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626 숨은 뱀 찾기 / 요 9:24-41

20220626 숨은 뱀 찾기 / 요 9:24-41

요 9:24-41/숨은 뱀 찾기

220626 주일설교
1. 바야돌리드 논쟁
누군가를 피부색이 다르다고 다른 언어를 쓴다는 이유만으로 법정으로 끌고가 같은 인간이 맞는지 확인해 보겠다고 하는 일은 당연히 오늘날 상상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실제 역사에서 그리 드물지 않게 벌어진 일입니다. 16세기 스페인령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에서 원주민 인디오를 학살하고 노예로 삼아 학대하는 등 잔혹한 통치가 계속 되자 도미니크 수도회 등을 중심으로 하나님의 피조물인 인간을 이토록 잔혹하게 대해서는 안 된다는 비판이 일었습니다. 반면 인디오를 노예로 삼아 막대한 이익을 거두던 스페인 귀족들은 인디오가 이성이 없는 당나귀 같은 동물로서 자신들과 같은 수준의 신의 피조물일 리 없다며 노예정책을 옹호했습니다. 이에 스페인왕 카를로스 1세는 스페인 바야돌리드에서 회의를 개최하여 이 문제를 논의했습니다. 실제 식민지에서 끌고온 4명의 인디오를 가운데 세워놓고 벌어진 이 논쟁의 결과 인디오를 동등한 인간으로 인정하고 그들을 노예로 삼고 학대하지 못 하도록 결정하였습니다. 다행스러운 결과이긴 하지만 막대한 이익을 잃게 된 귀족들이 크게 반발하자 왕과 교황청은 대신 아프리카의 흑인을 노예로 삼는 것을 허용하였습니다. 결국 아메리카 인디오 대신 아프리카 흑인들이 대규모로 끌려와 노예노동에 혹사당하다가 죽어갔습니다. 비극이 새로운 비극으로 대체된 것입니다.
2. 야만과 문명
오늘날엔 상상도 할 수 없는 어리석고 잔혹한 행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는 왜 이런 일이 오늘날엔 가능하지 않다고 생각합니까? 우리는 오늘날 인권과 자유와 평등이 보장된 문명화된 세계를 건설했고 야만과 무지에 갇혀있던 16세기와 다르다고 여기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런데 16세기 당시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했을까요? 당시 사람들도 자신들이 문명화된 세계에서 살며 이전의 야만의 시기보다 크게 진보하였다고 여겼습니다. 16세기는 유럽의 르네상스가 가장 화려하게 꽃피운 시대가 아닙니까? 그런 시대의 판단과 행위를 오늘날 야만으로 여긴다면 오늘 우리의 일부 판단, 선택도 언젠가 야만으로 평가받을 때가 오지 않을까요? 그 증거로 우리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는 야만스러운 침략전쟁과 내전, 환경파괴, 독재와 압제, 착취와 불평등, 폭력과 살인을 목격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 역시 야만과 무지의 눈꺼풀을 완전히 벗어버리지 못 했습니다.
개인의 삶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타임머신이 있다면 과거로 돌아가 바로 잡고 싶은 흑역사가 우리 모두에게 있지 않습니까? 자다가 이불킥을 하며 후회하는 일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끊임없이 실수하고 오해하고 고집부리고 사랑하는 이에게조차 상처주고 다투고 고통을 겪습니다. 무지와 편견의 눈꺼풀이 벗겨지지 않았다는 증거입니다. 과거야 어찌할 수 없더라도 앞으로 그런 실수를 되풀이 하고 싶지 않은 것이 아마 저뿐 아니라 여러분 모두의 바람이라 생각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3. 숨은 뱀 찾기
집안에 뱀이 들어왔습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뱀이 있어, 조심해. 잡아야 해. 잡고서야 평안히 잡니다. 귀찮아, 힘들어, 몰라, 그럴 리 없어.. 그러면 숨어 있던 뱀에 물립니다.
첫걸음은 우리 마음에 야만의 뱀이 있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웃을 짐승처럼 여기고 착취하고 심지어 학살하는 야만이 여전히 우리 안에 남아있습니다. 인정해야 그 야만을 찾아냅니다. 찾아내어야 버릴 수 있습니다. 인정하지 않으면 숨어있다가 갑작스럽게 튀어나오는 야만에 물립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안식일에 시각장애인을 고치신 후 벌어진 사건의 결말입니다. 바리새인들은 고침받은 이와 그 부모에게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하기를 요구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 하자 그를 다시 불러 압박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예수님을 정죄하기를 거부하자 결국 그를 출교시킵니다. 이 소식을 들으신 예수님이 그를 찾아와 당신을 메시야로 알려주시고 믿음을 갖도록 도우셨습니다. 그 후에 믿은 시각장애인과 믿지 못 하는 바리새인들을 이렇게 비유하셨습니다.
(요 9: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당신의 오심으로 구원과 심판의 갈림길이 드러났습니다. 못 보는 사람이 보게 된 것은 시각장애인이 육의 눈을 뜬 것뿐 아니라 영의 눈을 뜨고 예수님이 메시야이심을 믿은 사건을 가리킵니다. 보는 사람이 못 보게 된 것은 육의 눈으로 잘 보는 바리새인들이 영의 눈도 밝아서 스스로 가장 진리를 잘 본다고 자부하지만 사실은 영적 시각장애인이어서 진리되신 주님을 믿지 못 함을 가리킵니다.
바리새인들이 영의 눈이 먼 이유가 드러납니다. 그것은 스스로 눈이 밝아 진리를 안다는 자부심 때문이었습니다. 자신들만이 하나님의 선민이요, 모세의 제자요, 율법의 전문가라고 여겼습니다. 죄 가운데 태어난 시각장애인 따위의 경험과 증언을 믿지 못 했습니다. 이 자부심 때문에 자신들 안에 숨은 무지와 편견과 미련과 악함의 뱀무리를 보지 못 했습니다. 그래서 그 뱀들이 튀어나와 자신들을 죄로 물고 시각장애인과 그 부모를 위협과 폭력의 악으로 무는 것을 몰랐습니다. 예수님은 40절 이하에서 바로 이 점을 지적하셨습니다.
(요 9:40)  예수와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이 이 말씀을 듣고 나서 말하였다. “우리도 눈이 먼 사람이란 말이오?” (요 9: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우리의 많은 문제가 자신만이 제대로 본다는 이 자부심에서 비롯됩니다. 총회 서기로 일하다보니 여러 교회에서 벌어지는 분쟁을 중재할 책임을 종종 맡습니다. 누가 봐도 객관적인 잘못이 있는 쪽을 만나 설득합니다.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면 끝날 일입니다. 잘못했다는 사람을 교회에서 어떻게 하겠습니까? 놀라운 것은 그들 중 누구도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자신들의 언행이 상대와 교회에 어떤 상처를 주었는지 절대 인정하지 않습니다.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오직 자신이 옳다고만 반복해 주장합니다. 끝까지 싸워서 자신의 정당성을 인정받겠다고 주장합니다. 결과는 그 한 사람의 징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그 싸움 내내 교회는 만신창이가 되고 둘, 셋으로 갈라지고 많은 믿음이 연약한 이들이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납니다. 10년 전도한 영혼을 1년 만에 다 잃습니다.
이런 일을 볼 때마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않으면 한 일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나니, 라는 주님의 말씀이 늘 생각납니다. 참 성도, 참 일꾼은 교회를 위해 죽어야 합니다. 잘못이 없어도 교회를 살리려고 죽는 것이 마땅한데 잘못이 있는대도 절대 자신은 죽을 수 없노라며 교회를 죽이는 이를 보면 기독교인이 맞는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알곡과 가라지가 섞여 있다는 주님의 말씀도 생각이 납니다.
우리 모두 안에는 야만의 뱀이 숨어 있습니다. 이 사실을 인정하고 경계하고 잡아내지 않으면 뱀이 갑자기 튀어나와 우리 자신뿐 아니라 가족을 물고 이웃을 물어 독을 세상에 퍼뜨립니다.
4. 엎드려 절하기
우리 안에 야만의 뱀이 있음을 인정하고 나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무지와 오만의 뱀을 찾아내어 죽이고 생명나무를 우리 안에 심으시는 분 앞으로 나가야 합니다. 그 분은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고침받은 이가 출교당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는 그를 찾아오셔서 생명의 길을 보여주셨습니다.
(요 9:35)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출교시켰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물으셨다. “네가 인자를 믿느냐?”
그 길은 바로 믿음의 길입니다. 여행 가면 가이드를 믿어야 안전하고 학교 가면 선생님을 믿어야 성장하고 병원 가면 의사를 믿어야 고침을 받습니다. 이처럼 선지자들이 예언한 오실 메시야 인자를 신뢰하고 따라야 생명을 얻습니다. 고침받은 이는 자신이 본다고 자만하지 않았습니다. 애초 육의 눈이 어두웠으니 자신의 영의 눈이 어둡다는 사실도 이해하기 어렵지 않았습니다.
(요 9:36) 그가 대답하였다. “선생님, 그분이 어느 분입니까? 내가 그분을 믿겠습니다.” (요 9:37)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이미 그를 보았다. 너와 말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그이다.” (요 9:38) 그는 “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 절하였다.
예수님을 만나서 그는 육의 눈뿐 아니라 영의 눈도 열렸습니다. 진리를 보았고 메시야를 만났고 그의 안의 야만으로 이웃을 위협하고 해치고 죽이는 이가 아니라 주님의 영으로 살고 이웃도 살리는 복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구원을 주시려고 주님은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주님은 우리를 어제보다 오늘이, 오늘보다 내일이 더 야만을 버리고 진리에 다가가는 성도로 살도록 부르셨습니다. 마침내 모든 무지와 미련, 죄와 악을 벗고 참 진리를 아는 완전한 구원에 이르도록 부르셨습니다. 주님이 우리를 진리로 인도하십니다.
(요 8:31) …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으로 내 제자가 되고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진리에 이르는 이 믿음의 길에는 반드시 겸손이 필요합니다. 이 고침받은 이는 자신의 모든 판단을 멈추고 주님께 물었습니다. ‘그 분이 누구십니까? 내가 믿겠습니다.’ ‘그 분 한 번 봅시다. 믿을 만 한지 제가 판단해 볼게요.’ 자신의 눈을 열어주신 주님의 말씀을 듣고 그 말씀에 완전히 헌신했습니다. 이 헌신을 위해 출교의 희생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믿을 때 가장 힘든 부분이 바로 이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판단과 고집과 욕심을 다 내려놓고 주님을 따라야 합니다. 이것을 내려놓지 못 하는 이는 주님을 따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이끌려 하는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이 제 판단에 괜찮으면 따르지요. 제 생각에는 아닌데요, 주님, 뭘 잘 모르시는 것 아닌가요?”
그럼 우리의 판단과 고집을 내려놓지 못 하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 고침받은 이처럼 자신이 엄청난 은혜를 받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평생 멀었던 눈을 예수님이 열어주었습니다. 그런 분의 말씀을 완전히 신뢰하지 못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는 십자가에서 흘리신 예수님의 피의 공로로 영의 눈을 열어 구원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는 이는 주님의 말씀 앞에 굴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좀처럼 굴복하지 못 하는 것은 미련하여 그 은혜를 깨닫지 못 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여러분은 십자가의 희생으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시고 구원으로 초청하신 이 놀라운 은혜를 깨닫고 계시는지요? 그렇다면 주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 절하고 그 말씀 앞에 전심으로 순종함으로 진리로 더 가까이 나아가시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