 그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며 반대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은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합니다. 야고보서는 예수님의 이 가르침을 인용하며 성도들에게 그 행위로 믿음을 증명하라고 권합니다.
3. 예수님은 어디에 
이는 오늘 우리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 기독교인이요, 하나님의 자녀라고 배우고 믿고 또 주장하지만 그 믿음이 참된 것인지는 말로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사기꾼일수록 더 번지르한 거짓말을 하고 이단, 사이비일수록 더 그럴듯하게 성경을 해석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행함으로만 확인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한다면 하나님의 자녀요, 예수님을 죽이고 속인다면 마귀의 자녀입니다. 그럼 눈에 보이지도 않는 예수님을 어떻게 사랑하고 또 죽인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이 승천한 후 세상에서 당신을 대신하는 존재 두 가지를 가르쳐주셨습니다. 첫째는 교회입니다. 예수님은 막 9장에서 복음전파를 위해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그들에게 한 것이 곧 당신에게 한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막 9:41) 누구든지 너희가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라 하여 물 한 그릇이라도 주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가 결코 상을 잃지 않으리라.
또한 사도 바울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는 그의 경험에서 나온 깨달음이기도 합니다. 행 9장을 보면 그가 교회를 박해하다가 다메섹 가는 길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났을 때 이런 말씀을 들었습니다.
(행 9:4) 땅에 엎드러져 들으매 소리가 있어 이르시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박해하느냐?” 하시거늘
그는 교회를 박해했는데 주님은 이를 당신을 박해하는 것으로 여기셨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그 가르침에 순종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공격하고 불순종하는 것은 곧 예수님을 해치고 불순종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대신하는 두 번째 존재는 바로 연약한 이웃입니다. 마 25장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마 25:40) 임금이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 하시고
요한 사도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인용하며 가르치기를, 이웃을 미워하는 것은 곧 살인이라 하였습니다.
(요일 3:15) 그 형제를 미워하는 자마다 살인하는 자니 살인하는 자마다 영생이 그 속에 거하지 아니하는 것을 너희가 아는 바라.
형제를 미워하는 것은 그 영혼을 죽이려는 것 곧 살인하는 것이며 이는 곧 예수님을 죽이려는 짓입니다. 거짓으로 비방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에게 거짓과 미움을 갖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에게 거짓과 살인을 저지르는 것이며 이것이야말로 그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반면 형제를 사랑하고 섬기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을 사랑하고 순종하는 것이며 곧 그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하는 것임에 틀림없습니다.
4. 살인의역사
하나님의 자녀임을 자랑하며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려했고 실제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인 유대인들을 가리켜 마귀의 자식이라고 저주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단지 당신을 향한 그들의 적개심만을 지적하신 것이 아닙니다. 가인이 아벨을 죽이고 이스라엘이 선지자들을 살해한 것 뿐 아니라 이후 교회 역사에도 이와같이 하나님의 이름을 내걸고 살인을 저질러온 마귀의 역사가 이어질 것을 아셨기 때문입니다.
오늘날까지 서구유럽과 아랍세계에 씻을 수 없는 증오와 반목을 심은 11세기 십자군 전쟁은 그 좋은 예입니다. 교황청과 왕들, 도시의 필요가 맞물려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내세운 성지수복이 아닌 무자비한 학살과 약탈, 증오만을 남겼습니다. 1950년대 미국에서 시작하여 한국에서 크게 성장한 Campus Crusade for Christ 소위 CCC 대학생선교회는 ‘그리스도를 위한 캠퍼스 십자군’이란 뜻입니다. 교황조차도 지난 2000년 교회의 역사적 과오라며 공개사과한 죄목 중 첫째로 꼽은 것이 바로 이 십자군 전쟁입니다. 그런데 사랑의 복음을 전하겠다는 이들이 캠퍼스의 십자군이 되겠다고 하니 과연 아랍인들이 들으면 복음을 믿고 싶은 마음이 생기겠습니까?
멀리 갈 것도 없습니다. 1960년 대까지도 공개활동을 마다하지 않았던 쿠 클럭스 클란 즉 KKK단은 개신교 근본주의에 뿌리를 두고 흑인과 흑인에 동조하는 이들을 차별과 테러, 살인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그 흔적을 지금도 개신교 근본주의가 지배하는 지역과 정치권 곳곳에서 어렵잖게 찾을 수 있습니다. 최근 우리 귀에 심심찮게 들려오는 아시안증오범죄도 이런 증오와 멸시에 기반한 폭력의 역사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5. 하나님의자녀들
이런 무자비한 폭력과 살인의 역사는 어디서 시작되는 것일까요? KKK단에 참여한 이들을 흉측한 얼굴과 온 몸에 문신을 하고 칼을 들고 다니는 이들이 아닙니다. 복면을 벗은 그들은 존경받는 군인이요, 인상 좋고 친절한 이웃집 아저씨요, 같은 백인들에게 모범적인 지역유지요, 주일마다 교회당에 앉아 성실하게 찬송가를 부르는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여기 예배당에 앉은 우리 중 누구라도 거짓에 현혹되고 미움에 사로잡히고 광기에 휩쓸리면 흑인들을 목매다는 KKK단이 될 수 있고, 아랍인들에게 칼을 휘두르는 십자군이 될 수 있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라고 소리치는 유대인이 될 수 있다는 뜻입니다. 그 살인과 폭력의 역사는 우리 마음 한 켠에서 시작된 작은 미움과 차별과 텃세에서 시작됩니다. 무게감도 없는 눈꽃송이 하나하나가 쌓여서 굵은 나뭇가지를 부러뜨리고 똑똑 떨어지는 물방울이 긴 세월과 만나면 바위를 뚫듯 우리가 의식하지 못 한 채 마음에 쌓아가는 미움, 분노, 무시, 경멸의 파도가 쌓여서 사람의 마음을 찢고 삶을 파괴하고 생명을 앗아가는 폭력과 살인의 쓰나미가 됩니다.
연예인들이 팬들의 악플세례를 견디다 못 해 극단적인 선택을 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무 생각없이 자신의 배설물같은 감정을 쏟아놓은 악플러들의 저주가 쌓이고 쌓이면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하고 생명도 앗아가는 무서운 저주가 되기 때문이 아닙니까? 에베소서는 이런 폭력과 살인의 쓰나미가 시작되는 곳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엡 4:26)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형제의 잘못으로 마음에 분노가 생겨도 그것으로 형제를 미워하는 죄를 품지 말라는 것이고, 그 분노를 해가 지도록 품어서 쌓아놓지 말라는 뜻입니다. 왜 분노를 쌓아두면 안 됩니까? 첫째는 분노가 쌓아두면 반드시 미움의 독을 뿜어내고 그것은 곧 살인이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앞서 설명했듯이 그 쌓인 분노가 모이고 모여 거대한 증오와 폭력의 쓰나미를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분노와 미움의 악순환은 반드시 대를 이어 악순환을 일으키기 때문입니다. 자녀는 부모를 닮습니다. 부모가 사랑하는 것도 닮고 믿는 것도 닮고 섬기는 것도 닮습니다. 미워하는 것도 닮고 해치는 것도 닮고 살인하는 것도 닮습니다. 분노와 미움은 우리의 마음도, 영혼도, 가정도, 사회도, 자녀들도 모두 해치는 마귀의 살해도구입니다. 그렇다면 분노와 미움을 품고사는 것이야말로 우리가 마귀의 자손임을 증명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면 어떻게 마귀의 살해도구가 될 수 있습니까? 전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형제, 자매를 사랑하고 더 나아가 원수까지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이나 주장이 아니라 이 믿음과 순종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증명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은 누구의 자녀입니까? 마귀의 자녀가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로 증명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