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417 빈무덤의 증인 / 요 20:1-18

20220417 빈무덤의 증인 / 요 20:1-18

요 20:1-18/빈무덤의 증인

220417 부활주일
1. 부활의 기쁨
할렐루야, 오늘은 우리 주님이 무덤에서 일어나 부활하신 날, 부활주일입니다.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셔서 자녀들에게도 부활의 선물을 주시는 우리 주님의 놀라운 은총이 부활의 주님을 경배하는 여러분의 심령과 가정과 일터 위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말씀드린 것처럼 부활절은 우리 기독교인의 가장 큰 절기입니다. 성탄절을 더 성대하게 지킵니다만 사실 예수님의 탄생일은 정확히 모릅니다. 그러나 그 분의 부활의 날짜는 모를 수가 없습니다. 유대교의 유월절 직후이기 때문입니다. 부활 은 우리 기독교인의 가장 큰 소망입니다. 저는 부활을 믿습니다. 여러분도 믿으시는 줄 압니다. 사도 바울은 부활이 없으면 우리가 믿는 것이 다 헛것이라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이 진리이신 것을 당신은 부활로 증명하셨습니다. 부활을 빼면 복음도 아니고 기독교도 아닙니다. 이 부활을 믿고 소망하고 미리 경험하는 이들은 놀라운 기쁨 가운데 삽니다.
물론 여러분이 부활을 생각해도 맹숭맹숭하기만 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간에 한 교우께서 상담하시기를, 예수님의 십자가를 머리로는 믿는데 가슴은 뜨거워지지 않는데 자신이 주님을 진짜 만난 것일까요 라고 질문하셨습니다. 어떻게 하면 무기력하고 무덤덤한 삶의 권태를 벗어버리고 부활의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할 수 있을까요? 오늘 본문의 주인공 마리아를 만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십시다.
2. 첫 증인 마리아
오늘 본문의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한 인물은 막달라 마리아입니다. 그녀는 모든 제자들 중 최초로 빈 무덤을 발견했습니다. 제자들에게 달려가 그 사실을 알렸습니다. 또 천사들의 말을 듣고 부활하신 주님을 직접 만났습니다. 18절을 보면 주님은 그녀에게 주님의 부활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리는 임무를 또 맡기셨습니다. 얼마나 큰 영광이며 얼마나 그녀는 기뻤을까요? 주님의 많고 많은 제자 중 왜 그녀였을까요?
먼저 확실한 것은 이 상황이 결코 꾸며낸 것일리 없다는 점입니다. 고대세계에서 여자는 사람의 수를 계산하는데 들지도 못 하는 남자의 소유물이었습니다. 법정에서 여자의 증언을 아예 채택되지도 않았습니다. 게다가 그녀는 누가복음에 의하면 일곱 귀신 들렸던 여자 즉 미친 여자였습니다. 누군가가 예수님의 부활 이야기를 꾸며내려고 했다면 절대로 이런 처지의 여자를 첫 증인으로 내세우지 않았을 것입니다. 당시 사람이라면 누구나 듣자마자 그런 여자의 증언을 믿을 수 없다고 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녀가 실제로 첫 증인이었다는 것 외에는 이 기록을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주님은 그녀를 왜 첫 증인으로 택하셨을까요? 분명 빈 무덤에 대한 그녀의 증언을 들은 두 제자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까지 왔었는데 주님은 왜 그들이 가고 난 후 마리아에게 나타나셔서 부활의 증언을 하도록 명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그녀가 보여준 뜨거운 사랑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모두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있던 안식 후 첫 날 새벽 그녀는 누구보다 먼저 무덤에 왔습니다. 공관복음은 향품을 시체에 바르기 위해서라고 하였습니다. 빈 무덤을 확인한 베드로와 요한이 집으로 돌아간 후에도 그녀는 남아 무덤을 떠나지 않고 서서 울고 있었습니다. 주님의 시체를 잃어버린 것 때문입니다. 그녀의 태도가 무엇을 보여줍니까? 주님을 향한 지극한 사랑입니다. 주님은 바리새인 시몬의 집에서 죄 많은 여인이 비싼 향료로 당신의 발을 닦았을 때 말씀하시기를, 많이 용서받은 자가 더 많이 사랑한다고 하셨습니다. 그녀는 일곱 귀신에 사로잡혔다가 주님의 은혜로 자유를 얻었기에 주님을 더 많이 더 깊이 사랑하였습니다. 잠언은 가르치십니다.
(잠 8:17)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
돈과 쾌락과 허영을 사랑하면 할수록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하기가 더 어렵습니다. 헛된 즐거움을 구하면 할수록 하나님을 만나기가 더 어렵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막달라 마리아처럼 주님의 곁을 찾아가고 떠나지 않고 그 분을 사랑하는 이들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부활의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삽니다. 물론 이 사랑의 마음조차도 주님의 은혜로 허락받습니다. 겸손히 주님을 바라보고 십자가를 의지하는 자에게 주님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을 또 허락해 주십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은 무엇을 향한 사랑으로 가득 합니까? 헛된 영광을 사랑하지 말고 주 그리스도 예수님을 깊이 사랑하여 부활의 기쁨과 능력으로 충만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동산지기
다음으로 본문은 주님의 부활로 시작된 일을 가르쳐줍니다. 그 일은 마리아의 착각이 준 교훈입니다. 15절입니다.
(요 20:15)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하시니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주여, 당신이 (시체를) 옮겼거든 어디 두었는지 내게 이르소서. 그리하면 내가 가져가리이다.”
그녀는 예수님을 동산지기로 착각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녀가 오해한 예수님의 모습 동산지기(Gardener)는 태초의 인류가 부여받은 사명이었습니다. 창세기 2장을 보면 하나님은 첫 사람 아담을 창조하시고 그를 동산지기로 명하셨습니다.
(창 2:15) 여호와 하나님이 그 사람을 이끌어 에덴 동산에 두어 그것을 경작하며 지키게 하시고
그러나 그는 불순종의 죄로 동산을 관리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 세상은 죄의 가시와 악의 엉겅퀴로 가득한 불모지가 되고야 말았습니다.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새 일을 맡으셨습니다. 그것은 이 불모지에 가득한 죄의 가시와 악의 엉겅퀴를 모두 뽑아내고 사랑의 꽃과 의의 나무를 가득 심어 아름답고 풍요로운 동산을 만드는 겁니다. 이사야는 메시야가 오셔서 만드실 그 나라를 이렇게 노래합니다.
(사 65:17) 보라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나니 이전 것은 기억되거나 마음에 생각나지 아니할 것이라 … (사 65:25) 이리와 어린 양이 함께 먹을 것이며 사자가 소처럼 짚을 먹을 것이며 뱀은 흙을 양식으로 삼을 것이니 나의 성산에서는 해함도 없겠고 상함도 없으리라 여호와께서 말씀하시니라.
예수님은 이 사명을 위해 모든 일을 다 이루셨습니다. 이제 성령님과 교회를 통해 남은 사명을 지금도 이루고 계십니다. 교회는 복음의 삽과 진리의 곡괭이를 들고 이 땅을 경작하여 아름다운 동산을 일구어 갑니다. 마침내 주님은 이 땅을 완전히 새롭게 재창조하여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완성된 동산, 하나님의 나라를 만드실 겁니다. 그 때 주님은 다시 오시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주님처럼 우리도 동산지기입니다. 우리는 주님의 명령으로 생명의 복음으로 이 척박한 땅을 경작하고 영혼을 추수합니다. 여러분의 가정과 일터를 복되고 아름답운 동산으로 가꾸는 동산지기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4. 새로운 관계
다음으로 본문은 주님이 부활로 우리가 누리게 된 은혜를 가르쳐 줍니다. 17절에서 말씀하십니다.
(요 20:1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내가 아직 아버지께로 올라가지 아니하였노라.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내가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께로 올라간다 하라.” 하시니
예수님은 제자들을 가리켜 ‘내 형제들’이라고 부르셨습니다. 요한복음에서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쓰지 않으신 표현입니다. 지금까지는 제자, 종 혹은 친구라고 하셨습니다. 그것만으로도 엄청난 관계임에 틀림없습니다만 형제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여러분의 제자, 종, 친구가 아무리 가깝다한들 형제, 자매에 비하겠습니까? 왜 이제와서야 이렇게 부르시는 걸까요?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이 주님과 우리의 관계를 본질적으로 바꾸어 놓았기 때문입니다. 이전까지는 주님을 따름으로 제자가 되고 섬김으로 종이 되었는데 더 가까워지다보니 친구까지 되었습니다. 이 세 가지는 친밀도의 차이에 따라 달라지지만 하나의 범위 안에 있는 관계입니다. 모두 피를 나누지 않은 이들이 맺는 관계입니다. 그러나 형제는 혈통으로 맺은 관계입니다. 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피흘림으로 우리의 죄를 완전히 씻으시고 드디어 주님과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는 자녀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이 일을 당신이 부활하심으로 보증하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우리와 하나님의 관계도 완전히 새롭게 변했습니다. 다시 17절을 보십시오. ‘내 아버지 곧 너희 아버지, 내 하나님 곧 너희 하나님’ 주님은 굳이 반복해서 당신의 아버지가 우리의 아버지이심을 강조하셨습니다. 이제 우리는 진정 하나님을 아버지라고 부를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입니다. 이전에는 죄와 악으로 하나님과 분리되어 감히 그 분을 하나님으로, 감히 아버지로 부를 수 없었습니다. 주님을 모르는 이들에게 하나님 아버지라고 부르도록 시켜 보십시오. 어색해서도 못 합니다. 말로 하더라도 과연 정말 그렇게 부를 자격이 있는지 확신하지 못 합니다. 당연합니다. 그들의 하나님도, 아버지도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부를 자격이 없었고 아버지라 부를 자격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피흘리심과 부활하심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습니다. 예수님과 우리 관계는 형제로, 하나님과 우리 관계는 아버지와 아들딸로 바뀌었습니다.
이 관계변화로 인해 우리의 운명도 바뀌었습니다. 17절을 보면 주님은 거듭 아버지께로 올라간다고 하셨습니다. 승천의 예고입니다. 이 승천은 단순한 위치이동이 아닙니다. 예수님과 계획과 우리가 누릴 운명을 설명합니다. 요한복음 14장으로 돌아가면 주님은 이렇게 약속하셨습니다.
(요 14:1)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요 14:2)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요 14:30)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주님은 승천하셔서 아버지의 집 하나님 나라에 우리를 위한 거처를 예비하시고 다시 오셔서 우리를 그 나라로 초청하십니다. 이것은 당신처럼 우리도 부활하여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 삶을 누리리란 약속입니다. 이 약속을 어떻게 확신할 수 있습니까? 주님이 친히 부활의 첫 열매가 됨으로 보증하셨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빈 무덤이 그 증거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수많은 증인들이 그 증거입니다. 그 증인들이 남긴 이 가득한 기록이 그 증거입니다. 부활의 증언을 위해 순교도 마다하지 않은 그들의 삶의 증거입니다.
부활의 주님은 아버지께로 올라가셨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마리아도 완전히 새로운 삶의 차원으로 들어갔습니다. 우리도 부활의 주님을 만나면 삶의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갑니다. 그 세계는 죄와 죽음으로부터 자유를 얻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새하늘과 새땅에서 부활의 새 몸을 입는 소망을 품고 살아가는 세계입니다. 그 삶을 시작한 마리아는 주님의 명을 따라 제자들에게 가서 부활의 주님을 전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으로 인해 새 생명을 얻은 우리도 부활의 기쁨과 감격으로 달려나가 이 기쁜 소식을 전하는 자녀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