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327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 요 8:48-59

20220327 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 요 8:48-59

요 8:48-59/믿지 않는 그리스도인

220327 사순절5
1. 제퍼슨의 성경
워싱턴 D.C.의 스미소니언 박물관에 가시면 미국건국의 아버지 중 한 명이 토마스 제퍼슨의 성경을 보실 수 있습니다. 미국의 3대 대통령이기도 한 그는 2달러 지폐에 초상화가 나올 만큼 미국건국에 지대한 공을 세운 인물입니다. 제퍼슨의 성경이라고 이름붙힌 이 성경은 곳곳이 오려져 있습니다. 왜일까요? 그가 예수님의 신성을 믿지 않았기에 기적에 관련된 모든 구절을 오려내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동정녀 탄생부터 모든 기적, 부활과 승천을 모두 오려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위대한 지혜와 도덕의 스승으로 여기고 미국이 그의 지혜와 삶을 모범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제퍼슨의 믿음은 오늘날 세속화된 서구사회가 복음을 향해 가진 태도를 잘 보여줍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고결한 삶을 부정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의 탁월한 도덕과 깊은 지혜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인들이 그 모범을 따라 사는 것을 비난하지 않습니다. 자신들도 필요할 때 그런 지혜와 도덕의 도움을 받고자 합니다. 다만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라고 주장하는 것을 받아들이기는 주저합니다. 이를 인정하는 순간 그들은 훨씬 큰 부담에 직면하기 때문입니다. 당신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부름에 응답해야할 의무를 집니다. 부활과 심판과 천국과 지옥의 메시지를 받아들여야 하고 자신들의 삶이 평가받는 부담을 느끼기 때문입니다.
2. 누더기가 된 복음
그래서 오늘날 일부 교회와 기독교인은 현대인이 받아들일 만한 메시지를 만들고자 복음에서 예수님의 신성, 부활과 승천, 성도의 부활과 죄인의 심판과 천국과 지옥 등의 메시지를 뺍니다. 그야말로 제퍼슨의 성경처럼 누더기가 된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설교는 부부관계의 문제를 해결하는 법, 직장생활을 활기차게 하는 법, 고난을 이기고 성공적인 삶을 사는 법 등의 How to 메시지로 축소되었습니다.
이것은 현대교회가 직면한 심각한 위기입니다. 설교는 듣기 쉽고 이해하기도 쉽고 따르기도 쉬워졌지만 반면 굳이 교회 오지 않아도 들을 수 있는 수많은 세속적 메시지와 비슷해졌습니다. 설교의 무게감이 현저히 떨어졌습니다. 하나님 아들의 거역할 수 없는 엄중한 부르심에서 말 잘하는 목사가 들려주는 유익한 교훈과 도움되는 지혜 정도로 전락하고야 말았습니다. 영생의 메시지가 주던 깊고 풍성하고 위대한 메시지는 실종되고야 말았습니다. 설교를 듣고 가슴을 치며 죄를 회개하거나 제자로의 부르심 앞에 깊이 고민하거나 삶을 모두 드리노라는 결단과 헌신은 사라지고, 도움이 되었고 위로를 받았고 기분이 좋아졌다는 반응에 만족합니다. 과연 이래도 괜찮을 것일까요? 교회는 제대로 전하고 있는 것일까요? 무엇을 회복해야 하는 것일까요?
3. 돌을 든 유대인
오늘은 요한복음 8장의 마지막 단락을 읽었습니다. 초막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셔서 가르치시는 예수님의 대화를 묘사한 8장은 재미있는 구조입니다. 8장의 시작은 간음하다 잡혀온 여인을 돌로 치려던 유대인들의 모습으로 시작하는데 마지막은 예수님을 돌로 치려는 그들의 모습으로 끝납니다. 그들은 죄인을 돌로 치려는 의인이라고 스스로 생각했지만 사실은 하나님의 아들을 돌로 치려는 죄인일 뿐임이 드러납니다. 스스로 의롭다 여기며 이웃을 향해 돌을 던지려는 우리의 모습이 이와같지 않은지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8장 중반부에서 예수님이 당신은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을 때 분명 적지않은 유대인들이 주님을 선지자로 믿기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왜 그들은 태도를 바꾸어 예수님을 죽이려고까지 했을까요? 오늘 본문의 예수님의 두 가지 메시지 때문입니다.
첫째는 그들의 죄를 지적한 말씀입니다. 지난 주에 읽은 본문에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을 가리켜 아브라함의 자손이 아니라 마귀의 자식이라고 비난하셨습니다. 이는 그들의 거짓말과 예수님을 해치려는 의도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을 불편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사마리아 사람, 귀신 들린 자라고 비난합니다. 이는 유대사회에서 가장 모욕적인 욕이었고 그들이 얼마나 격분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자존심이 상했습니다. 모멸감을 느꼈습니다. 그들은 말씀의 검에 찔렸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검과 같아서 혼과 영과 및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십니다! 당연히 아픕니다. 그들은 이제 선택해야 합니다. 회개할 것이냐, 분노할 것이냐? 사도행전을 보면 사도들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의 정반대의 반응이 나옵니다.
(행 7:54) 그들(헬라파 유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그(스데반)를 향하여 이를 갈거늘
(행 2:37) 그들(유대인)이 이 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
전자는 마음이 찔려 스데반을 돌로 쳐죽였고 후자는 마음이 찔려 사도들 앞에서 회개하였습니다. 전자는 마귀의 자식이요, 후자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8장의 유대인들은 마귀의 자식답게 그들은 회개가 아닌 분노를 택했습니다. 그래서 돌을 들었습니다. 가인도 돌을 들었고 아벨을 죽였습니다. 그들도 돌을 들었고 여인도 죽이려 했고 예수님도 죽이려 했습니다. 말씀의 검에 찔렸을 때 분노하는 마귀의 자식이 되지 마시고 회개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하나님이신 예수님
둘째 유대인들을 격분케 한 두 번째 메시지는 예수님이 당신의 신성을 주장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지키면 영원히 죽음을 보지 않으리라는 말씀에 당황했습니다. 그들은 ‘아브라함도 죽었는데 네가 무엇이라고 사람을 죽지 않게 만드느냐’고 도전하였습니다. 유대사회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 다음의 권위를 가진 선지자로 일종의 성역입니다. 예수님도 부자와 나사로 비유에서 나사로가 죽어서 간 낙원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설명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일 뿐 아니라 아브라함조차도 당신의 영광을 보기를 기대했고 보고 기뻐했다고 하셨습니다. 또한 당신에게 하나님이 영광을 주셨다고도 하셨습니다. 이는 후에 예수님의 부활과 승천을 통해 영광받으실 사건을 미리 가리킵니다.  이 말씀은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크신 분 곧 하나님과 같은 분이라는 선언이요, 이는 당신이 아브라함보다 먼저 계셨던 분이라는 선언에서 명백히 드러났습니다. 네, 예수님은 당신이 하나님이라고 선언하신 겁니다. 이는 첫 번째 메시지보다 훨씬 더 유대인들을 격분케 하였습니다. 신성모독은 오직 죽음 말고는 씻을 수가 없는 죄였습니다. 그들은 즉시 돌을 들어 예수님을 치려했던 것입니다.
5. 불편한 예수님
예수님의 신성은 유대인 뿐 아니라 오늘날 현대인도 무척 불편하게 만듭니다. 앞서 소개했듯이 많은 이들이 예수님의 위대한 삶을 인정하고 본받기까지도 원하지만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첫째 그들의 편협한 이성제일주의 사고방식을 벗어버리기를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성육신도, 기적도, 부활도, 승천도 모두 이성으로 받아들이기 어렵습니다. 물이 포도주가 되고 바람과 파도와 귀신을 다스리고 죽음에서 부활하는 것을 교육받은 지성인이 어떻게 받아들인단 말입니까? 이런 태도는 이성을 최고이자 유일한 판단도구로 여기고 이성을 가진 인간을 최후의 판단자 곧 신으로 여기는 태도입니다. 인간 스스로 신이 되어 최후의 심판자가 되겠다는 태도로  자신이 이해못하는 것은 일어날 수 없다는 식의 아집의 다름 아닙니다. 신비의 세계, 초월의 세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는 태도입니다. 19세기 말 전파를 발견하기 전까지 인류는 전파의 존재도 몰랐고 당연히 오늘날 일상이 된 라디오, TV, 셀폰, 무전기를 쓸 생각도 못 했습니다. 그럼 인류 역사 대부분 전파는 존재하지 않은 겁니까? 그 때도 눈으로 볼 수 없었기에 존재하는지도 몰랐지만 전파는 존재했던 것처럼 지금 누군가가 증명할 수 없다고 하여 초월적 세계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리는 것이 과연 합리적일까요?
둘째 예수님의 신성은 부담스러운 결단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은 우리를 죄인이라 선언하시고 회개를 요구하십니다. 돈과 쾌락과 자랑거리를 구하며 사는 우리에게 온 마음과 뜻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고 명하시고 자신을 사랑할 시간도 없는 우리에게 이웃을 사랑하고 명하십니다. 당신의 제자가 되어 모든 것을 버리고 당신을 따르라 명하십니다. 이런 부름에 응답하는 것은 부담스러운 일에 틀림없습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하나님의 엄중한 명령을 무시하는 죄인이 됩니다. 얼마나 부담스럽습니까?
셋째 예수님의 신성은 심판의 두려움을 주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는 순간 그 분이 선언하신 최후의 심판대 앞에 서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우리의 운명입니다. 이것은 스스로 신이 되어 욕망의 전차를 몰며 살아가는 우리에게 감당할 수 없는 공포입니다. 세상의 어떤 공포영화도 죽음과 심판의 공포를 묘사할 길이 없습니다. 이 공포를 외면하는 가장 쉬운 길은 예수님의 신성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래서 심판이 없다고 믿으면 죽음의 공포를 확실히 줄일 수 있습니다. 허무와 공허는 여전히 면할 길이 없지만 적어도 심판의 절망과 두려움은 확실히 줄일 수 있습니다.
물론 회개하면 되지 않는가 생각합니다만 회개도 쉬운 일이 아닙니다. 자신이 신이 되어 살아가던 죄인이 하나님 앞에 꿇어엎드려 모든 것을 내려놓고 완전히 굴복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 회개입니다. 교만한 죄인에겐 죽는 것보다 힘든 일이 회개입니다. 성령님의 역사가 없이 인간의 의지와 노력으로 할 수 없는 것이 회개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은 엄청난 은혜입니다. 성령님의 크나큰 은혜요, 로또 맞은 것보다 더 큰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신성이 주는 거북함과 부담과 두려움은 교회 밖 사람들만 느끼는 게 아닙니다. 교회 안의 우리도 느낍니다. 목사는 이런 메시지를 조금씩 잘라냅니다. 교인들은 이런 메시지를 조금씩 잘라서 듣고 흘려서 듣습니다. 들어도 진지하게 생각하기를 피합니다. 들어서 설마 그렇게까지 무섭지는 않겠지라고 최면을 겁니다.
6. 나를 누구라 하느냐
그러므로 예수님이 하나님이심을 믿는 것은 당시 유대인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기독교인에게도 필요합니다. ‘네? 우리는 예수님이 그리스도임을 믿는데요? 그러니까 기독교인 아닙니까?’ 그렇게 생각하기 쉽습니다. 요한복음 8장의 유대인들도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요 8:30)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 (요 8:31) 그러므로 예수께서 자기를 믿은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
8장 후반부의 모든 말씀은 당신을 믿은 유대인들에게 하신 말씀이었고 그 말씀을 들은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돌을 들어 치려했습니다. 예수님을 훌륭한 선지자로 믿고 위대한 스승으로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자신의 삶에 도움이 될 것이라고 믿는 믿음으로는 예수님을 참으로 따른다 할 수 없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을 그리스도라고 입으로 고백했다고 하더라도 참으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닐 수 있습니다. 왜입니까?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참으로 믿는다면 그 분의 모든 말씀에 대한 우리의 응답이 결코 지금과 같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을 믿는다면 예수님의 성육신과 부활과 승천을 포함한 성경에 기록된 모든 기적이 사실임을 받아들일 것입니다. 그렇다면 오늘 우리 삶에서도 하나님이 당신의 구원을 기적으로 행하실 수 있음을 받아들일 겁니다. 살아계신 하나님이 우리 삶에서 역사하심을 믿고 크신 사랑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그 분의 모든 명령과 부르심에 조금도 주저하지 않을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좇으라는 말씀에 아비와 배와 일꾼들을 버려두고 즉시 예수님을 따른 제자들처럼 응답할 것입니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해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돈과 하나님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여 우리 삶을 모두 주님께 기꺼이 드릴 것입니다. 우리 삶에 닥쳐온 고난과 시련으로 절망하고 원망치 않고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고 감사할 것입니다.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고 모든 민족에게 세례를 베풀고 당신의 말씀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명령에 기꺼이 순종치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과연 우리가 그 부르심에 전심으로 응답하고 있습니까?
안타깝지만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기독교인이 많습니다. 하나님의 자녀일 수 없습니다. 천국백성일 수 없습니다. 구원과 영생을 누릴 수 없습니다. 우리가 믿음이 부족하다면 귀신들린 아들을 예수님께 데려와 간구한 아버지처럼 기도할 수 있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 겸손히 은혜를 구하는 자들을 하나님은 긍휼히 여기십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믿으십니까? 예수님의 모든 말씀을 하나님의 부름으로 들으십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은혜와 능력이 여러분의 힘이십니까? 예수님은 가이사랴 빌립보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신 것처럼 오늘 우리에게도 물으십니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라고 고백하는 저와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