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 20:1-16/포도원 주인의 의도
221211 대강절3주 포도원주인의비유
1. 회장의 선물
어느 자수성가한 부동산 재벌이 자신이 자란 빈민가에 돌아와 홈리스들을 보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무언가를 결심한 그는 비서에게 새로 분양할 타운하우스 한 동 전체를 비워두라고 시키고는 그들을 찾아갔습니다. “여러분, 제가 여러분에게 선물을 하나씩 드리고 싶습니다. 대신 여러분이 가진 것을 모두 제게 주십시오.” 어떤 이는 자신이 가진 쇼핑카트와 골판지, 텐트를 움켜쥐더니 “미쳤어, 당신이 누군지 알고 내 것을 준단 말이야?” 하고 거절했습니다. 어떤 이는 반신반의했지만 자기 것을 주섬주섬 주워들고 회장의 비서에게 건내주었습니다. 회장은 그의 약속을 믿은 이들을 데리고 타운하우스로 가서 열쇠를 2개씩 건내주었습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이 2층 집과 현관 앞마다 있는 차를 드리고 내일부터 우리 회사에서 일할 수 있도록 기회를 드리겠습니다. 부디 이 곳에서 새 삶을 시작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들을 깜짝 놀라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감사하고 회장의 바람대로 새 삶을 시작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그런데 그들 중 몇 사람이 갑자기 소리쳤습니다. “잠깐만요, 저 사람들은 겨우 골판지 몇 장을 당신께 줬을 뿐이잖아요. 우리는 쇼핑카트도 주고 텐트도 줬어요. 그럼 우리는 저들보다 더 받아야지요. 집이든 차든 두 배는 주어야지요. 똑같이 받는다는 게 말이 됩니까?”
여러분이라면 무어라 답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이 하고 싶은 그 답을 예수님이 진작에 하셨습니다. 그 답이 바로 오늘 본문의 비유입니다.
2. 부자 청년과의 대화
‘포도원 주인의 비유’라고 불리는 이 비유는 기독교 복음의 핵심을 가르쳐 줍니다. 많은 기독교인이 이 진리를 제대로 이해하지 못 해 불만 가득한 홈리스처럼 원망하고 기쁨을 모른 채 살아갑니다. 복음이 아닌 종교생활을 하며, 많은 문제를 안고 또 일으키며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겠습니다. 이 비유를 정확히 이해하려면 먼저 전문맥인 19장에 등장하는 예수님의 두 개의 대화를 이해해야 합니다. 첫째는 부자 청년과의 대화이고 둘째는 제자들과의 대화입니다. 두 개의 대화와 이 비유 모두 주제는 영생입니다. 곧 ‘인간이 어떻게 영생을 누리는가’ 혹은 ‘어떻게 구원을 받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먼저 부자 청년과의 대화를 살펴봅시다. 그는 처음부터 자신의 관심이 영생임을 밝혔습니다. 16절입니다.
(마 19:16) 어떤 사람이 주께 와서 이르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은 먼저 그에게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고 다음으로 모든 소유를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 주라고 하셨습니다. 그는 계명을 다 지켰다고 답했지만 소유를 팔아 나누어 줄 결심은 하지 못 하고 근심하며 돌아갔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두 가지 요구를 하신 이유는 무엇일까요? 계명을 다 지키면 영생을 얻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그랬다면 부자 청년이 다 지켰다고 자신했을 때 그를 칭찬하고 영생을 약속하셨겠지요. 그럼 소유를 다 팔아 나누어 주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일까요? 그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그 부자 청년이 스스로의 힘으로 영생에 이를 자격을 얻을 수 없음을 깨닫고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은총을 구하기를 기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재물에 대한 집착을 놓을 수 없어 은총을 구하는 대신 예수님을 떠나가 버렸습니다.
3. 제자들과의 대화
제자들과의 대화가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부자 청년을 안타깝게 여기면서 제자들에게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를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고 하셨습니다. 제자들은 깜짝 놀라며 ‘그럼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부자야말로 하나님의 법을 잘 지켜 복을 받은 것이라고 여겼기에 당연히 1순위로 천국에 들어가리라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의 답은 무엇입니까? 26절입니다.
(마 19:26) 예수께서 그들을 보시며 이르시되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구원은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사람은 구원에 이르는 어떤 기여도 할 수 없습니다. 구원은 오직 하나님께서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여전히 이 말씀을 듣고도 이 비밀을 깨닫지 못 했습니다. 여전히 인간의 공이 중요하다고 여기는 제자들을 대표하여 베드로가 묻기를, ‘자신들이 부자 청년과 달리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으니 무엇을 얻겠느냐’고 묻습니다. 실제 베드로는 배와 일꾼과 가족을 버려둔 채 예수님을 전적으로 따랐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은 무엇을 약속하십니까? 두 가지입니다. 영광의 직분과 영원한 생명입니다. 28절입니다.
(마 19:28)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세상이 새롭게 되어 인자가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르는 너희도 열두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
하나님 나라에서 예수님 곁에 앉아 다스리는 영광의 직분입니다. 또 29절입니다.
(마 19:29) “또 내 이름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부모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마다 여러 배를 받고 또 영생을 상속하리라.”
주님을 전심으로 따른 이들은 넘치는 상과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이 약속이 여러분 모두의 것이기를 축복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이 착각해서는 안 됩니다. 30절에서 착각을 경고하십니다.
(마 19:30) “그러나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되고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많으니라.”
이게 무슨 말씀입니까? 제자들의 착각은 이런 어처구니 없는 결과를 불러온다는 말씀입니다. 그 착각을 바로잡기 위해 드디어 오늘 본문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4. 일꾼들의 불만
1절부터 비유는 천국에 관한 것이라고 명시합니다. 천국은 포도원 주인과 같습니다. 비유의 주인공은 포도원이나 일꾼이 아닌 주인입니다. 곧 이 주인의 행동 혹은 의도를 잘 이해해야 천국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주인은 오전 6시부터 9시, 낮 12시, 오후 3시 그리고 5시까지 하루 종일 다섯 차례나 장터에 나가 일꾼들을 불러 포도원에 들여보내고는 해가 지자 모두에게 일당을 줍니다. 오후 5시에 온 일꾼들이 하루 품삯인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본 오전 6시, 9시에 온 일꾼들은 자신들이 더 받을 줄로 기대했는데 그들도 똑같이 받자 주인을 원망합니다. 한 시간 일한 이와 하루 종일 일한 자신들이 어떻게 똑같이 받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도 이 일꾼들의 불만이 충분히 이해가 되지요? 베드로도 우리들과 똑같이 생각했습니다.
(마 19:27) 이에 베드로가 대답하여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사온대 그런즉 우리가 무엇을 얻으리이까?”
제자들은 다른 이들보다 더 일찍 주님을 만났고 주를 위해 더 많이 수고하고 희생했으니 주님께 더 큰 상을 받아야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너무나 완벽한 논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무엇이라 하셨습니까? 바로 포도원 주인의 행동과 말을 통해 알려주십니다.
5. 주인의 의도
주인은 도대체 오후 3시, 5시에 왜 일꾼을 부르러 나간 것일까요? 5시에 부른 일꾼은 고작 1-2시간 밖에 일하지 못 합니다. 포도원 수익을 고려했다면 그런 일꾼을 부르지 말아야 하고, 그저 조금이라도 노동력이 더 필요했다면 굳이 하루치 임금을 다 주어서 다른 일꾼들의 불만을 살 이유가 없습니다. 그런데다 5시에 부른 일꾼의 상태를 보십시오.
(마 20:6) 제십일시(오후 5시)에도 나가 보니 서 있는 사람들이 또 있는지라. 이르되 “너희는 어찌하여 종일토록 놀고 여기 서 있느냐?” (마 20:7) 이르되 “우리를 품꾼으로 쓰는 이가 없음이니이다.” 이르되 “너희도 포도원에 들어가라.” 하니라.
그들은 아무도 품꾼으로 쓰지 않습니다. 몸이 약하거나 미숙하거나 나이가 너무 들었거나 무언가 일꾼으로서 결격사유가 있다는 말이 아닙니까? 게다가 그들은 주인이 오후 3시에 나갔을 때 없었습니다. 3시 이후에 장터에 나왔다는 말이 아닙니까? 일할 의지가 있었던 것일까요? 사실상 오전 6시에 나온 일꾼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일할 의지조차 의심스러운 사람들입니다. 여기서 주인의 진짜 의도가 드러납니다. 주인은 포도원에 수익을 낼 노동력이 필요했던 것이 아닙니다. 주인의 의도는 모든 일꾼들이 생존에 필요한 품삯을 받아 집에 돌아가게 만드는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일용직 노동자의 삶은 힘들지만 모든 고대사회처럼 1세기 유대사회의 노동자들의 삶은 무척 힘들었습니다. 하루 두 끼를 오늘날 기준으로 보면 빈약하기 그지없는 식사, 얇은 삐따빵과 야채로 떼운 그들은 문자 그대로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았습니다. 그들이 품삯을 받아 집에 돌아가지 못 하면 그날 밤 아내와 아이들이 배를 곪은 채 잠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날이 잦아서 대부분의 서민들이 만성적 영양실조상태로 살았습니다. 당연히 면역력이 약해 병치례가 잦았고 평균수명도 현저히 짧았습니다. 그들의 삶을 너무나 잘 아는 포도원 주인은 그 일꾼들과 가족들을 불쌍히 여겼습니다. 주인은 건강한 일꾼이든, 병든 일꾼이든, 부지런한 일꾼이든, 그렇지 못 한 일꾼이든, 재주가 있는 일꾼이든, 미숙한 일꾼이든 모두가 별다를 바 없는 형편임을 잘 알았고 그들 모두에게 어떻게든 품삯을 주어서 가족들까지 배를 곪지 않고 잠들게 하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새벽부터 나가 늦은 오후까지 일꾼을 불러 모은 것입니다.
6. 놀라운 은혜
이 비유의 교훈은 무엇입니까? 우리가 약속받은 하나님 나라의 영생과 상과 직분은 모두 우리 수고의 대가가 아니라는 점입니다. 모두가 죄와 악의 노예로 멸망받을 수밖에 없는 죄인을 한 영혼이라도 더 구원하려는 하나님이 거저 주시는 은혜요, 무한한 자비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긍휼히 여겨서 자녀 삼으신 것이지, 능력이나 수고나 헌신이 남보다 뛰어나서가 아닙니다. 이 사실을 모르기에 우리는 끊임없이 우리 자신을 다른 이와 비교하면 능력이 낫고 수고를 더 했고 헌신이 더 많으니 그 대가로 더 큰 상, 더 큰 복, 더 큰 선물을 받아야 한다고 여깁니다. 이런 논리는 우리 수고와 비교해 받는 상이 이해할 수 없이 크다는 사실로도 금방 부정됩니다.
이는 마치 홈리스들이 자신의 물건을 주고 집과 차와 직장을 선물받은 것과 같습니다. 그들이 준 물건이 얼마나 많든 재벌회장에게는 아무 필요가 없습니다. 골판지만 주었든 쇼핑카트와 텐트까지 주었든 회장은 그저 그들의 자존심이 상하지 않게 하려고 받은 것 뿐입니다. 그 모두를 더하든 그들이 받은 선물에 어찌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이 진리를 깊이 깨닫는 만큼 더 복음적 삶을 살 수 있습니다. 현재 우리 삶이 얼마나 큰 선물인지, 우리가 받은 소망이 얼마나 놀라운 은총인지를 깨닫고 감사와 겸손과 헌신으로 살 힘을 얻습니다. 그제서야 그 은혜의 능력으로 우리는 계명도 지키고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계명을 지켰다해도 그것은 하나님의 은혜요, 모든 것을 버리고 주님을 쫓았다해도 그리스도의 은혜입니다. 예수님의 말씀 그대로입니다.
(마 19:26) … “사람으로는 할 수 없으나 하나님으로서는 다 하실 수 있느니라.”
여러분은 오늘 사람의 힘으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은총으로 살아가십니까? 하나님의 은총의 힘으로 살아가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