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 16:9-20/도약하는 선교적 교회
230101 신년주일/표어
1. 교회를 이끄는 것
50개 언어로 번역되어 3천 만부가 팔린 세계적 베스트셀러 ‘목적이 이끄는 삶’의 저자 릭 워렌 목사는 다른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에서 교회를 이끄는 동력이 무엇이냐에 따라 여러 유형의 교회가 있다고 설명합니다. 사람, 전통, 재정, 프로그램, 건물 등이 이끄는 교회가 그것입니다. 사람이 이끄는 교회는 카리스마 있는 목회자나 교회를 설립한 설립자, 그 가족, 교인들이 주도권을 가지고 이끄는 교회를 말합니다. 전통이 이끄는 교회는 ‘과거 우리 교회는 이러이러했었다’는 전통에 대한 미련에 갇혀 있는 교회를 말합니다. 재정이 이끄는 교회는 재정을 더 확보하는 것이 목적이 되거나 혹은 재정규모에 맞추는 사역이 제한되는 경우를 가리킵니다. 건물이 이끄는 교회는 교회건축이 목적이 되거나 건물관리에 에너지를 다 소모하는 교회를 가리킵니다. 어느 경우든 성경적이지 않다고 그는 꼬집습니다. 그럼 성경적인 교회은 어떠할까요? 그의 책제목처럼 성경이 제시하는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럼 성경이 제시하는 교회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우리 교회는 무엇이 이끄는 교회입니까?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2. 목적 없는 인생
오늘 본문은 마가복음의 마지막 단락으로 부활하신 예수님이 승천하시기까지의 행적을 요약합니다. 본문엔 먼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 했던 제자들의 모습이 차례로 그려집니다. 이 제자들을 묘사한 대목은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소개되었던 다소 긴 에피소드를 아주 짧게 요약해 두었습니다. 차례로 막달라 마리아가 전한 부활소식을 들은 제자들,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 숨어서 음식먹던 제자들이 그들입니다. 그들은 모두 목적을 잃어버린 무리였습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서 로마를 몰아내고 승리하실 예수님’을 좇다가 기대와는 달리 십자가에서 달리시고 묻히시자 그만 목적을 잃고 크게 상심하고 방황하였습니다. 그들의 방황하는 모습을 본문은 이렇게 보여줍니다.
(막 16:10) 마리아가 가서 예수와 함께 하던 사람들이 슬퍼하며 울고 있는 중에 이 일을 알리매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막 16:14) 그 후에 열한 제자가 음식 먹을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나타나사 …
그들은 슬퍼서 울고, 예루살렘을 떠나 예전의 삶으로 돌아가고, 두려움에 문을 잠그고 숨어서 배를 채우는데 급급합니다. 모두가 목적을 잃고 방황하는 모습입니다. 이런 모습을 마가복음은 한마디로 불신앙이라고 단언합니다.
(막 16:11)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3)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막 16:14) … 그들의 믿음 없는 것과 마음이 완악한 것을 꾸짖으시니 이는 자기가 살아난 것을 본 자들의 말을 믿지 아니함일러라.
즉 목적없음과 불신앙은 같은 말입니다. 삶의 목적을 발견하지 못 한 이는 육체의 욕구를 채우려 아둥바둥하는 삶에서 한걸음도 더 나가지 못 하고, 헛된 욕망을 구하는 삶을 벗어나지 못 하며, 근심, 걱정, 두려움의 육체의 짐을 벗을 길이 없습니다. 이런 삶은 곧 하나님을 믿지 못 하는 불신앙의 삶에 다름 아닙니다.
3. 목적을 주시는 예수님
그런 목적없는 불신앙에 이끌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오셔서 예수님은 목적을 주십니다.
(막 16:15) 또 이르시되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
제자들에게는 주님이 의도하신 목적이 있었습니다. 이 목적을 염두에 두고 예수님은 애초에 그들을 부르셨습니다. 그것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온 천하에 전하여 생명을 퍼뜨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목적은 애초부터 하나님이 인류를 창조하실 때 주신 목적과 다르지 않습니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하나님의 생명을 누리는 것이 애초 인류의 목적이었다면, 이 세상이 죄와 악으로 병들고 훼손된 후 인류의 사명은 하나님이 세상을 새롭게 창조하시고 생명을 회복시키신다는 사실을 전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새로운 창조가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사실이야말로 제자들이 전해야 하는 사명입니다.
이 사명이 꼭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까? 다른 목적을 가지고 살 수도 있지 않나요? 물론 가능하지만 그 목적의 가치가 비교할 수 없는 것입니다. 2004년 12월 남아시아에서 일어난 지진과 쓰나미로 35만 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170만 명이 집과 모든 것을 잃고 난민으로 전락하였습니다. 그 비참함은 이루 말로 할 수가 없습니다. 여러분이 당시 인도네시아에 휴가를 갔다가 우연히 1주일 전에 이 재앙을 미리 알게 되었다고 가정을 해봅시다. 여러분은 무엇을 하시겠습니까? 일단 살아야 하니까 높은 산으로 피한다, 쓰나미 전날까지 해변에서 즐기다가 피한다, 1주일 동안 쇼핑을 즐긴다… 제정신이 박힌 사람이라면 할 수 있는 한 온 힘을 다해 사람들에게 재앙을 알리지 않겠습니까? 관공서에 알리고, 지인들을 피신시키고, 아는 사람, 모르는 사람까지 할 수 있는 한 모든 이에게 산으로 피하도록 소리질러 알리지 않겠습니까? 바로 이것이 우리 삶의 목적이 선교인 이유입니다. 16절에서 예수님은 이 사명을 주신 이유를 설명하십니다.
(막 16:16) 믿고 세례를 받는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람은 정죄를 받으리라.
부활하신 주님의 대속의 은혜와 부활의 선물을 믿지 않은 인생은 죄를 해결할 길이 없습니다. 심판의 쓰나미를 피할 방법이 없는 그들은 모든 죄값을 다 짊어지고 영원한 정죄를 받습니다. 곧 멸망입니다. 이 사실을 깨달은 이들에게 주시는 사명이 온 천하에 다니며 외치는 것입니다. ‘심판의 쓰나미가 몰려온다, 십자가로 달려가 용서를 구하라!’ 이것이 성도의 목적입니다.
4. 목적을 발견한 제자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고 이 목적을 발견한 사람들은 이전의 삶으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그들 삶에는 목적을 발견한 인생의 증거가 나타납니다. 17절입니다.
(막 16:17) 믿는 자들에게는 이런 표적이 따르리니 곧 그들이 내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내며 새 방언을 말하며 (막 16:18) 뱀을 집어올리며 무슨 독을 마실지라도 해를 받지 아니하며 병든 사람에게 손을 얹은즉 나으리라.” 하시더라.
믿는 자, 목적을 발견한 성도, 부르심에 응답한 제자의 삶은 더 이상 절망하고 세상을 좇고 욕망을 좇지 않습니다. 그들의 삶에는 표적 곧 성령이 역사하시는 증거가 나타납니다. 그것은 세상에서 불의를 몰아내고 소망과 축복을 선포하며 마귀의 공격에도 쓰러지지 않고 세상을 치유하는 능력입니다. 이런 능력이 나타나는 이유는 주 예수님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시기 때문입니다.
(막 16:20) 제자들이 나가 두루 전파할새 주께서 함께 역사하사 그 따르는 표적으로 말씀을 확실히 증언하시니라.
5. 목적이 이끄는 선교적 교회
오늘날 교회의 모습이 이와 같아야 합니다. 선교의 목적을 발견한 교회는 더 이상 세상을 좇고 욕망을 좇다가 절망하지 않습니다. 왜 현대교회에 문제가 생깁니까? 선교의 목적을 잃어버린 채 세상을 좇고 욕망을 좇기 때문입니다.
성령님으로 인도를 받으며 온 천하에 다니며 복음을 전파하는 공동체입니다. 그럴 때 성령의 열매와 능력이 나타납니다. 우리 교회도 이 목적을 발견하고 순종하여 모든 교인이 선교에 전념하여야 합니다. 그럴 때 교회는 세상을 좇거나 욕망을 좇지 않고 절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교회가 선교를 목적으로 삼고 전념한다는 것은 무슨 의미입니까?
첫째, 모든 성도가 선교사란 의미입니다. 아직도 많은 이들이 생각하기를, 선교란 목회자나 선교사나 선교부원들의 전유물이고, 교인들은 그들을 열심히 응원하고 후원하는 것이라 여깁니다. 당연히 아닙니다. 예수님의 명령은 일부 교인들에게 하신 것이 아닙니다. 모든 제자들에게 하셨습니다. 모든 성도들이 곧 선교의 사명을 받았습니다. 모두가 자신을 선교사로 여겨야 합니다.
둘째, 모든 삶의 영역이 선교지란 의미입니다. 나는 선교지에 나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선교사인가?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선교지입니다. 가정과 일터, 지역사회, 이 시대와 세상이 선교지입니다. 가정에도 예수님을 모르는 가족이 있지요? 선교대상이며 선교지가 아닙니까? 일터에도 하나님의 뜻이 무시되고 있지 않습니까? 선교지이며 동료들은 선교대상이 아닙니까? 이 나라, 시대, 세상에 하나님의 통치가 외면받는 곳이 얼마나 많습니까? 모두 선교지입니다. 우리 삶의 모든 영역이 선교대상이며 선교지이며 우리는 거기에 파송받은 선교사입니다.
셋째, 모든 사역이 곧 선교라는 의미입니다. 교회의 사역 중 일부로 선교가 있다고 여깁니다. 실제는 우리의 모든 사역이 선교를 지향하는 선교적 사역이어야 합니다. 예배도 선교적이어야 하고 봉사도 선교적이어야 하고 양육도 선교적이어야 합니다. 어떤 사역이든 온 세상에 복음을 선포하려는 목적에 수렴됨이 마땅하다는 뜻입니다.
6. 천국을 누리고 세우고 전하는 교회
우리 교회의 비전은 천국을 누리고 세우고 전하는 교회입니다. 하나님의 다스림을 우리 삶에서 먼저 누리고 우리 삶 곳곳에 순종으로 세우고 우리 삶을 너머 이웃에게도 전하는 것입니다. 곧 선교적 교회의 비전과 다르지 않습니다. 교회가 50주년을 맞은 것은 놀라운 은혜입니다. 그러나 이제 새 해가 밝았습니다. 이제는 50주년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해야 하고, 하나님께 순종하는 교회임을 자랑해야 합니다. 이를 자랑하지 못 한다면 50주년이 무슨 소용입니까? 아니, 50주년을 맞고도 순종을 자랑하지 못 하는 교회라면 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일 것입니까!
우리는 왜 천국을 전해야 하며 왜 선교적 교회로 도약해야 합니까? 우리를 부르신 하나님의 명령이기 때문이요, 이 목적에 순종하는 것이 우리의 절망과 방황을 끝낼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2023년의 뉴저지장로교회는 부르심에 응답하여 천국을 전하는 교회, 선교적 교회로 도약하였음을 자랑하는 한 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