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0:11-18/죽으시는 우리 목자
220717 주일설교
1. 인간과 동물의 애착관계
여러분이 플로리다로 휴가를 떠났다고 가정해 봅시다. 애완견과 함께 호숫가를 지나는데 갑자기 튀어나온 악어가 개를 물고 물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플로리다에는 약 130만 마리의 악어가 살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안타까워 발을 동동 구르겠지만 안전한 물 밖에 머무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위험을 무릎쓰고 개를 구하기 위해 물 속으로 뛰어들어가시겠습니까? 아마 대부분은 전자가 아닐까요? 고민이 된다면 이 영상을 한번 보십시오.
<영상>
다행히 작은 악어여서 강아지는 구하였지만 월뱅크스씨의 손이 악어에게 씹히고 말았습니다. 만약 큰 악어였다면, 만약 다른 악어가 물 속에 있었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할 수도 있었을 겁니다. 아니, 애완견이 뭐라고 그는 이런 위험을 무릎쓰는 것일까요? 많은 미국인에게 개는 가축이나 애완견 이상의 의미를 가집니다. 거의 가족에 가깝습니다. 개를 위해 시간과 돈, 애정을 쏟는데 주저함이 없습니다. 최근 구찌에서 애완견용 만 불짜리 침대, 천 불짜리 레인코트 등 명품애완견상품이 출시되었는데 이게 잘 팔린다는 겁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은 벤지라는 애완견을 얼마나 아꼈던지 2009년 16살로 벤지가 죽자 체세포를 복제해 쌍둥이 벤지를 만들어 키웠습니다. 이회장이야 돈걱정할 필요는 없었겠지만 그 복제에 돈이 얼마나 들었겠습니까?
아무튼 인간과 동물 사이의 특별한 애착관계는 사실 그리 낯선 것이 아닙니다. 목축업을 하던 예수님 당시 목자들 중 양들과 이런 특별한 애착관계를 맺은 이들이 있었습니다. 그런 목자가 자신이 돌보던 양을 어떻게 사랑했는지는 나단 선지자가 다윗을 찾아와 들려준 비유의 한 대목에도 이렇게 소개됩니다.
(삼하 12:3)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없고 자기가 사서 기르는 작은 암양 새끼 한 마리뿐이라. 그 암양 새끼는 그와 그의 자식과 함께 자라며 그가 먹는 것을 먹으며 그의 잔으로 마시며 그의 품에 누우므로 그에게는 딸처럼 되었거늘
이런 목자는 양을 자녀처럼 사랑하고 심지어 그 양을 지키고 구하기 위해 위험을 기꺼이 무릎쓰는 일이 종종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당신과 제자의 관계를 바로 이런 목자와 양에게 빗대어 설명하십니다.
2. 양을 사랑하는 목자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목자와 양의 비유 중 후반부입니다. 지난 주에 살펴본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목자의 음성이 강도의 음성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셨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는 목자의 하는 일이 삯꾼의 그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설명하십니다. 삯꾼은 돈을 받고 고용되어 양을 치는 이를 말합니다. 목자는 양의 소유주일 뿐 아니라 양과 깊은 애착관계가 생겨 자녀처럼 사랑하게 된 이들입니다. 목자는 삯꾼과 어떻게 다릅니까?
첫째 선한 목자는 삯꾼과 달리 양을 깊이 사랑합니다. 14-15절을 보십시오.
(요 10:14) “나는 선한 목자라. 나는 내 양을 알고 양도 나를 아는 것이 (요 10:15)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 같으니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안다로 번역된 헬라어 기네스코는 히브리어 야다를 헬라어로 번역할 때 쓰입니다. 히브리어 야다는 성적으로 친밀한 부부가 서로를 아는 상태를 가리킵니다. 헬라어 기네스코도 그저 상대에 대한 지식이 있다는 의미를 넘어서 마치 수십 년 지기 배꼽친구가 서로를 알듯 깊고 친밀하게 아는 상태를 말합니다. 선한 목자되신 주님은 우리를 아시되 사람들처럼 겉모습만 알거나 대강대강 알거나 하지 않고 우리의 아픔과 상처와 외로움과 실망감까지 속속들이 다 아십니다. 마치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님을 알듯이, 아들 예수님이 하나님 아버지를 알듯이 깊이 아십니다. 그 깊은 앎은 당연히 사랑으로 발전합니다.
서로를 경계하던 낯선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상대를 점점 알아가면 갈수록 그에 대한 호감, 연민, 바람이 생기고 그로 인해 위로와 격려를 받고 그 때문에 의미와 기쁨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경험이 사랑이란 감정으로 승화됩니다. 예수님은 이처럼 우리가 얼마나 아름답게 창조되었는지, 얼마나 안타까지 타락했는지, 얼마나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고 있는지, 얼마나 자주 실패하고 넘어지고 외롭고 지치고 아픈지를 속속들이 아십니다. 사랑의 주님은 그렇게 아시는 우리를 도저히 사랑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주님으로부터 이런 사랑을 받고 있습니다. 혹 여러분 중 아무도 나를 사랑하지 않고, 아무도 나를 신경쓰지 않는다고 자학한 적이 있는 분들은 이 사실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이 우리를 누구보다 깊이 아시고 사랑하시고 신경쓰시고 우리를 위해 탄식까지 간절히 기도하는 목자입니다.
누군가 널 위하여 누군가 기도하네. 네가 홀로 외로워서 마음이 무너질 때 누군가 널 위해 기도하네.
이 누군가가 바로 주 예수님입니다. 성도의 외로움과 괴로움은 이 주님을 만날 때 해결됩니다. 이 주님을 만나지 못 해 눈에 보이는 사람으로부터, 돈으로부터, 지위로부터, 명예로부터 목마름을 해결하려니 외로움과 괴로움이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주님을 더욱 알아야 합니다. 목자의 음성을 듣고 그 인도를 따라갈 때 양은 푸른 초장 쉴만한 물가로 인도받습니다. 여러분은 지금 이 초장과 물가에서 쉼을 누리고 계신지요? 주님의 음성을 들으십시오. 주님의 인도에 순종하십시오. 주님만 바라보고 따라가십시오. 주님을 깊이 알고 그 안에 풍성한 영생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
3. 양을 위해 죽는 목자
둘째 선한 목자는 삯꾼과 달리 양을 위해 죽기까지 희생합니다. 12절을 보십시오.
(요 10:12) “삯꾼은 목자가 아니요, 양도 제 양이 아니라.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을 버리고 달아나나니 이리가 양을 물어 가고 또 헤치느니라(scatters the flock).”
삯꾼은 들짐승이 덤비면 양을 버리고 도망칩니다. 돈 몇 푼 때문에 목숨을 걸 이유가 없습니다. 삯꾼은 우리에게 행복과 성공을 보장하겠노라고 달콤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세상의 주인들입니다. 돈과 명예와 지위와 인기 등 온갖 것들이 자신을 섬기라고 요구하지만 정작 이리가 우리를 삼키려 덤벼들 때면 우리를 내팽개치고 달아납니다. 진정 우리를 염려하고 지켜주고 끝까지 함께 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의지하던 세상 주인들이 우리를 버리고 도망치면 이리는 마음껏 양떼를 유린합니다. 양을 물어갑니다. 또 양떼를 헤칩니다. 헤친다는 말은 죽인다는 뜻이 아니라 흩어버린다는 뜻입니다. 이리는 무엇입니까? 성도의 생명을 삼키는 마귀입니다. 마귀는 세상주인으로부터 버림받은 이들의 영혼을 삼킵니다. 또한 교회 공동체를 흩어버립니다. 마귀의 계략은 일관성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마귀는 공동체를 흩고 나누고 무너뜨리고 갈라지게 만듭니다. 삶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낙심하고 절망하고 낭비하고 포기하게 만듭니다. 가정도 흔들고 다투고 갈라지게 하고 분열시킵니다. 국가도 분열하고 갈라지고 싸우고 전쟁하게 만듭니다.
모든 방향이 하나님의 역사와 정반대입니다. 하나님은 살리고 세우고 연합하고 일치시키고 쌓고 일으키고 하나되게 만드십니다. 이를 위해 목자이신 주님은 양들을 결코 버리지 않으십니다. 11절 이하입니다.
(요 10:11) “나는 선한 목자라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거니와 … (요 10:15) … 나는 양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노라.
주님은 끝까지 양떼를 지키십니다. 당신의 목숨을 버려서까지 성도와 교회를 지키십니다. 주님은 십자가 희생은 우리의 모든 죄를 씻어 죄와 악으로 우리를 삼키려는 마귀를 물리치셨습니다. 주님의 십자가 희생으로 영원히 죽을 우리가 살았습니다. 세상에서 찾아볼 수 없는 공동체 교회가 탄생했습니다. 우리는 더이상 죄와 악의 골짜기를 방황치 않고 거룩한 그리스도의 몸에 속해 의와 초장, 진리의 물가로 인도받습니다. 이 모든 은혜가 양을 위해 기꺼이 죽는 목자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옵니다. 이 은혜를 바로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이 은혜를 매일매일 누리며 감사하며 전하시기를 축복합니다.
4. 다른 양도 인도하는 목자
셋째 선한 목자는 우리 밖에서 방황하는 다른 양들도 우리로 인도하십니다. 16절입니다.
(요 10:16) 또 이 우리에 들지 아니한 다른 양들이 내게 있어 내가 인도하여야 할 터이니 그들도 내 음성을 듣고 한 무리가 되어 한 목자에게 있으리라.
이 우리는 이스라엘 민족입니다. 우리 밖의 다른 양들은 이방인입니다. 이방인은 우리 밖 죄의 골짜기에서 악의 이리떼에게 물어뜯기며 이리저리 끌려다니다 멸망할 운명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의 은혜를 선택받은 이스라엘 뿐 아니라 멸망한 운명의 이방인들도 베풀어 주십니다. 그래서 이방인이었던 우리도 하나님 나라에 초청하셔서 아브라함의 후손 이스라엘과 더불어 함께 목자되신 주님의 은혜를 누립니다.
주님은 왜 이렇게 우리를 사랑하십니까? 왜 이렇게 우리에게 잘 해 주십니까? 도대체 우리는 어떻게 이런 은혜를 누릴 수 있었던가요? 바로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와 자발적인 예수님의 순종 때문입니다. 17-18절입니다.
(요 10:17)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 (요 10:18) 이를 내게서 빼앗는 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버리노라 나는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으니 이 계명(사명)은 내 아버지에게서 받았노라.” 하시니라.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키로 하셨습니다. 그 하나님의 명으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은 역시 헤아릴 수 없는 사랑으로 기쁘게 십자가를 지셨습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의 순종을 기쁘게 받으시고 죽음에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습니다.
이 하나님과 예수님의 사랑과 동역과 열매는 오늘 성도의 삶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넘치는 사랑으로 우리를 부르셔서 구원사역에 동참케 하십니다. 기쁨과 감사로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는 성도는 고난도 이기고 절망도 이기고 죽음도 이기는 부활의 열매를 맛봅니다. 성도의 헌신을 기쁘게 받으시는 주님은 영원한 생명과 영광을 은혜로 주십니다.
이 모든 은혜가 양들을 위해 기꺼이 죽으시고 부활하신 선한 목자를 통해 우리에게 부어집니다. 얼마나 큰 은혜입니까? 얼마나 놀라운 사랑입니까? 얼마나 헤아리기 힘든 복입니까? 선한 목자 예수님을 따라 생명의 땅으로 인도받는 양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