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2:34-43/날 고치지 마세요
221009 주일설교
1. 무지의 어둠
베트남전쟁은 미국인에게 매우 아픈 기억입니다. 미국역사 최초의 패전일 뿐 아니라 시작부터 조작된 통킹만 사건으로 일으킨데다 50여 명의 유아를 포함한 500여 명 이상의 무고한 양민을 학살한 미라이학살사건을 비롯한 여러 전쟁범죄를 자행한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정신과의사 스캇 팩은 책 ‘거짓의 사람들’에서 이런 전쟁범죄 뿌리에는 미국인들의 무지가 자리잡고 있다고 일갈했습니다.
“미국 국민은 무지 때문에 악인이 되었다.”
그의 조사에 의하면, 파병미군 중 사병들은 거의 베트남전의 의미를 알지 못 했고 장교들은 10% 정도만이 안다고 답했지만 그들의 앎 조차도 군사령부가 홍보한 정훈자료가 전부였습니다. 즉 미군들은 베트남전의 의미와 목적도 모른 채 베트남인들을 악마화한 채로 총을 쏘았고 이런 상황에서 종종 양민학살을 자행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필연이었던 것입니다. 이 점은 당시 미국민도 다르지 않았습니다. 미국인 대부분은 수렁으로 빠져든 베트남전에 투입할 병사들이 부족해 모병제가 징병제로 바뀌어 자신의 아들이 끌려가기 전까지 전쟁에 아무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 때까지 미국은 개국 이래 단 한 번도 전쟁에서 진 적이 없었고 미국은 항상 옳다고 믿었기에 베트남전에서도 당연히 옳고 당연히 금방 이길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정부관료조차도 공산화를 막는다는 피상적 명분 정도 외에 베트남의 사정이나 역사적 상황도 제대로 알지 못 한 채 전쟁을 시작했다고 그는 일갈합니다. 미국정부, 미국인, 미군 모두가 베트남에 대해 철저히 무지했음이 전쟁 후 많은 보도와 연구를 통해 낱낱히 드러났습니다. 무지는 베트남전 당시 미국인 뿐 아니라 모든 시대 모든 사람을 악으로 이끄는 동력입니다. 예수님 앞에 모여있던 무리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 완고함
오늘 본문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이. 몇 사람이 헬라인의 방문을 받으신 후 무리와 나눈 대화의 마지막 부분과 그에 대한 평가입니다. 37절은 예루살렘 입성시 예수님을 향해 그토록 환호했던 이들이 그 많은 표적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예수님을 믿지 못 했다는 안타까운 결론을 내립니다.
(요 12:37) 이렇게 많은 표적을 저희 앞에서 행하셨으나 저를 믿지 아니하니
물을 포도주를 바꾸시고 죽어가는 아이를 살리시고 걷지 못 하는 이를 고치시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이시고 눈먼 자를 눈뜨게 하시고 급기야 죽은 지 4일이 지난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더 이상 무슨 증거가 필요합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예수님을 믿지 못 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바로 그들의 무지 때문입니다. 34절입니다.
(요 12:34) 이에 무리가 대답하되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매달려 고난받아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메시야가 누구인지도, 왜 고난을 받아야 한다는 것인지도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물론 그들은 이사야와 시편에서 메시야가 영원히 당신 백성을 통치하신다고 예언한 말씀은 이해하고 믿었습니다. 그러나 이사야 선지자가 예언했고 예수님도 여러 차례 언급하신 메시야가 고난을 받는다는 말씀은 전혀 깨닫지 못 했습니다. 이 무지야말로 악을 지탱하는 기둥 중 하나입니다. 사람들은 무지함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라고 외쳤고 무지함으로 스데반을 돌로 쳐 죽였습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스데반도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 한다’고 기도하셨습니다.
그럼 베트남전 당시의 미국인들과 예수님 앞의 유대인들 그리고 우리를 포함하여 모든 세대 사람들을 뒤덮고 있는 이 무지의 어둠의 이유는 무엇일까요? 예수님은 그 이유를 인간의 완고함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본문 39절 이하입니다.
3. 게으름과 나르시시즘
(요 12:39) 저희가 능히 (깨닫고) 믿지 못한 것은 이 까닭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요 12:40) ‘저희 눈을 멀게 하시고 저희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저희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하였음이더라.
언듯 읽으면 하나님이 그들을 완고하게 만드셨다는 의미 같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이 완고하여 고침받기를 거부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 완고함은 자기 고집대로 살겠다는 마음가짐입니다. 대개 청년 때에는 자신을 새롭게 바꾸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이런 마음은 얼마못가 사라지고 만사귀찮으니 그냥 이대로 살고 싶습니다. 스캇 팩은 이런 마음에서 악이 나온다고 설명합니다.
‘악의 뿌리에는 게으름과 나르시시즘(자아도취)이 자리잡고 있다.’
게으름? 난 열심히 일하는데? 이 게으름이란 자신을 돌아보기를 않는다는 뜻입니다. 자신의 생각, 태도, 가치관이 과연 옳은지 검토하는 것은 대단히 수고롭고 피곤합니다. 바로 이것이 QT를 어렵게 만드는 이유입니다. 말씀의 거울 앞에서 자신을 들여다보는 것은 평소 하지않는 깊은 사고와 영적 분투, 거울 같은 정직함을 동원해야 하는 무척 피곤한 일입니다. 그런 고민 없이 단순하게 반복할 수 있는 청소나 설겆이가 훨씬 쉽습니다.
게으름보다 더욱 사람을 완고하게 만드는 것이 나르시시즘입니다. 그리스신화의 나르시스가 연못에 비췬 자신을 보고 사랑에 빠져 그 누구와도 사랑하지 못 하다가 빠져 죽어 연못가의 꽃이 되었다는 이야기에서 기원한 나르시스즘, 자아도취는 자신은 늘 옳다는 생각입니다. 성공한 사람, 일이 잘 되어가는 사람일수록 더욱 나르시시즘이 강합니다. 자아도취에 빠진 사람은 자신을 바꿀 이유가 없습니다. 자신이 옳지 않았을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은 자아만족감에 엄청난 상처를 남깁니다. 그러니 자신이 옳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고수합니다. 이 생각에 위협이 되는 도전은 거칠게 저항합니다.
게으름과 자아도취는 모래와 시멘트처럼 섞여 마음을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고 완고하게 만듭니다. 이런 완고함에 강도를 더하게 붓는 것이 비겁함입니다. 42절입니다.
(요 12:42) 그러나 관원 중에도 저를 믿는 자가 많되 바리새인들을 인하여 드러나게 말하지 못하니 이는 출교를 당할까 두려워함이라.
그들 중에는 희미하게 진리를 깨달은 이들도 있었지만 사람들로부터 왕따당하고 불이익을 받는 것이 두려워 진리로 나오기보다 안전하지만 어두운 거짓의 편에 서기를 선택하였습니다. 그들의 비겁함은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보다 세상이 주는 보잘것없는 안전과 안락을 더 사랑합니다. 43절입니다.
(요 12:43) 저희는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였더라.
오늘 우리도 혹시 죽는 한이 있어도 자신을 바꾸지 않겠다고 버티는 사람은 아닐까요?
4. 진리의 심판
예수님이 이 마음이 완고한 이들을 보시고 탄식하신 이유는 그 결말이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비극이기 때문입니다. 48절입니다.
(요 12:47) 사람이 내 말을 듣고 지키지 아니할찌라도 내가 저를 심판하지 아니하노라 내가 온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함이 아니요 세상을 구원하려 함이로라. (요 12:48) “나를 저버리고 내 말을 받지 아니하는 자를 심판할 이가 있으니 곧 나의 한 그 말이 마지막 날에 저를 심판하리라.”
판사님, 왜 나를 심판하십니까? 나하고 무슨 원한이 있다고? 내가 당신을 심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나라 형법이 살인자에게는 이런 형벌을 가하도록 규정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종종 무신론자들은 사람들을 영원한 지옥에 내던지는 신이 어떻게 사랑의 하나님이냐, 그런 신이라면 자신은 믿을 수 없다고 주장합니다. 얼마나 큰 무지입니까? 사람들을 지옥에 내던지는 것은 그들의 죄와 은혜를 외면하는 불신앙입니다. 진리의 말씀은 죄가 의와 함께 할 수 없고 불신앙이 은혜를 가로막는다고 분명히 가르침에도 그들이 도무지 듣지않기에 결국 그 진리의 말씀에 의해 정죄되고 심판받는 것입니다. 마치 형법에 의해 살인자가 심판받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도 사랑으로 끝까지 그들에게 진리를 가르치고 구원하시려 하는 하나님에게 오히려 비난을 돌리니 이 얼마나 큰 무지요, 반역이요, 몰염치입니까?
5. 빛이 있을 동안에
이런 무지, 고집, 비겁함의 어둠 속에 갇혀 하나님의 아들을 알아보지 못 하고 외면하는 이들로 인해 예수님은 크게 실망하셨지만 포기하지 않고 다시한번 그들에게 어둠을 벗는 길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요 12:35) 예수께서 가라사대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빛이 있을 동안에 다녀 어두움에 붙잡히지 않게 하라. 어두움에 다니는 자는 그 가는 바를 알지 못하느니라. (요 12:36)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
두 번이나 강조하십니다. ‘빛이 있을 동안에’ 믿어야 한다, 어두움에 붙잡히기 전에 믿어야 한다, 즉 회개의 기회가 무한정 있지 않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아직 그들 곁에 계셔서 진리의 말씀을 해주시는 동안에, 무지의 어두움에 완전히 잡아먹혀버려 회개할 기회를 잃어버리기 전에 회개하고 빛으로 나와야 산다는 호소입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완고함은 마음의 눈을 멀게 만들고 무지의 어둠은 정신의 눈을 멀게 만듭니다. 정신과 마음이 모두 눈멀면 어느 순간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깨닫고 회개하지 못 하는, 양심이 화인맞은 지경에 이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말씀의 빛으로 우리의 어두운 영혼을 비추어 주십니다. 이 빛으로 우리 영혼을 비추고자 하는 바람이 있는 사람은 복됩니다. 이 땅의 많은 이가 아예 그러기를 원치 않기 때문입니다. 게을러서 못 합니다. 자아에 도취되어 못 합니다. 비겁하고 두려워 못 합니다. 마음이 완고하게 굳어져 하려고 해도 안 됩니다. 결국 칠흙같은 무지의 어둠에 갇힙니다. 어디로 가는지도 알지 못 한 채 양심의 가책도 느끼지 못 한 채 양민을 학살하고 스데반을 돌로 치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시고도 그들이 회개하지 않을 것을 아셨습니다. 36절입니다.
(요 12:36) …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저희를 떠나가서 숨으시니라.
숨으신 이유는 당신에게 남은 마지막 시간에 말씀의 빛으로 나온 제자들을 가르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13장부터 그 내용이 나옵니다. 지금 이 순간 진심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를 고쳐주시를 원하시는 마음이 여러분에게 있습니까? 그 마음이 있다는 것이 다시 말씀드리지만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마음이 안개처럼 사라지지 않고 실제 열매를 맺어 우리 삶이 생명되신 예수님에게 속하려면 게으름을 극복해야 합니다. 자아도취를 버려야 합니다. 비겁함을 극복해야 합니다. 오직 빛되신 예수님만이 우리를 이런 은혜를 주실 수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님의 은혜로 무지의 어둠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빛으로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