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3:1-11/악에서 구하옵소서
221127 대강절1주 고별설교1
1. 예수님의 오신 이유
오늘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성탄절을 기다리는 대강절 첫 주일입니다. 우리를 위해 오신 예수님의 은혜가 여러분의 심령에 흘러넘치시기를 축복합니다. 한달 반만에 요한복음으로 돌아왔습니다. 13장은 요한복음의 2부가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1부는 1장부터 12장까지 예수님의 공생애를 다루고 2부가 오늘 13장부터 17장까지 예수님의 고별설교를 다룹니다. 마지막 3부가 18장부터 예수님의 수난을 다룹니다. 고별설교의 자리는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 밤 곧 유월절을 준비하는 최후의 만찬자리이고 예수님과 열두 제자들이 참석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때 당신이 십자가를 지시고 죽으셔야 것을 이미 알고 계셨습니다. 얼마 남지 않은 마지막 시간에 예수님은 무엇을 하셨습니까? 제자들을 마지막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이 점은 예수님이 이 땅에 왜 오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러 이 땅에 오셨고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요 13:1)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
예수님의 제자인 우리의 사명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정에서 우리의 사명은 가족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일터에서도 우리의 사명은 동료와 고객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서 우리의 사명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를 사랑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라면 말입니다.
2. 예수님의 사랑, 발씻음
그럼 어떻게 사랑합니까? 제자들의 발을 씻기셨습니다! 발을 닦는 것이 왜 사랑입니까? 발 닦는 것은 주인이나 손님이 왔을 때 청결과 피로회복을 위해 종들이 하는 섬김이었습니다. 그 섬김을 주인된 예수님이 하시니 큰 섬김이요, 사랑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더 큰 사랑이 숨어있었습니다. 그것은 제자들의 죄씻음을 위해 죽으심입니다. 8절입니다.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예수님의 보혈로 죄씻음을 받지 못 하면 구원을 받지 못 한다는 뜻입니다. 그 죽으심이 죄를 씻는다는 사실을 깨우치시려 상징으로 발을 씻으신 것입니다. 예수님이 주시는 가장 큰 선물은 무엇입니까? 바로 이 죄씻음입니다. 이 죄씻음은 우리의 신분을 변화시키고 더 나아가 우리의 성품도 변화시킵니다. 어떻게 그렇게 됩니까?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한 베드로가 발 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달라고 하자 예수님은 이런 아리송한 말씀을 하십니다. 10절입니다.
(요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이미 목욕한 자는 발밖에 씻을 필요가 없느니라. 온 몸이 깨끗하니라…”
이미 목욕을 했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죄씻음을 이미 받아 그들의 신분이 변화되었다는 말입니다. 15장으로 가면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요 15:3) 너희는 내가 일러준 말로 이미 깨끗하여졌으니
예수님이 구주시라는 당신의 말씀을 믿고 그 가르침을 받아들인 이는 이미 예수님이 앞으로 이루실 십자가의 속죄제사의 효력을 미리 누립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지도 않았던 시대의 아브라함을 비롯한 구약성도들도 예수님의 십자가의 속죄의 능력을 믿음으로 구원얻는다고 하였습니다.
(요 8:56) 너희 조상 아브라함은 나의 때 볼 것을 즐거워하다가 보고 기뻐하였느니라.
이처럼 예수님의 십자가의 능력은 과거와 현재, 미래 모든 시대의 죄를 씻는 능력이 있습니다. 이런 능력으로 우리의 죄가 씻음받아 거룩한 하나님의 자녀로 신분이 변화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런데 목욕한 이는 발만 씻으면 된다는 말씀은 무슨 뜻일까요? 신분이 바뀌었으나 여전히 남아있는 죄성때문에 거듭난 후에 짓는 죄가 있습니다. 그런 죄는 그 때 그 때 다시 십자가 앞에 나가 고백하고 씻음받아야 한다는 뜻입니다.
(요일 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그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이 자백이 바로 그 발을 씻음입니다. 이런 자백과 돌이킴 곧 회개와 씻음받음을 통해 우리는 죄성을 점차 극복합니다. 보혈의 능력을 계속 우리 마음에 채움으로 성품까지 변화시켜 갑니다. 만일 우리가 이 자백을 거부하면 우리의 성품은 변화되지 않습니다. 바로 전 8절입니다.
(요일 1:8) 만일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스스로 속이고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할 것이요.
구원파가 이단으로 분류되는 지점이 여기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믿음으로 모든 죄를 용서받았으니 그 후 짓는 죄는 더 이상 죄가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아니, 죄입니다. 그 죄를 가벼이 여기면 큰일 난다고 이어지는 본문이 경고합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목욕과 발씻음은 이처럼 신분의 변화와 성품의 변화를 모두 가리킵니다. 예수님을 믿을 때 우리의 신분은 한 번에 변합니다. 동시에 예수님을 따르며 날마다 죄를 자백하고 보혈을 의지할 때 우리의 성품은 평생에 걸쳐 변화됩니다. 그러므로 우리에게 계속 발을 씻으라고 명하십니다. 여러분, 매일 저녁 깨끗한 물로 발을 씻으시지요? 그 때마다 기억하십시오. 내 영혼의 발도 매일 보혈로 씻어야 하는구나. 예수님을 믿음으로 목욕할 뿐 아니라 매일의 회개로 발도 씻어 날마다 예수 그리스도를 더욱 닮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
3. 무모한 열정
예수님의 이 사랑은 얼마나 크고 놀랍습니까! 당신을 죽여 죄인을 살리시는 사랑, 우리가 흉내조차 내지못하는, 감히 상상조차 해보지 못 하는 사랑입니다. 이 사랑을 우리에게 부어주셔서 물이 포도주로 바뀌듯 죄인을 성도로 만드는 구원의 기적을 일으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이 구원의 기적을 가로막는 큰 장애물이 둘 있습니다. 첫째는 무지한 열정입니다. 예수님이 발을 씻기려 하시자 그 영적 의미를 전혀 모르면서도 베드로는 펄쩍 뛰며 예수님을 가로막습니다. 6-7절입니다.
(요 13:6)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으시나이까?” (요 13: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 후에는 알리라.”
예수님의 말씀은 이후 성령이 임하셔야 베드로가 이 의미를 이해하게 되리라는 뜻입니다. 그런데도 베드로는 여전히 물러서지 않고 고집을 부려서 예수님의 핀잔을 듣습니다. 8-9절입니다.
(요 13:8) 베드로가 이르되 “내 발을 절대로 씻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는 무지한 데 고집이 셉니다. 예수님의 대답에는 ‘또 시작이군’하는 가벼운 짜증이 묻어납니다. 그런데 여기서 멈추면 베드로가 아니지요. 그는 고집을 부리다 핀잔을 들은 것이 속상했는지, 아니면 점수를 따려했는지 이번에는 반대편으로 너무 나가버립니다. 9절입니다.
(요 13:9)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 발뿐 아니라 손과 머리도 씻어 주옵소서.”
베드로는 항상 모자라기보다는 지나쳐서 문제가 되는 성격입니다. 마가복음 8장을 보면, 그는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신다는 말씀을 하시자 예수님을 붙들고 그러지 말라고 비난했다가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는 예수님의 엄청난 꾸중을 듣습니다. 오늘 본문의 후반부 13장 37절 이하를 보면, 예수님의 고난의 길을 제자들이 지금은 따라오지 못 하지만 후에 성령이 임하시면 따라올 것이라고 하자 베드로는 ‘목숨을 버려서라도 주님을 따르겠다’고 큰소리를 쳤다가 예수님이 혀를 차며 닭 울기 전에 세 번이나 당신을 부인할 것이라는 말씀을 하시게 만듭니다. 21장으로 가보면, 갈릴리에서 물고리를 잡다가 요한이 바닷가에 서신 예수님을 알아보자 베드로는 배가 해변에 닿기를 기다리지 못 하고 물에 뛰어듭니다. 베드로는 항상 무모한 열정과 고집으로 예수님을 답답하고 힘들게 만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베드로를 위해 기도를 많이 하셔야 했습니다.
(눅 22:31)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눅 22:32)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
무모한 열정은 불과 같습니다. 이런 열정을 가진 이들을 위해서는 기도가 많이 필요합니다. 불이 오븐 밖으로 나와 집을 다 태우지 않고 오븐 안에서 음식을 잘 요리할 수 있도록 다스림을 받아야 합니다.
4. 마귀의 생각
이보다 더 위험한 두 번째 장애물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마귀의 생각입니다. 유다를 사로잡았습니다. 2절입니다.
(요 13:2)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가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라.
마귀가 넣은 생각이 유다의 마음을 가득 채웠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날까요? 유다는 예수님의 열두 제자 중 하나요, 머리가 좋은 제자였습니다. 돈궤를 맡으려면 숫자에 능해야 하고 고대에는 문자해독과 더불어 숫자계산은 뛰어난 지식인들만 가진 능력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열두 제자를 신중에 신중을 거듭하여 택하셨습니다. 성경에 예수님이 철야기도했다는 표현이 딱 두 번 나오는데 십자가를 지시기 전날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밤을 새워 기도하신 것이요, 나머지 하나가 따르는 많은 제자 중 열둘을 택하시기 전날밤 하신 기도입니다. 눅 6장입니다.
(눅 6:12) 이 때에 예수께서 기도하시러 산으로 가사 밤이 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시고 (눅 6:13) 밝으매 그 제자들을 부르사 그 중에서 열둘을 택하여 사도라 칭하셨으니
이렇게 신중하게 세운 유다가 어떤 지경에 이릅니까? 10-11절입니다.
(요 13:10) 예수께서 이르시되 “…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 아니니라.” 하시니 (요 13:11) 이는 자기를 팔 자가 누구인지 아심이라. 그러므로 다는 깨끗하지 아니하다 하시니라.
심지어 그는 무서운 말씀도 듣습니다.
(요 6:70)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
유다는 왜 깨끗함 곧 속죄받은 은혜를 잃어버리고 마귀라고 불리기까지 합니까? 그가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였기 때문입니다. 마약의 유혹에 넘어가는 순간 중독과 멸망의 하이웨이에 올라타는 것처럼 마귀의 생각을 뿌리치지 않고 받아들이면 우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찾는 마귀의 종이 됩니다. 예수님은 왜 베드로처럼 유다를 꾸짖고 말리지 않으셨을까요? 아마도 바리새인들처럼 이미 유다가 그 마음이 굳어져서 훈계도, 꾸지람도 듣지 못 하는 상태에 이르렀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이 상태가 완전히 악에게 잠식당한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주기도문에서 이런 상태에 빠지지 않도록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다만 악에서 우리를 구원하옵소서.’
이런 악의 상태에 빠지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예수님은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고 하셨습니다. 또 죄를 지으면 그것에 노예가 되지 않게 자백하고 다시 보혈의 씻김을 받으라고 하셨습니다. 또 마귀의 생각에 점령당하기 전에 분별하고 뿌리쳐야 합니다.
이 시대에 우리 귀에 마귀의 생각을 들려주는 이는 누구입니까? 오늘날 한국교회를 가장 위협하는 이단인 신천지가 있습니다. 지난 주일 한국 대구체육관에서는 10만 명의 신천지예수교 증거장막성전 교인들이 모여 10만 수료식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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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일교단 사상 최대규모의 집회라고 일제히 언론이 보도했습니다. 이단연구가들은 팬데믹 이후 신천지의 교세는 거의 줄지 않고 오히려 포교방법이 더 교묘해졌다고 입을 모읍니다. 이들의 특징은 장기적인 계획을 세우고 그 누구보다 열심히 봉사하여 인정을 받은 후 교회지도자들을 끊임없이 험담하여 교인들을 이간질시키고 다툼을 일으키고 지도자를 내쫓은 뒤 신분을 숨긴 신천지 출신 지도자를 데려와 교회를 탈취하는 것입니다. 대략 교인 50명당 한 명 정도가 침투해 있다고 봅니다. 이런 이들의 말을 듣는 것이 마귀의 생각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멸망의 길입니다.
5. 구원자 예수님
무모한 열정으로 좌충우돌하고 마귀의 생각을 분별하지 못 하는 어리석은 우리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여전히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3절입니다.
(요 13:3)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예수님의 십자가 수난과 죽으심은 우연히 생긴 일도, 어쩔 수 없이 당한 일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통제하고 계시는 상황이었습니다. 이 고난과 죽음으로 통해 하나님께로 돌아가시는 것이 사랑하는 제자들을 영원히 구원하시는 것임을 잘 알고 당신이 선택하신 길입니다. 우리가 무모한 열정에 사로잡혀 있든지, 돌이키지 못 하는 악에 사로잡혀 있든지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는 분은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예수님이십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중보기도와 성령강림으로 깨닫고 돌이켜 교회의 기둥과 같은 사도가 되었습니다. 유다처럼 악에 사로잡혀 성도들을 잡아 가두던 사울은 부활의 주님을 만나고 바울 사도로 거듭났습니다. 주님을 만나는 것, 주님께 돌아가는 것, 주님의 성령을 받는 것이 우리의 소망입니다. 왜 유다는 결국 멸망했고 사울은 은혜를 입었는지 우리가 다 알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유다가 아닌 바울이 되는 유일한 길은 생명의 주님을 만나는 길 뿐이란 점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죄와 죽음에서 영원히 구원하시는 유일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십니다. 예수님의 보혈로 목욕할 뿐 아니라 매일 발을 씻음으로 영생의 삶을 누리시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