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115 우리가 모이는 이유 / 행 2:37-47

20230115 우리가 모이는 이유 / 행 2:37-47

행 2:37-47/우리가 모이는 이유

230115 주일설교 소그룹
1. 소그룹의 가치
여러분, 팬데믹으로 가정에 여러 면으로 얼마나 타격이 컸습니까? 인류 전체가 이처럼 전지구적 재앙을 만난 적이 또 있었던가 싶습니다. 팬데믹으로 교회가 입은 가장 큰 타격은 무엇일까요? 제 판단에는 소그룹사역 곧 구역모임입니다. 한국의 목회데이터연구소 지용근 대표에 의하면, 팬데믹 중 대부분의 교회가 온라인으로라도 예배를 이어갔지만 소그룹사역은 70%의 교회가 중단하였습니다. 팬데믹 이후 대부분 교회의 예배가 6-70% 수준으로 예배인원은 회복했지만 소그룹사역은 이 정도로 회복하지 못 했다고 합니다. 이런 추세가 교회의 선교사역에 큰 장애가 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소그룹사역이 주는 엄청난 역동성을 교회가 잃는다는 의미이기 때문입니다. 같은 연구소의 자료에 의하면 소그룹참여자의 사역참여율이 비참여자에 비해 월등히 높기 때문입니다. 이같은 격차는 전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소그룹참여자는 비참여자에 비해 전도사역에 참여하는 비율이 5배나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소그룹 사역의 위축은 곧 교회의 전반적 사역 특히 전도사역의 위축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이는 통계로도 드러납니다. 코로나 이후 각 교회의 새신자등록비율은 이전에 비해 같은 기간 약 16% 밖에 되지 않습니다. 코로나 이전에 100명이 등록할 기간에 이후에는 16명 밖에 등록하지 않았다는 뜻입니다.
이 시대 교회가 주님이 주신 선교사명, 온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는 사명을 감당코자 한다면 이 소그룹사역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뜻입니다. 우리 교회 역시 팬데믹 중 구역모임이 크게 위축되었습니다. 2023년 우리 교회가 선교적 교회로 체질을 변화시키고자 한다면 건강한 구역모임의 회복 없이는 불가능합니다. 지난 화요일 구역일꾼모임은 팬데믹 이후 처음으로 현장에 모여 활발한 토론을 하였습니다. 건설적인 제안이 많이 나왔고 일꾼들의 마음을 다잡는 은혜로운 시간이었습니다. 앞으로 매월 예전처럼 현장에 모여 일꾼모임을 하겠습니다. 기존의 지역별, 연령별 구역모임 외에도 사역별 구역, 학부모 구역, 양육구역 등 다양한 소그룹모임을 시도코자 합니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소그룹을 회복하기 위해 무엇보다 우리 모든 성도들이 구역모임을 왜 하는지, 어떻게 하는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그래서 오늘은 성경에서 소그룹모임이 처음으로 시작된 장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 소그룹의 탄생
오늘 본문은 오순절성령세례를 받은 사도들이 복음전파를 시작하자 3천 명이 세례를 받고 최초의 교회가 탄생하는 장면입니다. 소그룹은 교회가 태어나는 그 순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46절을 보십시오.
(행 2:46) 날마다 마음을 같이하여 성전에 모이기를 힘쓰고 집에서 떡을 떼며 기쁨과 순전한 마음으로 음식을 먹고
3천 명의 회중은 안식일에는 성전에 모여 사도들의 설교를 들었습니다. 그러나 다른 날에는 집에서 모였습니다. 문제는 3천 명이 누구 집에 모였겠느냐 입니다. 당연히 3천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집은 없었고 오늘날 우리 집보다 훨씬 작은 집에서 살았던 당시 사람들은 소그룹으로 나누어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2-30명을 수용할 큰 집을 가진 부자가 많지는 않았을테니 평균 한 집에 10명 씩 모였다고 가정하면 300채의 집에 나누어 300개의 소그룹이 생긴 셈입니다.
이처럼 소그룹은 교회가 탄생하는 순간부터 필연적으로 시작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건강하고 성경적인 교회, 신앙에 소그룹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뜻입니다. 오늘날 현대인은 예배는 드리되 소그룹은 원치 않는 예가 많습니다. 대체로 한인교회 소그룹모임 참여비율은 예배출석인원의 40% 선입니다. 열 명 중 6명은 예배만 드리고 소그룹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앞선 통계에서 보았지만 소그룹비참여자의 사역참여비율은 현저히 떨어집니다. 건강한 신앙생활이라 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26년간 스타무당으로 살다가 회심한 심선미 성도의 간증을 최근 들었습니다. 처음 회심하고 교회에 나갔다가 깜짝 놀라고 당황해서 급기야 교회를 옮기기까지 했습니다. 자신은 목숨을 걸고 귀신을 섬기다가 예수님을 만나 역시 목숨을 걸고 귀신을 버리고 하나님을 섬기러 교회에 나와는데, 정작 먼저 믿은 교인들은 목숨은커녕 아무 것도 걸지않은 채 슬렁슬렁 교회를 다니더라는 것입니다. 자신이 과거에 그렇게 귀신을 섬겼다면 벌써 귀신의 노여움을 사 저주를 받아 죽었을텐데 왜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을 이렇게 무서워하지 않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더 알고나니 자신이 섬기던 귀신과 달리 하나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에 귀신처럼 저주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지만 그렇다해도 이런 큰 사랑을 받았다면 하나님을 그렇게 섬겨서는 안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녀의 간증을 듣다보니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악용하는 악한 이들이 아닌가 하는 두려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예배는 좋고 은혜로운 찬양과 위로의 말씀도 좋지만 시간과 에너지가 들어가고 갈등과 수고를 피할 수 없는 소그룹은 피하고 싶다면 자신의 신앙이 과연 건강한지, 주님이 어떻게 여기실지 돌아볼 필요가 있습니다.
3. 소그룹의 목적
이렇게 탄생한 소그룹이 존재하는 목적은 무엇입니까? 먼저 소그룹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를 보십시오. 41절입니다.
(행 2:40) 또 여러 말로 확증하며 권하여 이르되 “너희가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하니 (행 2:41) 그 말을 받은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매 이 날에 신도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복음전파의 결과 세례받은 이들이 모여 공동체를 이루어 교회가 시작되고 그들로 또한 소그룹이 시작되었습니다. 또한 소그룹의 결과를 보십시오. 47절입니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그 결과는 구원받는 이들이 날마다 늘어나는 것입니다. 즉 소그룹은 태생부터 복음전파의 결과로 태어났고 복음전파를 열매로 맺습니다. 소그룹은 복음전파를 그 목적으로 합니다. 이 목적을 잃어버리면 소그룹이 방황합니다. 많은 소그룹이 그래서 모임의 의미를 찾지 못 한 채 위축되거나 생명력을 없는 모임을 이어갈 뿐입니다.
재미있는 예화가 있습니다. 어린 낙타가 엄마에게 묻습니다. 엄마, 왜 우리는 등에 혹이 있어? 응, 이건 사막을 건널 때 물을 저장하라고 창조주께서 만들어 주신 거란다. 그럼 우리 발굽은 왜 넓고 평평해? 응, 그건 사막을 건널 때 발이 빠지지 말라고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란다. 그럼 우리 눈썹은 왜 이렇게 길어? 응, 그건 사막의 모래바람으로부터 눈을 안전하게 지키라고 창조주께서 그렇게 만드신 거란다. 아, 그렇구나… 그런데 우린 동물원에서 뭐하는 거야?
오늘날 그리스도인들이 동물원에 갇힌 낙타와 같지 않습니까? 우리는 마귀의 악한 화전을 물리치고 성령의 능력으로 복음을 전파하여 생명을 구원하는 천국의 군사로 창조되고 부름받았는데 안전지대에서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는 것은 아닌가요! 우리의 소그룹은 복음전파의 목적은 잃어버린 채 그저 외로움과 심심함을 달래주는 친교모임으로 전락해 버리지는 않았는지요? 성령의 능력은 복음전파를 위해 주신 것이고 복음을 전파할 때 드러나는 것입니다. 사막을 건너지 않을 때는 아무 필요가 없는 낙타의 능력처럼 복음전파의 목적을 잃어버린 모임에서는 성령의 능력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4. 소그룹의 요소
그럼 복음전파로 탄생하고 복음전파를 위해 존재하는 소그룹에서는 어떤 활동이 일어납니까? 본문 42절입니다.
(행 2:42) 그들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서로 교제하고 떡을 떼며 오로지 기도하기를 힘쓰니라.
4가지 활동이 일어납니다. 첫째는 사도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 가르침은 생명의 복음이며 또한 복음으로 살아가는 법 곧 교훈입니다. 복음과 교훈을 받아야 건강한 공동체가 됩니다. 이 가르침을 받지 않으면 이단으로 빠지거나 생명력을 잃거나 인간의 욕심과 흥미를 좇는 세속적 모임으로 전락합니다. 이는 마치 국가의 법이 있고 학교에 교칙이 있고 하다못해 친목회에도 회칙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사도의 가르침을 떠난 소그룹은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성령의 임재를 경험하지 못 합니다. 우리 교회 구역이 설교를 듣고 성경을 공부하고 적용하는 것으로 모임을 시작하는 이유입니다.
둘째 서로 교제합니다. 이것은 복음과 교훈을 받은 성도들이 서로의 삶을 나누는 관계를 이루는 것을 의미합니다. 복음과 교훈의 이상과 죄와 싸우는 성도의 현실은 큰 간극이 있습니다. 이 간극을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메워가는 힘을 얻는 것이 제자의 삶입니다. 이 제자의 삶에 소그룹 공동체만큼 중요한 것이 없습니다. 진실한 교제는 성도를 강하게 합니다. 전도서는 그래서 이렇게 가르칩니다.
(전 4:12) 한 사람이면 패하겠거니와 두 사람이면 맞설 수 있나니 세 겹 줄은 쉽게 끊어지지 아니하느니라.
셋째 떡을 뗍니다. 이것은 성찬식을 가리키는데 초대교회의 성찬식은 오늘날 교회에서 하는 예식의 일부가 아니라 함께 하는 식사였습니다. 점심, 저녁처럼 성도가 모여서 음식을 나누어 먹을 때 그들은 그것을 주님의 살과 피라고 고백했습니다. 구역에서 음식을 같이 먹는 것은 그러므로 초대교회의 아름다운 본을 따르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당시에는 대부분 가난한 교인들의 음식을 부유한 교인이 섬김으로써 구제와 나눔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식사를 대접하는 것은 귀한 섬김임에 틀림없지만 당시에는 매일매일 끼니를 떼우는 것이 엄청난 숙제였던 때인지라 정말 큰 섬김이요, 나눔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런 필요를 채우려고 마가의 외삼촌이자 사도 바울과 함께 전도여행을 했던 사도 바나바에 대한 이런 기록이 있습니다.
(행 4:37) 바나바가 밭이 있으매 팔아 그 값을 가지고 사도들의 발 앞에 두니라.
넷째 기도하기에 힘씁니다. 사도의 가르침, 교제, 나눔의 목재를 쌓으면 거기 불을 붙이는 것이 기도입니다. 기도는 우리가 헛된 근심, 걱정으로부터 해방되어 하나님 나라를 구하도록 정결케 만들고, 우리가 가진 것 이상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성령님의 기름부음을 받게 만듭니다. 그러므로 소그룹은 부지런히 기도하는데 힘써야 합니다. 기도는 터보엔진과 같습니다. 그 힘을 이용하지 않을 이유가 없습니다. 기도없이는 복음전파의 열매를 맺기 어렵습니다.
이렇게 소그룹이 사도의 가르침을 받아 교제와 나눔과 기도에 힘쓸 때 무슨 일이 일어납니까? 다시한번 47절을 보십시오.
(행 2:47) 하나님을 찬미하며 또 온 백성에게 칭송을 받으니 주께서 구원 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예수님이 교회를 통해 이루시고자 하는 구원역사가 일어납니다. 교회가 팬데믹을 극복하는 것은 바로 이런 성령의 역사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소그룹이 목적을 찾고 역동성을 회복하는 것입니다. 우리 교회 구역에서 일어나야 하는 성령의 역사입니다. 성령의 능력으로 초대교회 소그룹의 생명력과 역동성을 회복하는 모든 구역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