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4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요 13:12-20

20221204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 요 13:12-20

요 13:12-20/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221204 대강절2주 고별설교2
1. 높아지려는 세상
앞뒤좌우의 교우들에게 이렇게 축복의 인사를 하십시다. 대한민국! 대한민국의 16강을 축하합니다! 월드컵이 한창입니다. 여러분 모두 주말에 행복하셨지요? 한국이 16강에 올라가서. 반면 탈락한 우루과이 선수들은 어떻게 하던가요? 그라운드에 쓰러져 울었습니다. 선수도, 국민도 화를 내고 슬퍼도 하고 울기도 하더군요. 왜 올라가면 좋아하고 떨어지면 슬퍼합니까? 그것이 세상의 방식이기 때문입니다. 올라가야 돈과 지위와 명예를 거머쥡니다. 못올라가면 얻지 못 합니다. 스포츠 뿐 아니라 사회, 정치, 경제, 문화 모든 면에서 그렇습니다.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올라가기를 원하는데 높은 곳에 올라갈 수 있는 이는 소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은 소수의 올라간 사람들과 다수의 못올라간 사람들의 긴장이 끊이지 않습니다. 올라간 이들은 돈과 권력과 명성을 움켜쥐고 잃을까 두려워하며 살아갑니다. 못올라간 이들은 불평과 불만, 원망과 시기에 사로잡혀 살아갑니다. 그 사이의 갈등을 사회가 제대로 대처하지 못 하면 사회불안이 심화되다가 급기야는 혁명 같은 방식으로 큰 대가를 치릅니다. 이런 세상은 올라간 이도, 못올라간 이도 모두 불행합니다. 모두를 긴장과 갈등에서 해방시키고 행복하게 만드는 방식은 없을까요? 교회에는 이런 세상에 제시할 답이 있을까요?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이 알려주십니다.
2. 낮아지려는 공동체
지난 주에 이어 계속 요한복음 13장입니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후 옷을 입고 자리에 앉아 그렇게 하신 이유를 설명하셨습니다. 14-15절입니다.
(요 13:14)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었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이 옳으니라. (요 13:15)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
발씻음은 가장 낮은 종의 역할입니다. 교회는 서로 올라가려는 세상과 달리 서로 내려가려는 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첫째, 우리보다 훨씬 높으신 주와 선생되신 예수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입니다. 둘째 그렇게 하는 것이 진정한 복의 길이기 때문입니다. 17절입니다.
(요 13:17) 너희가 이것을 알고 행하면 복이 있으리라.
이렇게 하면 복이 있다? 어떤 복일까요? 구약에도 이와 비슷한 복의 약속이 등장합니다.
3. 복이 있으리라 
(신 15:4)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의 말씀만 듣고 내가 오늘 네게 내리는 그 명령을 다 지켜 행하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기업으로 주신 땅에서 네가 반드시 복을 받으리니 너희 중에 가난한 자가 없으리라.
이 명령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출애굽 시켜서 가나안땅에 들어가기 직전에 십계명과 율법을 주시면서 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율법을 주십니까? 흔히 세상이 오해하듯 이스라엘을 괴롭히거나 구속하거나 감시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만을 사랑하고 이웃을 착취하는 방식으로 살아가며 지옥을 만드는 이 세상 모든 나라와 다른 나라, 다른 공동체를 만들기 위함이었습니다. 곧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의 가치를 깨닫고 순종하여 하나님을 왕으로 모신 이상국가,  천국 곧 하나님 나라 말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면 하나님은 당신의 그 나라에 복을 약속하셨습니다. 그것은 모든 국민이 가난한 이가 없이 충분한 복지와 안전과 자유를 누리는 세상입니다. 하나님이 다스리는 나라에서만 누릴 수 있는 그런 복을 주시겠다는 약속입니다.
서로의 종이 되라는 예수님의 이 말씀과 사실상 같은 메시지입니다. 예수님의 종이라는 말씀은 하나님 사랑을, 서로의 종이 되라는 말씀은 이웃 사랑을 의미합니다. 서로가 종이 되므로써 천국을 경험하는 공동체를 이 세상에 보여주라는 의미입니다. 그러나 남의 종이 됨은 우리의 자연적 본성으로 따를 수 없는 요구이므로 주인이신 예수님이 먼저 종이 되어 제자들을 섬기는 본을 보이셨습니다. 주님의 권위에 의지해서라도 그렇게 살라는 말씀입니다. 그렇게 순종하면 우리는 하나님이 우리 삶에 임재하시는 복을 경험합니다. 성령이 우리 공동체에서 역사하는 복을 경험합니다. 사랑과 은혜가 우리 사이에서 흘러 넘치는 복을 경험합니다. 이것이 주님이 약속하신 복입니다. 천국이 임하는 복, 천국을 누리는 복입니다.
(마 18:20)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
이것이 세상 최고의 복입니다. 공감이 안 되시나요? 우리 눈에는 돈과 권력, 명예가 더 큰 복으로 보입니다. 착시현상입니다. 우리 눈이 얼마나 잘 속는지 아시지요? 우리 영의 눈도 그렇습니다. 세상영광이 너무나 큰 복으로 보입니다만 지나고 보면 그것은 정말 작은 복입니다. 그건 엠파이어 스테이트 빌딩이 바로 아래서 보면 한없이 높아보이는 것과 같습니다. 하늘에서 보면 성냥곽만도 못 합니다. 부질없고 손에 쥔 모래와 같고 아침안개 같은 복입니다. 진짜 복은 우리 삶에 임하는 하나님의 임재입니다. 공동체에 임하는 하나님의 성령이십니다. 우리 중에 임하는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런 천국의 복이 여러분에게 임하기를 축복합니다. 곁에 있는 성도들에게 축복해 주십시오. 천국을 누립시다! 제가 먼저 종이 되겠습니다!
4. 마귀도 일한다
그런데 현실교회에서는 이런 천국을 누리지 못 하는 일이 종종 발생합니다. 왜입니까? 마귀도 가만히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려 하듯 마귀도 자신의 나라를 세우기 위해 부지런히 일합니다. 그래서 유다와 같은 현혹되기 쉬운 이들에게 마귀의 생각을 집어넣어 조종합니다. 그 결과 교회에서조차 낮아지려고 하지 않고 세상처럼 높아지려고 발버둥치는 일이 일어납니다. 이스라엘에서 우상숭배가 횡횡하며 율법이 무시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런 경향을 잘 보여주는 예가 이민교회 장로직에 대한 집착입니다. 전에 설명드렸다시피 원래 감리교나 침례교에는 장로직분이 없습니다. 유독 한국감리교, 한국침례교에만 있습니다. 왜입니까? 장로교에 있는 장로직분이 다른 직분에 비해 더 높은 자리로 인식되면서 감리교인, 침례교인들도 그런 자리에 오르고 싶어했기 때문입니다. 교회마다 장로선거를 대비해 보여주기식 봉사하는 집사들이 늘어나고 장로선거에 온갖 청탁과 부정이 개입됩니다. 그렇게 하고도 장로가 못 되면 시험에 들어 교회를 떠나거나 앙심을 품고 교회반대세력이 되어 분쟁을 일으킵니다. 일단 장로가 되면 마치 회사의 이사가 된 듯 우월감을 갖고 더이상 궂은 봉사는 하지 않고 다른 교인들을 부리고 훈계하고 심지어 갑질을 합니다. 장로들끼리도 누가 더 높은가 힘겨루기가 쉴새없이 일어납니다.
이런 부작용을 없애보겠다고 한국의 100주년기념교회에서는 70세가 넘으면 남자는 모두 장로, 여자는 모두 권사로 부르기로 했습니다. 어차피 다 되니까 싸우지 말고 섭섭해 하지도 말라는 것입니다. 가까이 있는 뉴저지찬양교회에서는 지난 2012년 남자는 모두 형제, 여자는 모두 자매로 호칭을 통일했습니다. 같은 의도입니다. 우리도 받아들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도화하기 전에 먼저 자발적으로 한 번 시행해 보십시다. 형제님, 자매님, 얼마나 아름다운 성경적 표현입니까? 섭섭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부터 김도완 형제라고 불러주십시오. 이런 방식이 유익이 얼마나 많은지요? 이 분이 권산지, 집산지 모를 때 자매님 하면 해결됩니다.
5.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시며
이렇게 자리와 지위에 집착하고 높아지고 주도권을 쥐려고 싸우고 비방까지 서슴지않는 모습은 교회와 신앙에 대해 회의를 갖게 하기에 충분합니다. 이게 교회인가, 이게 신앙인가, 내가 진리를 믿고 있는 것이 맞는가 회의가 듭니다. 예수님은 현실에서 이런 일이 많이 나타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아셨습니다. 18절입니다.
(요 13:18) 내가 너희 모두를 가리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나는 내가 택한 자들이 누구인지 앎이라. 그러나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 한 성경을 응하게 하려는 것이니라.
열두 제자 중 택함받지 않은 유다가 있고 그는 종이 되기보다 주인이 되려 할 것이다. 시 41편을 인용한 말씀, 내 떡을 먹는 자 곧 너희 제자 중에, 곧 교인 중에 내게 발꿈치를 들어 차는 자, 주인이 되려고 나를 파는 자, 형제 자매를 치는 자가 나올 것이다. 그럴 때 놀라지 말아라. 19절입니다.
(요 13:19) 지금부터 일(유다의 배신)이 일어나기 전에 미리 너희에게 일러 둠은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그인 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로라.
예방주사를 놓듯이 유다의 배신을 미리 일러놓으니 그런 일이 일어나도 놀라지 말고 믿음을 잃지 말아라 하는 의미입니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을 다 통제하고 있는 내가 메시야인 것을 믿으라는 말씀입니다. 유다의 배신을 안 성도들 사이에서 이런 의심이 생기지 않겠습니까? 열두 제자 중 하나가 주인을 팔아? 그런 배신자가 나오는 무리라면 남은 11명도 과연 사도의 자격이 있을까? 택한 제자들 중에서 그런 배신자가 나왔다면 그들을 택한 예수님은 과연 메시야가 맞을까? 의심이 일어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20절을 말씀하셨습니다.
(요 13: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가 보낸 자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이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내가 보낸 자, 내 제자들은 여전히 나를 대신하는 내 종이다. 나 역시 여전히 나 보내신 여호와 하나님의 아들이다. 그들을 영접함이 나를 영접함이요, 나를 영접함이 하나님을 영접함인 것을 변함이 없다. 그러니 믿음을 잃지 말라는 당부입니다.
6. 평안하라, 담대하라
교회에서도 때로 세상처럼 온갖 추한 일이 벌어집니다. 이게 교회이고 이게 기독교인인가, 회의가 들 때가 분명 있습니다. 그렇다고 하여도 참교회의 교회됨, 참성도의 성도됨, 참진리의 진리됨은 훼손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되심도 변함없습니다. 명품일수록 짝퉁이 많듯이 복음은 진리이기에 왜곡하는 이단이 많습니다. 교회는 참 거룩한 공동체이기에 무너뜨리려는 마귀의 공격도 거칩니다. 예수님은 참 구원자이시기에 자신을 재림예수라 사칭하는 적그리스도도 많습니다. 이 모든 일은 당연히 일어날 것이라고 예수님은 이미 예고하셨습니다. 그럴 때 믿음을 잃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실제 초대교회서부터 2천 년 동안 교회에는 오늘날 한국교회에서 벌어지는 것보다 더한 추한 일도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복음은 여전히 선포되고 성도는 여전히 하나님을 경배하며 교회는 여전히 땅 끝까지 전파되고 있습니다. 구더기 무서워 장못담그는 일이 없듯 이단, 사이비, 거짓성도의 온갖 악행에도 선교는 멈추지 않습니다. 왜입니까? 여기 예수님의 놀라운 선언이 있기 때문입니다.
(요 16:33)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예수님 안에서 이 평안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의 승리를 믿고 이 담대함을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예수님이 이미 세상을 이기셨고 마귀를 물리치셨고 죄와 죽음의 권세를 깨뜨리셨습니다. 우리는 이긴 전쟁을 치르고 있습니다. 승리를 확인하는 것만이 남았습니다. 비록 환란과 시험이 우리를 위협하고 일시적으로 쓰러뜨릴 때도 있지만 승리를 앗아가지 못 합니다. 유다가 예수님을 배신해도 예수님을 부활하시고 제자들은 믿음을 되찾고 교회는 서고야 말았습니다. 오늘날에도 온갖 죄와 불의가 참성도를 위협해도 복음과 진리와 의는 무너지지 않고 승리합니다. 교회는 서고 참믿음은 전파될 것입니다. 세상이 높아지려 해도 우리는 낮아집시다. 거짓이 위협해도 우리는 진실합시다. 악이 교회를 흔들어도 선으로 이깁시다. 예수님처럼 종이 되어 서로를 섬기는 참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