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03 복이 흐르는 시내 / 민 6:22-27

20220403 복이 흐르는 시내 / 민 6:22-27

민 6:22-27/복이 흐르는 시내

220403 사순절5주
1. 자리가 중요하다
오늘날 북반구의 유라시아 선진국은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 남반구 국가를 정치, 경제, 군사, 문화 모든 면에서 압도합니다. 왜 이렇게 된 걸까요? 과거 한 때는 인종의 우열 때문이라고 믿었습니다. 하지만 제레미 다이아몬드의 스테디셀러 <총, 균, 쇠>는 이렇게 답합니다. 자리를 잘 잡았기 때문이다! 메소포타미아를 비롯해 인류의 문명이 시작된 곳은 한결같이 기후와 식생이 야생식물의 작물화, 야생동물의 가축화를 하기에 최적의 지역이었습니다. 작물화와 가축화는 식량의 대량생산을 가능케 했고 이는 사람들을 모으고 문명을 일으켰습니다. 사람들이 모이니 균, 세균으로 인한 전염병이 발생해 면역력이 생겼고 기술발달로 다른 지역보다 철, 철기문명을 빨리 일으켜 총, 총기를 비롯한 각종 도구를 만드는 기술이 발달했습니다. 기온차가 심한 남북보다는 같은 기후대의 동서로의 기술문명전파가 쉬웠기에 유라시아 대륙은 빠른 시간에 발전하였습니다. 총, 균, 쇠의 환경결정론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자리를 잘 잡아야 된다’가 되겠습니다. 아무튼 유라시아 대륙은 조상들이 자리를 잘 잡은 덕분에 오늘날 후손들은 훨씬 발전된 정치, 경제, 사회적 여건에서 엄청난 혜택을 누리며 인생을 시작합니다.
자리가 얼마나 중요한지는 일상에서도 어렵잖게 경험합니다. 비지니스도 마찬가지 아닙니까? 왜 인적이 드문 산골이 아닌 유동인구가 강처럼 흐르는 맨하탄에서 비지니스를 합니까? 젊은이들은 왜 다방에 가지 않고 까페와 클럽에 갑니까? 또래들이 강 흐르듯 몰리는 곳으로 가야 친구도, 애인을 만날 확률도 그만큼 높아지기 때문 아닙니까? 낚시하는 이들은 왜 물고기가 몰려다니는 곳을 찾아다닙니까? 자리가 중요한 것은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행복하게 사는데도 자리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도 풍수지리설을 그토록 신봉했는지 모르겠습니다. 도대체 우리는 어디에 자리를 잡아야 행복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은 그 답을 우리에게 들려주십니다.
2. 생명력으로서의 복
오늘 본문은 출애굽 후 시내산 아래 광야에 머물며 척박한 광야길로 나서려는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복, 시대와 지역을 막론하고 복을 싫어하는 이들은 없습니다.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고 싶습니다. 새 해 복 많이 받으시라고 매년 기원합니다. 불행을 피하고 행복하기 위해 어떤 수고도 마다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모두 행복하기를 원하는데 정작 행복하다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왜 사람들이 행복하게 살기가 이토록 어려운 것일까요?
먼저 복이란 단어의 용법을 정리합니다. 축복은 ‘복을 빈다’는 의미입니다. 복을 비는 것은 인간이 하는 일입니다. 하나님을 복을 빌지 않으시고 복을 주십니다.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복을 주실 뿐 그 누구에게도 복을 빌 이유가 없으시기에 축복하시지 않습니다. ‘하나님 이들을 축복하옵소서’는 잘못된 표현입니다. ‘우리가 이들을 축복합니다. 하나님이 복을 주옵소서.’가 맞습니다. 제사장은 백성을 축복하고 하나님은 백성에게 복을 주십니다.
다음으로 구약의 복과 신약의 복을 차례로 살펴봅니다. 구약에서 복은 창세기 1장의 창조사건부터 쓰입니다. 즉 복은 창조의 목적이고 인간은 행복하도록 창조되었습니다. 창조의 목적인 그 복이 어떤 것인지 창 1:28이 알려줍니다.
(창 1:28)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하나님이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물고기와 하늘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스리라.” 하시니라.
복은 곧 ‘생육하여’ 즉 자녀를 많이 낳아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복은 곧 육체에 깃드는 ‘생명력’을 가리킵니다. 태어나고 건강하고 자녀를 낳고 가족이 늘어나는 것이 다 복입니다. 이 모든 일은 육체에 깃드는 생명력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습니다. 구약의 복은 곧 육체에 깃드는 생명력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약에 이르러서도 복은 역시 생명력인데 그 영역이 달라집니다. 육체의 생명력이 아닌 영의 생명력입니다. 산상설교의 팔복을 보십시오.
(마 5:3)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그들의 것임이요.
이 복은 이 땅을 차지하는 힘이 아닌 하나님 나라를 차지하는 힘입니다. 이 힘, 생명력으로 충만한 상태를 성령충만이라 묘사합니다. 육체의 생명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오듯 영의 생명력도 하나님으로부터 옵니다. 이 둘 중 어느 것이 더 참된 생명력입니까? 영의 생명력입니다. 왜입니까? 그 이유를 사도 바울은 고린도후서에서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후 4:16) 그러므로 우리가 낙심하지 아니하노니 우리의 겉사람은 낡아지나 우리의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지도다.
육체의 생명력은 쇠하지만 영의 생명력은 오히려 새로워집니다. 육체의 생명력은 오래 가지 않지만 영의 생명력은 영원합니다. 이 영의 생명력은 어디에서 옵니까? 바로 죽음을 이기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의 능력에서 옵니다.
(고후 4:14) 주 예수를 다시 살리신 이가 예수와 함께 우리도 다시 살리사 너희와 함께 그 앞에 서게 하실 줄을 아노라.
이런 참되고 영원한 생명력, 참된 복이 여러분에게 흘러 넘치기를 축복합니다.
3. 시냇가에 심기운 나무
이제 중요한 것은 이 복을 누리는 자리가 어디냐입니다. 시 1편은 행복한 사람의 자리를 보여줍니다.
(시 1:1) 복 있는(행복한) 사람은 악인의 꾀를 좇지 아니하며 죄인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 (시 1:3) 그는 시냇가에 심은 나무가 철을 따라 열매를 맺으며 그 잎사귀가 마르지 아니함 같으니 그가 하는 모든 일이 다 형통하리로다.
행복한 사람의 자리는 바로 시냇가입니다. 이 시냇가가 어디입니까? 그 곳은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에는 말씀의 강, 진리의 강, 성령의 강, 은혜의 강이 흐릅니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멈추지 않고 흘러나는 생수를 마시리라’고 약속하신 그리스도의 몸, 바로 교회입니다. 교회를 가로질러 흐르는 말씀의 강에서 진리의 생수를 퍼마시고 성령의 강에서 은혜의 생수를 퍼마시는 성도는 사시사철 푸르른 생명나무로 자랍니다. 이 강가에서 멀면 진리와 은혜의 생수를 빨아들이기가 어렵습니다. 강가에 있어도 뿌리가 얕으면 생수도 얕게 빨아들입니다. 뿌리가 깊으면 풍요롭게 빨아들입니다. 여러분은 어디에 얼마나 깊이 뿌리 내리고 계시는지요? 시냇가에 심지 않았다면 다른 어딘가에 뿌리내릴 수밖에 없습니다. 많은 이가 안타깝게도 물 한 방울 없는 광야에 뿌리내립니다. 돌과 먼지와 가시만 가득한 곳에 뿌리내립니다. 그러면서 왜 자신이 바짝 마른 나무처럼 은혜의 물기가 없는 마음과 얼굴로 살아가는지 궁금해 합니다. ‘하나님, 내 삶은 왜 이렇게 메마릅니까?’ 자리를 잘 못 잡아서 그렇습니다. 시냇가에 심지 않으면 행복한 삶은 불가능합니다. 여러분은 모두 생수의 강이 흐르는 교회에 뿌리내리고 생명력이 가득한, 행복한 인생을 사시기를 축복합니다.
4. 목사를 통해 부으시는 복
‘나는 교회 다닙니다. 이 교회에 가만히 있기만 하면 됩니까? 무엇을 해야 합니까?’ 교회 안에 흐르는 두 개의 물줄기를 소개합니다. 첫째는 주님이 축복의 통로로 세우신 지도자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여호와께서는 아론과 그 아들 즉 제사장의 축복을 통해 복을 주시겠다고 하십니다. 그 축복의 내용이 24-26절에 이렇게 나옵니다.
(민 6:23) 아론과 그 아들들에게 고하여 이르기를 “너희는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이렇게 축복하여 이르되 (민 6:24) ‘여호와는 네게 복을 주시고 너를 지키시기를 원하며 (민 6:25) 여호와는 그 얼굴로 네게 비취사 은혜 베푸시기를 원하며 (민 6:26) 여호와는 그 얼굴을 네게로 향하여 드사 평강 주시기를 원하노라’ 할찌니라 하라. (민 6:27) 그들은 이같이 내 이름으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축복할찌니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리라.”
제사장에게 백성을 축복하라고 명하시고 그 축복을 들으시고 백성에게 복을 주리라고 하셨습니다. 왜 제사장의 축복행위를 통해 복을 주십니까? 그것이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이기 때문입니다. 가정에서는 부모의 말을 잘 듣는 자녀들이 건강하고 행복하게 성장합니다. 학교에선 교사의 말을 잘 듣는 학생의 실력이 빨리 늡니다. 회사에선 팀장의 지휘를 잘 따르는 직원이 회사의 중요한 일꾼으로 자랍니다. 여행을 가면 가이드의 말을 잘 듣는 이들이 즐거운 여행을 합니다.
축복의 내용도 보십시오. 여호와를 세 번 부르며 그 얼굴을 백성에게 향하셔서 복과 안전과 은혜와 평강을 주시기를 빕니다. 얼굴을 향한다는 건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사랑하는 이에게는 눈을 뗄 수가 없습니다. 자녀와 손주를 바라보는 이들의 얼굴을 봅십시오. 반면 미워하는 이에게는 얼굴을 돌리기 싫습니다. 불편합니다.
주님의 이 명령을 이어받아 사도들은 성도들을 축복하였습니다.
(고후 13:13)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의 사랑과 성령의 교통하심이 너희 무리와 함께 있을찌어다.
사도들의 안수를 통해 세움받은 교회의 지도자, 우리 목사들도 이 전통을 이어받아 오늘에도 성도를 축복합니다. 그러므로 목사의 이 축복을 기쁨과 겸손으로 받는 이들에게 하나님이 복을 주십니다. 목사가 훌륭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그저 그를 축복의 도구와 복의 통로로 삼으셨기 때문입니다.
목사를 통해 말씀의 강이 흐릅니다. 목사의 설교와 양육과 성경공부가 아니고서 어디서 말씀의 강물을 마십니까? 목사의 입을 통해 축복의 강이 흐릅니다. 아론을 축복의 도구로 세우신 것처럼 목사를 세워 늘 교회와 성도를 축복케 하셨고 그 때 복을 주시마 약속하신 것을 듣지 않으셨습니까? 목사의 기도를 통해 은혜의 강이 흐릅니다. 야고보서는 병든 자가 있으면 목사를 청하여 주의 이름으로 기도를 받으라고 하십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목사를 통해 부으시는 하나님의 복을 받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물론 목사가 마음에 안 드는 분들도 계실 겁니다. 늘 죄송한 마음입니다. 목사가 부족해서 상처를 받고 실망하고 못 마땅해서 그를 통해 받는 복이 달갑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목사를 싫어하면 누가 손해입니까? 자신만 손해입니다. 병원에 가서 의사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사무장과 간호사만 만나고 오면 어떻게 합니까? 그들이 아무리 환자를 돕고 싶어도 의사가 하는 일을 대신할 수 없듯이 교회는 목사만을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복이 있습니다. 그 복을 다 거절하고 남은 복만 누리겠다는 것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저를 위해서가 아니라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저의 부족함을 너그러이 용서하시고 이해하시기를 구합니다. 여러분 자신을 위해서 저를 보지 마시고 저처럼 부족한 인간도 사용하셔서 복을 부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시고 넘치는 하늘의 복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5. 성도를 통해 부으시는 복
은혜의 강물이 흐르는 두 번째 물줄기는 성도들의 교제입니다. 하나님은 목사만을 축복의 도구로 쓰지 않으십니다. 교회 안에 모든 성도를 사용하십니다. 목사가 아닌데 어떻게 쓰십니까? 신약시대에는 목사만 아니라 모든 성도가 제사장으로 부르심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여러 차례 보았지만 다시 한 번 베드로전서를 봅니다.
(벧전 2:9) 그러나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그러므로 베드로사도는 제사장된 성도들이 서로 복을 빌라 즉 축복하라고 권한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갚거나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축복해 주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여러분이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은 하느님께서 약속하신 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공동번역)
서로 축복함은 부르심의 목적 즉 사명입니다. 형제, 자매를 축복하면 본인이 먼저 복을 받습니다. 그를 통해 복이 나가기 때문입니다. 복을 가장 많이, 빨리, 늘 받는 지름길은 형제를 축복하는 것입니다. 하면할수록 자신이 더 많은 복을 누립니다. 반면 악을 악으로 갚고 욕을 욕으로 갚으면 누가 그 저주를 고스란히 다 받습니까? 상대가 아니라 자신입니다. 상대를 찌르는 칼은 내 심장을 먼저 뚫고 상대를 향합니다. 종종 상대는 찌르지도 못 하지만 자신의 심장은 반드시 뚫습니다. 욕하면 자신의 마음이 가장 상처받습니다. 악하게 대하면 자신이 가장 크게 병듭니다. 미워하면 자신이 가장 미움을 받습니다.
여러분은 저주의 통로가 아니라 복의 통로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만나는 모든 성도를 축복하십시오. 축복하는 데 돈도 한 푼 안 듭니다. 말할 수 없이 큰 복을 모두에게 나누어 줍니다. 수고하는 이에게 칭찬하고 감사하고, 지친 이에게 격려하고 위로하고, 아픈 이를 사랑하고 다독여 주십시오. 수고하는 이를 비난하고 지친 이를 외면하고 아픈 이에게 더 아픈 말을 하는 것은 자신과 공동체를 모두 저주하는 어리석음입니다. 그 믿음의 축복을 통해 하나님은 사람을 치유하고 살리고 일으키셔서 용사로 세우십니다. 공동체에 큰 복을 주십니다. 모든 성도들에게 놀라운 복을 주십니다.
여러분의 축복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저주의 도구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여 생수의 강이 흐르는 그리스도의 몸된 교회에 깊이 뿌리내리고 모든 이를 축복함으로 놀라운 복을 누리는 성도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