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08 사랑스러운 자녀 / 눅 2:41-52

20220508 사랑스러운 자녀 / 눅 2:41-52

눅 2:41-52/사랑스러운 자녀

220508 어버이주일
1. 어버이주일
시트콤PD와 영화감독으로 이름을 알린 윤학렬 감독은 영화를 통해 인권문제를 적극적으로 알리고 젊은이들을 복음을 깨우는 운동에 헌신한 신실한 기독교인이기도 합니다. 그는 간증을 통해 어린 시절 아버지와의 겪은 힘겨운 사연을 들려주었습니다. 어쩐 일인지 아버지는 늘 장기출장 중이었고 가끔 집에 오시면 자신을 그렇게 야단을 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저 놈의 자식은 왜 저 모양이야?’ 항상 아버지 앞에서 주눅이 들었고 실수를 했습니다. 자존감이 낮았고 말도 심하게 더듬고 몽유병도 앓았습니다. 중학생이 되어서야 아버지가 왜 자신에게 그토록 가혹했는지를 알았습니다. 아버지는 유부남인 채로 처녀였던 어머니를 속이고 새살림을 차렸고 그 사이에선 난 아이가 자신의 치부라 생각했기에 그토록 가혹했던 것입니다. 출생의 비밀을 안 후 어머니와 자신을 학대한 아버지를 향해 저주하기 시작했습니다. 크면 반드시 복수하리라. 그러면서도 여전히 아버지의 따뜻한 사랑이 그리워서 아버지가 자신을 안아주지 않나 기다렸고 어쩌다 살이 맞닿으면 그 포근함을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그리워하는 양가감정을 가진 채 자랐습니다.
오늘은 어버이주일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되새기고 감사하는 주일입니다. 성경은 부모를 공경하고 순종하라고 명령하십니다. 부모공경에는 땅에서 잘 되고 장수하리라는 복도 약속하십니다. 인자한 부모님께 사랑을 많이 받으며 자란 이에게 이 명령에 순종하는 것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만 앞서 소개한 윤학렬 감독처럼 부모에게 상처받고 실망한 자녀들은 어떻게 이 명령에 순종할 수 있을까요? 부모공경과 순종의 가르침은 사랑받고 자란 자녀에게만 해당되는 가르침은 아닐까요?
2. 예수님과 부모
오늘 본문은 열두살 된 예수님의 가족이 당시 유대인의 관습을 따라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간 사건을 다룹니다. 유월절 축제를 마치고 나사렛으로 돌아오다가 하룻길이 지난 후에야 예수님이 무리 중에 없는 것을 부모 요셉과 마리아는 깨달았습니다. 나사렛에서 예루살렘은 약 120km로 3일길 정도입니다. 어떻게 하루나 아이가 없는 것을 몰랐을까 싶겠지만  보통 유월절과 같은 축제에는 친족과 이웃과 함께 큰 무리를 지어 올라가고 내려왔습니다. 아이가 다른 아이들과 어울려 함께 내려왔으려니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급하게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보니 성전의 율법선생들 사이에 앉아 율법토론을 하고 있었습니다. 놀라서 마리아가 어린 예수님을 꾸짖습니다.
(눅 2:48) 그의 부모가 보고 놀라며 그의 어머니는 이르되 “아이야, 어찌하여 우리에게 이렇게 하였느냐? 보라, 네 아버지와 내가 근심하여 너를 찾았노라.”
‘야, 이 놈아. 말도 없이 혼자 여기 남으면 어떡하냐? 엄마, 아빠가 얼마나 걱정한 줄 알아?’ 이런 뜻입니다. 그러나 어린 예수님은 그 부모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말씀을 하십니다.
(눅 2:49)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나를 찾으셨나이까? 내가 내 아버지 집에 있어야 될 줄을 알지 못하셨나이까?” 하시니
예수님은 당신이 육신의 아버지가 아닌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부여받았으며 이제 그 부름에 응답할 준비를 하고 계신다는 의미로 답하셨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에게 예수님의 말씀은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눅 2:50) 그 부모가 그가 하신 말씀을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님의 말씀을 그 부모가 이해하지 못 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의 아버지 요셉은 목수였습니다. 당연히 글을 읽지 못 했을 것이고 율법교육도 받지 못 했을 것입니다. 율법에 정통한 당시 예루살렘의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이라고 부르던 그 죄인들 중 하나입니다. 율법을 제대로 알지 못 하니 철저히 지키지 못 할테고 당연히 죄인이란 뜻입니다. 당시 여인은 보통 14살이 되기 전에 결혼했습니다. 물론 여성이 교육을 받고 글을 읽던 시절이 아닙니다. 14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기 시작한 마리아 역시 율법을 알고 이해할 리 만무했습니다. 그러니 요셉과 마리아는 아들 예수가 성전에서 율법사들과 나누던 토론내용을 이해하지 못 했을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들은 아들이 말도없이 예루살렘에 남은 것보다 율법사들과 알아들을 수 없는 토론을 하고 있던 것에 더 놀랐음이 틀림없습니다. 거기에 더해 예수님이 말씀하신 하늘의 아버지 하나님으로부터 사명을 받았다는 말씀은 더더욱 이해가 불가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해도 못 한 채 자신을 탓하는 요셉과 마리아가 얼마나 답답했을까요?
우리도 비슷하게 겪는 일이 아닙니까? 식민지와 6.25전쟁, 전후의 절대가난을 겪으며 생존을 위해 발버둥쳤던 부모님 세대와 달리 경제발전의 열매를 따먹기 시작하며 자란 자녀들은 대부분 부모가 받지못한 교육을 받고 부모가 한 번도 경험하지 못 한 서구문화, 첨단기술의 혜택을 받으며 삽니다. 그런 자녀의 삶의 방식과 경험을 부모는 대부분 이해하지 못 합니다. 그런 부모가 자녀는 답답합니다. ‘엄마는 알지도 못 하면서 왜 저리 고집이 세?’ ‘아빠는 왜 이렇게 고지식하고 꽉 막혔어?’ 그런 부모를 무시하고 외면하는 일도 빈번히 벌어지지 않습니까? 그런 부모에게 어떻게 대하는 것이 옳을까요?
3. 압살롬과 다윗
성경에는 부모에 대한 불만을 잘못 터뜨린 대표적인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다윗의 아들 압살롬입니다. 그는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의 칼을 들고 그 왕좌를 빼앗으려 하였습니다. 왜 압살롬은 그런 악한 짓을 저질렀을까요? 물론 그 자신의 악한 됨됨이가 이유겠지만 그에게도 할 말이 있었을 것입니다. 바로 아버지 다윗에게 받은 상처입니다.
아버지 다윗은 우리가 다 알다시피 부하 우리야를 죽이고 그 아내 밧세바를 빼앗아 아내로 삼았습니다. 그리고 그녀의 아들 어린 솔로몬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하였습니다. 다윗은 최소 8명 이상의 아내에게서 20명 이상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많은 아들을 낳아 서로 권력을 위해 질시하며 다투게 하여놓고 정작 왕좌는 부정하게 낳은 솔로몬에게 물려주려 하니 재능이 뛰어나고 야심이 컸던 압살롬이 얼마나 분통이 터졌을까요? 게다가 배다른 큰 형 암논이 자신의 누이 다말을 욕보였는데 다윗은 화만 냈을 뿐 그 암논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 다윗의 무책임한 처사는 압살롬을 크게 분노케 했고 아버지의 왕좌를 빼앗을 명분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아버지가 하는 일을 봐. 제대로 된 왕이라고 할 수 있어? 내가 왕이 되어 모든 것을 바로 잡겠어.’ 결국 반란을 일으키고 아버지의 후궁을 취하는 반인륜적인 짓을 합니다. 그 압살롬은 어떻게 되었습니까? 전투 중 비참하게 목숨을 잃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다윗이 비록 부모로서 그릇된 모범을 보여주었지만 그것이 압살롬이 다윗을 부모로서 공경치 않는 이유가 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4. 안에서 순종하라
성경은 부모를 순종하기를 주님 안에서 하라고 합니다.
(엡 6:1) 자녀들아, 주 안에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것이 옳으니라.
주 안에서 하라는 것이 무슨 뜻일까요? 헬라어 전치사 엔에는 ‘무엇무엇의 힘으로’란 의미가 있습니다. 곧 ‘주님의 힘으로 너희 부모에게 순종하라’고 해석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옳습니다. 우리 힘으로 부모님을 공경하지 못 할 때가 있습니다. 부모님에게 상처받고 실망하고 심지어 학대당한 이들에게 부모님을 공경한다는 것은 불가능해 보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힘으로는 가능합니다. 주님은 그런 힘을 주십니다. 주님은 우리에게 이웃을 자신의 몸처럼 사랑하고 원수마저 사랑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명령은 어떻게 가능합니까? 이웃사랑도 어려운데 원수사랑이라니요? 이 역시 우리 힘이 아닌 주님의 힘으로만 가능합니다. 주님의 힘으로만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합니다. 주님의 힘으로는 그 일이 가능합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의 힘으로는 상처를 주는 부모, 실망스러운 부모도 사랑할 수 있습니다.
5. 예수님의 공경
요셉과 마리아의 몰이해가 예수님에게 답답하고 실망스러웠을지 모르겠습니다. 아무튼 그들의 꾸중은 예수님을 통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지 못 하는 몰이해에 틀림없습니다. 인간 부모는 무지합니다. 그릇된 판단도 많이 하고 실수도 많이 하여 자녀에게 상처와 아픔을 주기도 합니다. 요셉과 마리아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에게 어떻게 대하십니까?
(눅 2:51) 예수께서 함께 내려가사 나사렛에 이르러 순종하여 받드시더라…
‘어머니, 모르시겠으면 그냥 저를 내버려두고 두 분이서 먼저 내려가세요. 저는 이 율법사들과 할 일이 남았습니다.’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요. 하지만 어린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더 머물지 않고 그 부모를 따라 나사렛으로 내려갔습니다.  그리고 그 부모를 순종하여 받들었습니다. 바로 그런 예수님을 가리켜 52절은 무어라 말씀하십니까?
(눅 2:52) 예수는 지혜와 키가 자라가며 하나님과 사람에게 더욱 사랑스러워 가시더라.
예수님은 하나님에게 사랑스러운 자녀였습니다. 마리아와 요셉에게도 사랑스러운 자녀였습니다. 이웃에게도 사랑스러운 아이였습니다. 무엇이 예수님을 사랑스러운 자녀로 만들었습니까? 부모님을 순종하여 받으시는 모습입니다. 만약  부모의 무지와 실수와 미숙함을 이유로 불순종하고 부모로 존중하며 받들지 않는다면 지혜와 키가 자라도 하나님에게도, 사람에게도 사랑스러운 모습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육신의 부모 공경은 하늘의 아버지 공경과 다르지 않았습니다.
(히 5:8)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하나님께) 순종함을 배워서
즉 하늘의 하나님을 공경함과 육신의 부모를 공경함은 서로 다른 일이 아닙니다. 육신의 부모를 공경치 않는데 하늘의 하나님을 공경하는 일을 없습니다.
6. 주의 힘으로
앞서 소개했던 윤학렬 감독은 PD로 성공한 후 무속인들을 소개하는 프로그램을 열심히 만들면서 자신도 반무당이나 다름 없이 살다 자신을 위해 간절히 기도하며 전도한 세 명 지인을 통해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후 자신이 저주하기까지 미워했던 아버지를 용서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복음을 깨닫고 보니 아버지도 가해자인 동시에 힘겨운 전후세대의 고난에 치인 피해자임을 깨닫고 불쌍히 여기는 마음이 생겼습니다. 연로하고 병든 아버지를 자신의 집에 모시고 전도하기 위해 가정예배를 시작했습니다. 병석에 누운 아버지에게 성경을 읽어드리며 간절히 기도한 끝에 아버지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임종하셨습니다.
윤감독이 불완전한 육신의 아버지를 사랑할 수 있었던 비밀은 온전하신 하늘의 아버지를 사랑한 것입니다. 부모공경도 우리의 힘이 아닌 오직 하늘 아버지의 사랑으로만 가능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무슨 힘으로 부모님을 공경하십니까? 주 안에서 주님의 힘으로 부모를 공경하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