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15:1-3, 11-24/어떤 아버지인가
221030 주일설교
1. 군맹무상
‘장님 코끼리 만지기’라는 말을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인도의 경면왕이 어느 날 시각장애인들을 불러다가 코끼리를 만지고는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해 보라고 했습니다. 다리를 만진 이는 기둥같다 하였고 귀를 만진 이는 부채같다 하였고 꼬리를 만진 이는 뱀같다 하였습니다. 아무도 거짓말 한 이가 없습니다. 모두가 자신이 경험한 바에 근거해 진실을 말했지만 실제는 진실의 일부만을 묘사할 뿐이었고 코끼리의 실제모습을 제대로 묘사한 이는 없었습니다. 인도의 고대경전 열반경에 나오는 고사성어 군맹무상은 사람의 경험과 판단이 진실을 찾는데 얼마나 부실한 도구인지 보여줍니다.
우리도 종종 자신의 판단을 확신하면서 내가 봤다니까, 내가 겪었다니까 하는 경험에 근거한 판단이라는 주장을 합니다만 여전히 어둠속에 있는 것을 아닐까요? 우리 육체의 눈을 열렸으나 지적인 눈, 영적인 눈은 흐릿하기 때문에 말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이 강조하는 바도 바로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스스로 진실을 가장 잘 안다고 확신했던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왜곡된 시각을 교정시켜 주십니다. 잘 살펴보면 우리의 시각도 교정해야 할지 모릅니다.
2. 하나님을 오해하다
지난 주에 이어 탕자의비유를 살펴봅니다. 지난 주에는 비유 후반부에서 큰 아들을 살펴보았다면 오늘은 전반부에서 아버지를 살펴 봅니다. 이 비유는 예수님이 들려주신 말씀 중에서도 하나님의 마음에 관하여 가장 감동적으로 가르쳐 주십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묘사하는 이가 바로 비유 속 아버지입니다.
예수님이 이 비유를 들려주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지난 주에 비유의 배경에서 살펴보았듯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이 세리와 죄인들을 대하시는 태도에 대해 비난을 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세리와 죄인들을 영접하고 식사를 같이 하셨습니다. 이런 행동은 존경받는 랍비라면 결코 해서는 안 되며 실제 훌륭한 종교인으로 자부하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비난하기를 주저하지 않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렇게 하는 데는 당연히 이유가 있었습니다. 구약성경이 그렇게 가르친다고 믿었기 때문입니다. 시 1편입니다.
(시 1:1) 복 있는 사람은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며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고
이 말씀에 의하면 하나님은 악인과 죄인과 오만한 이들을 미워하시는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섬기는 신앙인들은 세리와 죄인들을 멸시하고 비난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들을 영접하고 식사까지 같이 한단 말입니까? 예수님은 설마 이 말씀을 모르시는 것일까요? 물론 예수님은 이 말씀을 잘 아십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과 달리 구약성경 전체를 아십니다. 그들도 구약성경 전체를 읽고 외우지만 그들이 믿고 싶은 부분만 믿음으로 하나님의 모습을 왜곡하였습니다. 그들이 깨닫지 못 한 하나님의 진짜 모습, 구약성경 전체가 계시하시는 하나님의 온전한 모습을 예수님을 들려주셨습니다. 그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3. 그리우신 하나님
하나님은 죄를 멸시하고 악을 심판하시지만 동시에 죄인과 악인을 긍휼히 여기십니다. 그들이 심판받아 멸망받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시고, 그들이 회개하고 돌아오기만을 기다리시고, 돌아오는 이들을 무한한 긍휼로 용서하십니다. 이 점을 20절이 잘 보여줍니다.
(눅 15:20)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 돌아가니라. 아직도 거리가 먼 데 아버지가 저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거리가 먼데 어떻게 아버지는 그가 아들인 줄 알아보았을까요? 부모된 이들은 그 이유를 압니다. 아버지가 날마다 마을 어귀에서 아들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방황하는 어리석은 자녀를 둔 부모는 결코 편안히 잠자리에 들 수 없습니다. 자녀가 돌아오기까지 안식은 없습니다. 어디서 밥은 먹고 다니는지, 아프지는 않는지, 무슨 일을 당하지는 않는지 걱정하느라 쉴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어리석은 죄와 미련한 악에 빠져 살 때 하나님은 우리로 인하여 편히 쉬지 못 하십니다.
제가 처음 가출한 것은 4살 때입니다. 대구 서문시장 근처에 살 때 부엌에서 밥하시는 엄마를 귀찮케 하니 아, 좀 나가서 놀아, 하셨답니다. 마상을 입은 저는 그 길로 아장아장 걸어서 가출을 했습니다. 저녁 준비를 끝내시고 보니 아이가 안 보였습니다. 순간 눈 앞이 하얘진 어머니는 온 동네를 뒤지며 저를 부르는데 동네 골목골목에 노는 아이들이 다 아들 도완이로 보이시더랍니다. 해가 다 지고서야 경찰서에서 잠든 저를 발견하시고는 얼마나 우셨는지 모른다고 어머니는 몇 번이나 이 이야기를 되풀이하시며 그 때 너를 잃어버렸더라면 어쩔 뻔 했냐고 눈시울이 불거지십니다.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저는 깨달았습니다. 아, 틀림없이 이 아버지는 동네 어귀에서 날마다 아들이 돌아오기를 기다렸겠구나. 누군가 저 멀리 나타나기만 하면 달려가 내 아들이 아닌가 확인해 보았겠구나…
4. 영접하시는 하나님
이것이 죄인을 기다리는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그 마음 덕분에 우리는 하나님께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따뜻하게 맞아주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를 측은히 여겨 달려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시며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무한한 긍휼 덕분에 우리는 멸망치 않고 용서받고 구원받습니다.
주님의 이 마음을 모르기에 바리새인들처럼 우리도 죄인과 악인을 미워하고 멸시합니다. 사실 우리는 죄와 악은 그렇게 미워하지 않으면서 죄인과 악인만 미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와 반대로 죄와 악은 견딜 수 없이 미워하시지만 죄인과 악인은 불쌍히 여기십니다.
(딤전 2:4)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으며 진리를 아는 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시 86:15) … 주는 긍휼히 여기시며 은혜를 베푸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자와 진실이 풍성하신 하나님이시오니
이 긍휼 덕분에 저와 여러분이 심판받고 멸망받지 않은 것입니다. 그 긍휼을 아는 이라면 주님처럼 죄인과 악인도 긍휼히 여기는 것이 마땅합니다.
5. 용서하시는 하나님
또한 하나님은 우리를 영접하실 때 아무 대가 없이 받아주십니다. 자신의 죄를 깨달을 때 우리는 감히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없다고 여깁니다. 맞습니다. 그럴 자격이 우리에겐 없습니다. 이 아들도 그 사실을 알았기에 자신을 종으로 여겨달라고 합니다.
(눅 15:21)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종이 되겠다는 말입니다. 사실 종이 되는 것도 그가 저지른 죄에 비하면 과분한 처분입니다. 그가 한 일은 아버지의 재산을 탕진한 것만이 아닙니다. 살아계신 아버지의 유산을 나누어 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가부장적 권위가 확고했던 고대 중근동에서는 아버지가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는 의미의 용서받을 수 없는 불효입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런 패역한 아들은 동네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멍석말이로 때려 죽이도록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를 종으로 맞아들이지 않습니다.
(눅 15:22)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눅 15:23)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눅 15:24)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제일 좋은 옷과 반지와 신은 모두 종이 아니라 상속자인 아들만이 입는 것입니다. 더구나 그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아 먹고 즐기는 잔치를 열어주십니다. 아버지에게 그는 죽었다 살아난 아들이며 잃었다가 다시 얻은 아들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대접이며 영접입니까? 죄인된 우리가 하나님께 돌아가면, 우리 죄를 어찌 할 수도 없이 아무 공로도, 자격도 없이 가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우리를 자녀 삼으시고 우리에게 가장 좋은 옷을 입히시고 우리를 위해 천국잔치를 열어주십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이며, 이 얼만 큰 긍휼이며, 이 얼마나 큰 상입니까? 도대체 어떻게 우리가 이런 은혜와 긍휼과 상을 거저 받습니까? 이건 불공평하지 않습니까?
6. 거저이지만 거저가 아닌
우리는 거저 받지만 하나님은 거저 주시는 것이 아닙니다. 세상은 불공평하게 보지만 하나님은 지극히 공평하게 처분하셨습니다. 우리 죄악의 대가를 하나님 당신이 대신 다 지불하셨기 때문입니다. 언제 어떻게 하셨습니까? 당신의 독생자 예수님을 내어주셔서 십자가에서 흘린 피로 우리의 죄값을 다 갚으셨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거저가 아닙니다. 하나 뿐인 아들을 내어주셨습니다. 여러분이 친구를 사랑해서 도우려면 무엇까지 내어줄 수 있습니까? 돈 몇 푼도 거저 내어주기가 어렵습니다. 하물며 여러분의 자녀를 희생시켜 친구를 살립니까? 친구를 위해서도 자식을 내어줄 수 없는데 원수를 위해서 내어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습니다.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롬 5:7) 의인을 위하여 죽는 자가 쉽지 않고 선인을 위하여 용감히 죽는 자가 혹 있거니와 (롬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하나님은 공평하십니다. 죄값을 다 치르셨습니다. 우리에겐 거저입니다. 우리에겐 감당하기 힘든 불공평한 은혜입니다. 이런 은혜를 주신 덕분에 우리는 영원히 구원 얻었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의 이 사랑을 영원히 찬양하고 전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이 사랑을 바리새인들이 깨닫기를 원하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주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이 사랑을 깨닫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그 사랑을 믿고 겸손히 주님께 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십니다. 마을 어귀에서 여러분을 기다리시는 아버지의 모습이 보이십니까? 주저말고 달려가 그 품에 안기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