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8 전하는 교회 / 행 11:19-24

20220828 전하는 교회 / 행 11:19-24

행 11:19-24/전하는 교회

220828 주일설교
1. 박해받는 교회
오늘 본문을 보고 의아하신 분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어, 지난 주와 같은 본문이 아닌가? 잘 못 나온 것 아닌가?’ 물론 제 말씀을 듣고 방금 ‘지난 주에도 이 본문 했어?’라고 하는 분도 분명 계셨을 것입니다. 어느 쪽이든 괜찮습니다. 오늘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길 축복합니다. 지난 주 사경회에서 강사님이 이 본문에서 강조하신 바는 ‘흩어진 자들이 처음에는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였지만 후에 이방인에게도 전하기 시작했고 이는 교회가 기존의 틀을 깨고 새로운 시대의 패러다임을 받아들였음을 보여주었다’는 점이었습니다. 저는 또 다른 중요한 메시지 한 가지를 강조합니다. 흩어진 자들이 유대인에게든 이방인에게든 ‘아무튼 말씀을 전했다’는 점입니다.
(행 11:19) 그 때에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이것이 이상한 일입니까? 네, 평범한 일은 아닙니다. 그들이 누구이며 또 어떤 처지입니까? 스데반의 죽음을 계기로 일어난 박해로 흩어진 사람들입니다. 그 박해가 어떤 방식이었는지 사도행전 8장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행 8:1) 사울이 그(스데반)의 죽임 당함을 마땅히 여기더라.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핍박이 나서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행 8:3) 사울이 교회를 잔멸할쌔 각집에 들어가 남녀를 끌어다가 옥에 넘기니라.
무서운 박해입니다. 옥에 갇히는 것은 오늘날도 두려운 일이 아닐 수 없지만 옛날에는 일단 들어가면 살아나온다는 보장이 없던 시절입니다. 말이 감옥이지 빛도 없고 화장실도 없이 쥐떼와 벌레가 우글거리는 토굴 같은 곳에 무한정 가두어 두는 것이었습니다. 가족이 음식을 가져다 두지 않으면 무작정 굶는 것입니다. 감옥의 비위생적이고 비인간적인 환경으로 인해 많은 이들이 재판을 제대로 받아보지도 못 한 채 병들거나 굶어서 죽었습니다. 그들이 흩어진다고 박해로부터 안전한 것이 여전히 아닙니다. 유대인들은 흩어진 자들조차 추적하여 잡아 가두려 하였습니다. 거기에 앞장 선 사람 중 하나가 사울이었습니다.
(행 9:1) 사울이 주의 제자들을 대하여 여전히 위협과 살기가 등등하여 대제사장에게 가서 (행 9:2) 다메섹 여러 회당에 갈 공문을 청하니 이는 만일 그 도를 좇는 사람을 만나면 무론남녀하고 결박하여 예루살렘으로 잡아 오려 함이라.
그들은 환란으로 흩어진 자들입니다. 요즘으로 치면 종교박해를 피해 망명한 난민들입니다. 갑자기 일어난 박해이니 준비나 잘 하고 피했을까요? 집과 재산과 가족과 삶의 터전을 모두 버려두고 먼 땅으로 피신한 난민신세이니 얼마나 처량하고 답답하고 막막하고 고생스러웠을까요? 우리가 그런 처지이고 여전히 우리를 잡으러 다니는 이들이 있다면 어떻게 해야하겠습니까? 우리 신분을 숨기고 숨어지내며 어떻게든 살 길을 찾으려고 애쓰지 않겠습니까? 우리 신분을 만천하에 공개하는 말씀을 전하는 행위 따위는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위험천만한 일 아닙니까? 그런데 그들은 왜 흩어져 도망쳐서까지도 두려워하고 한탄하고 원망하지 않고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까?
2. 전하는 교회
그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 삶의 목적이 바뀐 거듭난 성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하는 천국백성’이었기 때문입니다. 당연히 그들도 주님을 만나기 전엔 여느 사람들처럼 제 한 몸, 자기 가족이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사실상 삶의 목적이 없는 방황이었습니다. 잘 먹고 잘 사는 것은 목적이 아닙니다. 그것은 본능이요, 욕망입니다. 하이에나도 잘 먹고 까마귀도 배부르게 사는 것을 바랍니다. 하이에나가 배룰 채우려고 시체를 물어뜯고 그 남은 고기로 배를 채우려고 그 위를 빙빙 도는 까마기를 보고 그 누구도 목적있는 삶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본능을 좇는 삶이라고 합니다. 오늘 여러분은 왜 일어나고 왜 일터로 향하고 왜 무언가를 하셨습니까? 더 잘 먹고 더 잘 살기를 바래서였다면 하이에나와 까마귀의 그것과 우리의 삶이 무엇이 다를 바 있을까요? 그러나 주님을 만난 초대교회 성도들은 물과 성령의 역사로 거듭 났습니다. 그들의 삶의 목적은 하나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여서도 주님을 전했지만 흩어져서도 주님을 전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입니다. 베드로 사도는 거듭난 성도들의 삶의 목적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벧전 2:9)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데서 불러 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사랑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 성도의 목적입니다. 이런 성도의 연합을 가리켜 성경은 교회라고 부릅니다. 성령이 세우신 이런 교회로 인하여 초대교회는 급속도로 복음을 로마제국 전역으로 전파하였습니다. 교회가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처음 태어난 기원후 30년 경부터 약 반 세기 정도가 지난 1세기 말 교회는 로마제국 곳곳에 교회를 퍼뜨렸습니다. 지도를 보십시오. 유대인들의 박해도, 로마제국의 박해도 기독교인들의 전도를 막을 수 없었고 복음이 퍼지고 교회가 서는 것을 막을 수 없었습니다. 교회는 태생부터 흩어져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였습니다.
3.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
그런데 AD 4세기 경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로마제국의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313년 경 기독교를 제국의 합법적 종교 중 하나로 인정하였습니다. 이어서 데오도시우스 황제는 380년 경 기독교를 아예 제국의 유일한 종교 즉 국교로 선포하였습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박해받는 신앙이 로마제국을 점령하고 세계적 종교로 성장할 발판을 마련한 위대한 승리라고 평가하였습니다.
반면 일부 역사가들은 이 사건이야말로 기독교 신앙이 맞이한 가장 큰 위기라고 보았습니다. 교회가 더 이상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기독교인이 생기고 교회가 서는 이상한 일이 시작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 칙령으로 이교도들의 공직진출이 금지되자 너도나도 기독교로 개종하기 시작했습니다. 귀족들은 막대한 재산에 면세혜택을 누리기 위해 사제가 되었습니다. 제국전역에 정부의 지원으로 이방신전과 관공서가 교회건물로 바뀌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을 모르는 기독교인, 복음을 이해 못 하는 사제들이 쏟아져 나왔습니다.
이 때 참 성도들은 놀라고 당황하며 황제의 명령으로 세례받는 기독교인, 황제의 지원으로 세워지는 교회를 거부하고 광야로 들어가 성경을 읽으며 참 복음을 전하고 실천하며 살려는 노력을 시작했습니다. 수도원 운동이 4세기 경에 불붙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일부 역사가들은 이 때부터 참 교회는 지하로 들어가 종교개혁 때까지 복음을 수호했다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의 출현으로 중세교회는 말로 다하기 힘들 정도로 타락하고 정치화하였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교회개혁이 시도되었습니다. 근대를 연 루터와 칼빈과 같은 종교개혁가들은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걸었습니다. 참 교회의 모델은 초대교회 곧 오늘 본문이 설명하는 ‘모이든 흩어지든 복음을 전하는 교회’이기 때문입니다.
4. 복음이 없는 교회
오늘날 한인이민교회는 이 교훈을 가슴 깊이 세겨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은 많이 바뀌었지만 한 때 ‘이민오면 모두 교회에 간다’, ‘중국인들이 모이면 중국집을 차리고 한국인들은 모이면 교회를 세운다’는 말이 통용되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힘겨운 이민생활의 정서적 결핍을 채우고 실질적 도움을 제공받는데 교회만한 곳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외롭고 힘들고 심심하니 교회에 가서 위로받고 교제하고 힘도 얻으려고 교회에 갑니다.
여기에 성장을 우상으로 삼은 한국교회의 이해도 맞아 떨어졌습니다. 고도성장시기에 함께 부흥한 한국교회는 ‘하면 된다’는 성장주의 슬로건을 성경적 용어로 포장하여 가르쳤습니다. ‘할 수 있다 하신 이는 나의 능력 주 하나님, 의심 말라 하시고 물결 위 걸으라 하시네.’ 이런 찬양을 목이 터져라 부르며 교인들이 떠올리는 것은 강팍한 이들조차 회개시키는 하나님의 능력이 아니라 나도 부자될 수 있다, 시민권 딸 수 있다, 내 아이도 아이비리그 된다 였습니다.
이런 이민자와 교회의 이해가 맞아떨어져 복음을 모르는 교인,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되는 교회가 출현했습니다. 목회자는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어떻게든 교회에 앉혀 놓아 교인이 하나라도 늘게 만들려고 했고 집사, 권사, 장로직을 무슨 감투처럼 씌워주어서 교회 떠나지 않게 하려고 애썼습니다. 우리 교회에서도 더많은 교인들에게 직분을 주어 교회 떠나지 않게 해야한다는 말을 심심찮게 들었습니다. 그 결과 거듭나지 않은 집사, 일 년 내 예배 한 번을 안 드리는 권사, 십일조는커녕 주정헌금도 안 하는 장로들이 이민교회에 쏟아져 나왔습니다. 어디 가서 교회 다니는데 집사소리도 못 들으면 이상한 사람 취급받았고 장로소리도 못 들으면 그저그런 교인인가보다 하는 시선을 받아야 했습니다. 어느 권사님은 남편에게 당신이 장로를 못 따서 챙피해 교회를 못 다니겠다, 나도 장로 부인 소리 좀 들어보자고 바가지를 긁었다는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모르는 농담도 들었습니다.
그 결과 이민교회의 영적 상태는 중세교회의 그것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는 상태로 전락했습니다. 어느 교회도 예외없이 감투다툼, 권력다툼, 분쟁과 다툼이 전염병처럼 퍼져 돌아다닙니다. 거듭나지 않아도 직분자가 되는 교회, 복음을 전하지 않아도 교인이 모이는 교회, 흩어지기는커녕 모여있어도 복음 전하는데 힘쓰지 않는 교회가 출현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의 ‘초대교회로 돌아가자’는 외침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한 때가 되었습니다.
5. 다시 전하는 교회
오늘날 이민교회의 과제는 무엇입니까? 초대교회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 하나님 나라와 의를 구하는 성도들이 모인 교회, 그래서 모이든지, 흩어지든지 주의 복음을 전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 생명의 근원이십니다. 예수님은 우리 믿음의 이유이십니다. 성령님은 우리 교회의 기초이십니다. 우리가 오늘 살고 믿고 교회로 모이는 이유는 이민생활에 더 성공하고 이민생활의 결핍을 충족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부름에 응답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서입니다. 이 목적을 잊고 있다면 우리는 교회가 아닙니다. 교회의 간판을 건 친목회요, 동아리일 뿐입니다.
선교적 교회로 가는 길을 찾는 것도 바로 이런 교회의 본모습으로 돌아가고자 함입니다. 참 교회는 사람이 세우는 곳이 아닙니다. 아무리 많이 모여도 사람으로 인해 교회가 교회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님이 세우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그 곳이 교회입니다. 우리는 사람이 세우는 교회입니까, 성령님이 세우시는 교회입니까? 우리 뉴저지장로교회가 성령님이 세우시는 교회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