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9 눈을 열어주소서 / 요 9:1-12

20220529 눈을 열어주소서 / 요 9:1-12

요 9:1-12/눈을 열어주소서

210529 주일설교
1. 누구의 잘못인가
한국 통영에서 목회하는 김진성 목사 부부는 자폐증을 앓는 딸 한나를 양육하는 과정으로 영상을 제작하는 유투버로서 많은 자폐증 가족에게 위로와 소망을 전하는 목사겸 유투버입니다. 그가 통영교회에 부임한 첫 날 설교 중에 딸 이야기를 하자 집으로 전화가 왔습니다. 전화기 너머로 교인이 말하기를, ‘목사님이 딸을 기도원에 데려가서 기도받아서 고치라’고 했습니다. 김목사는 염려해 주어서 고맙고 당연히 딸을 위해 기도하고 있지만 자폐는 그렇게 고치는 것이 아니라고 정중하게 답을 했는데 그 교인이 기분이 상했는지 막말을 쏟아놓았습니다. ‘목사가 회개를 안 해서 딸이 자폐에 걸렸다, 목사가 얼마나 영성이 없으면 딸이 저 지경이 되었겠느냐…’ 마구 퍼붓고 전화를 끊어버리는데 얼마나 화가 나는지 전화기를 붙들고 부들부들 떨었다고 합니다.
어느 목사가 어린 아들의 백혈병으로 병원에 오래 드나들다보니 소아병동에 있는 다른 아이들 보호자들과 친해졌습니다. 한 젊은 엄마가 그 목사를 조용히 부르더니 눈물을 흘리며 묻더랍니다. ‘목사님, 제 아이가 아픈 것이 저의 죄 때문입니까? 시어머니도 네가 무슨 죄를 지어서 아이가 그 죄값을 치르냐고 하고 어떤 교인은 엄마가 기도원 가서 부르짖고 회개해서 죄문제 다 해결하면 하나님이 고쳐주시는데 왜 믿음없이 병원만 다니냐고 합니다. 제가 아무리 회개하고 눈물을 흘려도 하나님이 안 고쳐주시는데 도대체 얼마나 더 회개해야 되나요?’ 그 목사가 너무 마음이 아파서 ‘아이의 병은 엄마의 죄 때문도 아니고 엄마의 회개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위로해 주었답니다.
이런 무지한 이들의 말에 상처받는 이가 김목사나 이 엄마만이 아닙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죄와 고난을 일대일로 연결하여 이해하며 너무나 단순하고 무책임하게 타인의 고난에 섣부른 훈수를 두는지 모릅니다. 그런 말과 시선에 그렇잖아도 고난에 상한 이들의 마음이 더 갈기갈기 찢어지고 부서집니다. 성도는 고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자신과 타인의 고난을 대하는 바른 자세는 무엇일까요? 고난의 때에 우리는 어디서 소망을 발견할까요? 예수님의 진리의 말씀이 답을 주십니다.
2. 빛이신 예수님
오랜 만에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9장에서 벌어진 사건의 정확한 시점은 모릅니다. 성경은 기계적으로 시간대별로 사건을 배열하지 않고 큰 시간대 안에서 주제별로 배열했기 때문입니다. 아무튼 예수님이 길을 가실 때 시각장애인을 만나자 제자들이 그의 불행이 자신의 죄때문인지 부모의 죄때문인지를 묻습니다. 제자들이 이런 의문을 가진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등 율법을 해석하는 종교지도자들은 고난의 이유를 설명하는데 골몰했기에 그들의 가르침을 받는 일반 대중도 고난을 만나면 자동적으로 이 질문부터 던지는 것이 익숙했던 것입니다.
3절을 보면 예수님의 대답은 ‘둘 다 아니다’였습니다. 그럼 왜 이 사람은 죄도 없이 이런 고난을 당했단 말입니까? 거기에는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다고 답하십니다.
(요 9:3)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그럼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생명을 세상에 퍼뜨리는 것입니다. 즉 고통받는 자를 긍휼히 여기고 고치고 마침내 구원하는 그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은 직접 행함으로 보여주셨습니다. 당시 민간요법의 하나로 침을 진흙에 이겨 그의 눈에 바르셨습니다. 그러려면 바리새인들이 죄인이라고 부르던 그를 만지셔야 했습니다. 경건한 랍비는 부정한 죄인과 접촉하면 안 됩니다. 예수님은 그를 긍휼히 여기실 뿐 아니라 그와 접촉하시면서 그가 무죄하다고 선언하신 겁니다. 그리고 그를 고치셨습니다. 37-38절을 보면 또한 그를 믿음으로 인도하여 구원하셨습니다.
(요 9:37)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가 그를 보았거니와 지금 너와 말하는 자가 그이니라.” (요 9:38) 이르되 ‘주여 내가 믿나이다.” 하고 절하는지라.
이 모든 일을 행하시며 예수님은 당신이 세상의 빛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자신이 세상의 빛이시며 보지 못 하는 이들의 눈을 열어 빛을 보게 하는 이십니다.
3. 어둠에 갇힌 이
이 사건에서 고난을 대하는 완전히 상반된 두 가지 태도가 등장합니다. 첫째는 바리새인들과 대중과 제자들의 자세로 고난의 이유를 밝히려는 태도입니다.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시도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문제는 그 의도입니다. 바리새인들이나 그들의 영향을 받은 대중이나 한결같이 고난의 이유를 알고자 하는 진짜 의도는 고난의 책임을 물을 누군가를 찾겠다는 것입니다. 인간의 본성은 항상 누군가를 탓합니다. 비난할 대상을 찾습니다. 자신의 문제든, 공동체의 문제든 책임을 전가할 누군가가 필요합니다. 늘 그 희생양은 그 사회의 가장 약한 자들입니다. 사람들은 약자들의 고통을 덜어주는데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들의 고난이 자신의 탓이니 책임을 지는 것이 마땅하다고 짐을 모두 그들에게 지우려 할 뿐입니다. 심지어 강자들의 잘못까지 약자들에게 지우고 눈을 감습니다.
9장 중반부로 넘어가면 이 시각장애인이 눈을 떴다는 사실을 들은 바리새인들 중 누구도 기뻐하는 이가 없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이도 없습니다.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러나 그들은 오히려 안식일에 눈 뜬 사실을 문제 삼고 그 과정에 이상한 일이 없었는지를 문제삼으며 그 눈 뜬 이와 부모를 협박하고 취조합니다. 그래서 예수님까지 죄인으로 몰아붙여 새로운 희생양을 만들려 합니다.
요한복음은 이들이야말로 육의 눈은 떴으나 영의 눈을 감은 영적 시각장애인이라고 선언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도, 놀라운 섭리도, 선하신 뜻도, 사랑과 긍휼도, 그 나라와 의도 모른 채 오로지 자신의 안위와 탐욕만을 추구하며 사는 영적 시각장애인입니다. 그들은 늘 남들은 모르는 문제의 원인을 자신만은 안다고 주장하며 누군가를 탓하고 비난하고 다투고 분열시킵니다.
4. 빛을 보는 이
고난을 대하는 둘째 태도는 예수님의 그것으로, 고난 당하는 이를 긍휼히 여기고 살리려는 자세입니다. 예수님은 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 즉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려는 섭리에 쓰임받는 고난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영광과 뜻과 섭리를 드러내는 진리의 말씀이기도 한 동시에 그 시각장애인을 위로하고 치유하시는 은혜의 말씀이었습니다.
그 시각장애인의 입장이 한 번 되어보십시다. 평생 시각장애란 엄청난 고난을 겪는 것도 서럽고 괴로운데 만나는 사람마다 자기들끼리 쑥떡쑥떡거립니다. 눈이 안 보이면 귀가 발달합니다. 자기들끼리 속삭여도 다 들려요. 무지하고 무례한 이는 아예 대놓고 묻습니다. 당신 도대체 무슨 죄를 지었길래 이런 꼴을 당해? 부모가 뭘 잘못한 거야? 왜 회개 안 해? 하나님이 고쳐주실텐데? 억장이 무너지고 심장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대중의 관심과 지지를 한 몸에 받는 예수님이란 젊은 랍비가 그의 죄도, 부모의 죄도 아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감당하는 고난이라고 선언해 주었으니 얼마나 위로가 되고 얼마나 아픈 마음이 치유되고 얼마나 가슴이 뿌듯해졌겠습니까?
곽경희 작가는 남편의 자살을 겪고 쓴 책에서 자신의 썩어문드러졌다고 할 만한 마음이 어떻게 치유되었는지 고백합니다. 네 아이를 키우며 알콜중독과 도박중독, 우울증으로 폐인처럼 살아가는 남편과의 결혼생활을 지속하기가 어려워 이혼했다가 다시 결합했지만 결국 중독과 우울증을 극복하지 못 한 남편이 차 안에서 자살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듣습니다. 그 자신도 감당하기 힘든 충격으로 버티기 힘든데 주변의 냉소적 시선이 정말 죽기보다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그렇지않아도 내가 좀 더 잘 했으면 남편이 괜찮았으려나 하는 자책으로 고개를 들고 살 수가 없는데 시댁과 주변인이 도대체 아내가 어떻게 했길래 남편이 자살하나, 좀 잘 하지 아픈 사람을 자살하게 만드나, 신앙인이 왜 기도와 믿음으로 남편을 변화시키지 못 했나 하고 한 마디씩 툭툭 던지는 말이 비수처럼 가슴을 헤집어 놓았습니다. 사춘기의 아들마저 ‘엄마 때문에 아빠가 죽는 거 아니야?’하고 대들 땐 정말 그녀도 자살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견딜 수 없어서 정신과의사를 만났는데 그의 한 마디가 그녀를 살려주었습니다. “남편이 한 방 먹이고 갔네요.” “네? 무슨 말씀이세요?” “남편이 당신에게 잘 못 한 거예요. 당신이 남편에게 잘 못 한 게 아닙니다.” 그녀 때문에 남편이 자살한 것이 아니라는 그의 말에 그녀의 죄책감이 한 번에 씻겨나가는 듯 해서 얼마나 울었는지 모릅니다.
우리 주 예수님은 죄의 원인을 따지기 전에 고난당하는 이를 긍휼히 여기십니다. 죄의 책임을 묻기 전에 고통을 겪는 이를 치유하십니다. 물에 빠진 이유를 묻기 전에 그를 먼저 건져내어 살리십니다. 이 주님의 마음이 고난을 대하는 성도의 태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 예수님의 긍휼을 아는 성도는 고난을 대할 때 긍휼과 사랑의 마음을 먼저 가지고 어떻게든 그를 살리고자 합니다. 이런 이들이야말로 빛되신 주님을 보는 눈 뜬 이들입니다.
5. 눈 뜬 성도들
주님은 이 땅에 오셔서 정죄와 비난으로 어두워진 우리의 닫힌 눈을 열어 사랑과 긍휼의 빛을 보게 하시는 세상의 빛이십니다. 어떻게 열어주십니까? 7절을 보십시오.
(요 9:7) 이르시되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 하시니(실로암은 번역하면 ‘보냄을 받았다’는 뜻이라) 이에 가서 씻고 밝은 눈으로 왔더라.
실로암 연못 물에 무슨 마술적 힘이 있습니까? 그럴리가 없는데 왜 이런 명령을 하시나요? 그의 순종하는 믿음을 보시려는 겁니다. 장애인들이 모여 구걸하던 성전 문 근처라면 도시 가장 남쪽에 있는 실로암 연못까지 내려가는 길은 한참 걸리는 먼 거리인데다 시각장애인으로서는 비장애인보다 훨씬 더 큰 수고가 요구됩니다. 만약 그가 예수님의 말을 진지하게 믿지 않았다면 그런 수고를 기꺼이 할 리가 없습니다. 그의 순종과 수고를 보면 그가 예수님의 말씀을 믿는지 아닌지 알 수 있습니다. 요한 사도는 실로암의 뜻이 ‘보냄을 받았다’고 설명합니다. 중의적 표현입니다. 이 시각장애인이 그리로 보냄을 받은 것이기도 하지만 예수님이 이 땅에 보냄을 받은 분임을 강조하기도 합니다. 이 땅에 교만과 무지로 눈 먼 우리들의 눈을 열도록 보냄을 받으신 예수님을 믿고 순종하는 이는 그 눈을 열어 사랑과 긍휼의 빛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빛을 본 이들은 더 이상 이전과 같이 어둠 속에서 더듬대며 여기저기 사람들의 마음을 비난과 정죄의 칼을 휘둘러 찌르지 않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긍휼로 고통당하는 자들을 바라보며 보듬고 위로하고 섬기고 치유하여 살립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둠 속을 휘젖고 다니는 자입니까, 빛 속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보는 성도입니까? 눈을 열어주시는 예수님으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의 빛으로 충만한 세상을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