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2 하나님을 보는 법 / 요 14:18-24

20230212 하나님을 보는 법 / 요 14:18-24

요 14:18-24/하나님을 보는 법

230210 주일설교
1. 신비와 연합
1980년대 캘리포니아에서는 소위 빈야드운동이란 기독교신비주의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에너하임 빈야드처지의 존 윔버가 인도한 집회에서 사람들이 몸을 떨거나 뒤로 쓰러지고 웃고 울고 부르짖는 등 신비한 현상이 집중적으로 일어났고 이는 성령의 역사라고 알려졌습니다. 한동안 세계 곳곳으로 퍼져간 빈야드운동은 그러나 점점 비성경적 교리와 현상이 나타나면서 여러 교단으로부터 이단 내지는 사이비로 경계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빈야드운동은 기독교신비주의 운동의 한 형태로 처음도 아니고 마지막도 아닙니다. 초대교회로 거슬러 올라가는 기독교신비주의의 뿌리는 깊습니다.
기독교에는 분명 놀라운 신비가 있습니다. 신비한 진리가 있고 신비한 사건도 있으며 이는 하나님의 은총입니다. 복음의 핵심인 죄사함의 죽으심보다 신비한 진리가 어디 있으며 부활과 승천보다 신비한 사건이 어디 있습니까? 그런데 성령이 주관하시는 이 신비를 인간이 주관하려고 추구하면 소위 신비주의가 됩니다. 신비주의는 비성경적인 길로 빠질 위험이 아주 큽니다. 이는 마치 격렬한 운동 후 뇌에서 도파민이 분비되면서 느끼는 쾌감을 운동하지 않을 때도 느끼려는 것과 유사합니다. 어떻게 하면 될까요? 가장 빨리 엄청난 양의 도파민이 쏟아지듯 분비시키는 방식이 마약입니다. 그 결과는 중독과 멸망입니다. 성령님께서 주도하시는 신비한 경험을 인간이 주도하고 추구하려는 결과도 이와 유사합니다.
기독교인들이 신비한 체험을 추구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른 모든 종교인과 마찬가지로 신과의 더 깊은 연합을 원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갈망이 오순절교단이 성장하는 배경입니다. 오순절교단은 열광적인 찬양, 기도, 예배로 유명합니다. 방언이나 신비한 은사체험도 강조합니다. 오순절교단의 영향으로 전통적으로 엄숙한 분위기가 특징인 장로교단도 열광적인 열린예배, 찬양예배를 드리는 곳이 많습니다. 열광적 예배는 분명 하나님을 경험하는 매우 중요한 방식입니다. 구약에는 찬양이나 기도 중 하나님과 교감하는 선지자들의 예가 여럿 등장하고 신약에서도 성령세례는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찬양과 기도에 전념할 때 일어나고 사도들은 기도시간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그러나 이런 열광적 분위기나 신비한 체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성경적인 방식은 아닙니다. 사울왕도 신비체험하고 예언도 하지만 실패한 왕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산상설교에서 당신의 이름으로 선지자가 되고 귀신을 내쫓고 권능을 행하는 이들에게 오히려 저주를 선언하기도 하십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더 깊이 만나기 위해 열광적 예배나 신비체험이 필요하다고 가르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능력이나 체험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도구로 쓰이는 것을 경계하셨습니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하나님을 만나고 연합할 수 있다고 하셨습니까? 오늘 본문이 바로 그 답입니다.
2. 하나님을 만나려면
요한복음 14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의 승천과 재림의 약속을 주시며 그 때를 기다리며 제자들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설명합니다. 18절은 재림의 약속입니다.
(요 14:18)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아니하고 너희에게로 오리라.”
얼마나 큰 은혜와 소망의 약속입니까? 현대 무신론은 우리가 고아처럼 이 우주에 아무 목적도, 의미도 없이 우연히 출현했고 죽음으로 다시 영원히 소멸된다고 주장합니다. 우리의 기억도, 수고도, 삶도 다 아무 의미없이 소멸됩니다. 옳고 그름도, 의도 불의도 의미없이 소멸될 환상에 불과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우리가 결코 소멸되지 않을 것이며 다시 오셔서 하나님의 나라로 영접하시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우리의 삶도, 기억도, 관계도, 헌신도 모두 소멸되지 않고 영원과 연결되어 영생을 풍요롭게 만들 재료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창조주이신 하나님 아버지의 자녀요, 고아가 아닙니다. 물론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우리 눈에 보이지 않으시지만 그렇다고 우리가 고아처럼 살아가지는 않습니다. 세상이 보지 못 하는 그 주님을 성도들은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요 14:19) 조금 있으면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주님은 승천하셔서 육체로 보지는 못 합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성령으로 예수님과 연합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우편에 살아계십니다. 성도들도 성령으로 거듭나 영으로 살아갑니다. 그러므로 제자들은 예수님을 영으로 볼 수 있습니다. 무슨 뜻인지 조금 더 보십시다.
(요 14:20) 그 날에는 내가 아버지 안에, 너희가 내 안에, 내가 너희 안에 있는 것을 너희가 알리라.
예수님이 하나님 안에, 우리가 예수님 안에 또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이것이 성도가 하나님과 참으로 연합하는 경험입니다. 이런 경험이 어떻게 일어납니까? 바로 다음 절이 명쾌한 답입니다.
(요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예수님의 계명이 무엇입니까? 너무나 명확해서 다르게 해석할 여지가 없습니다.
(요 13:34)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요 15:12)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예수님의 계명대로 서로 사랑할 때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도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예수님이 당신을 우리에게 나타내시고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서로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보고 하나님과 연합합니다.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 이런 완전한 경험을 하는 다른 방법은 없습니다. 서로 사랑하심으로 하나님을 보시기를 축복합니다.
3. 서로 사랑하라 
지난 주간에 노회원들과 선교지탐방을 다녀왔습니다. 쿠바의 이범찬 선교사님의 안내를 받으며 쿠바의 상황을 듣고 현지교회를 방문하고 목회자들을 만나는 은혜로운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선교사님의 간증도 참 인상적이었습니다. 밀워키에서 이민교회 목회를 하던 중 미국의 한 선교단체와 함께 쿠바를 방문했습니다. 선교단체회원들이 아침을 먹는데 잘 먹어야 선교도 힘있게 한다며 얼마나 많이 싸왔는지 정말 맛있고 배부르게 먹었습니다. 그런데 여러 교회가 연합한 단체이다보니 어떻게 선교해야 하는지 이견이 분분해서 잘 먹고도 마음이 편치 않습니다. 다음 날은 협력하는 현지 신학생들과 아침을 먹는데 빵 하나 커피 하나가 전부더랍니다. ‘아이고, 젊은이들이 이걸 먹고 어떻게 선교를 돕겠나’, 걱정이 되는데 그들은 빵을 들고 얼마나 감사하며 맛있게 먹는지 또 얼마나 뜨겁게 기도하고 서로를 좋아하고 기쁘게 협력하는지 ‘아, 여기가 천국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부터 쿠바를 위해 기도하고 그 신학생들을 생각하노라면 자꾸 마음이 설레고 기뻐서 주님께 쿠바로 부르시는 것인지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소명을 깨닫고 목회를 접고 선교사로 쿠바로 건너왔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풍요롭고 안전하고 편안한 곳이 천국이 아닌가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서로 사랑하는 그 곳이 천국이요, 그 곳에서 제자들을 만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우리가 진정 예수님을 보고 하나님과 연합하고 천국을 경험하려면 서로 사랑하는 것 외에 다른 길은 없습니다. 사랑 없이 하는 신앙고백, 헌신, 봉사, 충성은 스스로를 속이는 것일 뿐입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는 이는 예수님도 사랑하지 않습니다. 당연히 예수님을 보지 못 합니다. 하나님과 연합하지도 못 합니다. 그들이 섬기는 것은 우상일 뿐입니다. 마태복음 7장에서 예수님은 당신을 주여, 주여 부르고 기적까지 행하는 이들을 향해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셨습니다.
(마 7:23) 그때에 내가 저희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하지만 악한 이들을 어떻게 사랑합니까?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하고 박해자를 위해 기도하라고 하셨고 사도 바울은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고 하였고 사도 베드로는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고 하였습니다. 악한 이조차 사랑하고 복을 빌 때 하나님은 우리와 함께 거하십니다. 악을 악으로 갚으면 하나님과의 연합이 끊어집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 합니다. 선한 이든, 악한 이든 우리는 그러므로 하나님 때문에 사랑하고 축복하는 것이 마땅합니다. 사랑하는 이만이 하나님을 보기 때문입니다.
4. 최고의 신비
이것은 세상이 하나님을 보지 못 하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22절에서 가롯이 아닌 유다가 질문합니다.
(요 14:22) 가룟인 아닌 유다가 가로되 “주여 어찌하여 자기를 우리에게는 나타내시고 세상에게는 아니하려 하시나이까?”
이런 질문은 초대교회가 받았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도들과 500여 명의 제자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는 자들이었습니다. ‘왜 부활한 예수를 당신들만 보았는가? 대제사장들과 빌리도와 로마 군병들이 보았다면 그들이 다 회개하고 믿지 않았겠나? 제자들만 부활한 예수를 봤다는 사실은 예수가 진짜 부활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아니냐?’ 비슷한 질문을 오늘 기독교인들도 받습니다. 우리는 기도가 응답되면 하나님이 살아계신다고 찬양하지만 믿지 않는 이들은 우연일 뿐이지, 신이 존재한다는 증거로 보기 어렵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부활의 주님을 보지 못 하고 살아계신 증거를 발견하지 못 하는 이유는 그들이 믿지 않으려는 마음 때문이라고 이미 지난 주에 부자와나사로 비유를 인용하여 설명드렸습니다. 지옥에 떨어진 부자가 ”자신의 형제들을 구원하도록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려서 보내달라고 아브라함에게 간청하자 아브라함은 그들에게 ‘성경을 주셨으니 읽고 믿을 수 있다’고 답합니다. 부자가 다시 ‘그들은 성경을 읽어서는 믿지 않을테고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타나면 놀라서 믿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성경을 읽고 믿지 않는 이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서 나타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고 답합니다.
(눅 16:31) 가로되 “모세와 선지자들(성경)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찌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하였다 하시니라.
바로 이것이 예수님의 부활이 믿는 자들에게만 목격된 이유입니다. 오늘날도 믿는 자들만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이유입니다. 부활의 주님을 보는 그 믿는 자들이 누구일까요? 바로 예수님의 말씀을 따라 서로 사랑하는 자들입니다.
(요 14:23)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예수님을 사랑해서 그 말씀대로 서로 사랑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예수님이 함께 거하시는 연합을 경험합니다. 서로 사랑하지 않으면 예수님을 보지도 못 하고 알지도 못 합니다.
(요 14:24)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의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하나님을 보려고 더 열광적인 예배를 찾아다닐 이유가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려고 더 신비한 영적 경험을 찾아다닐 필요가 없습니다. 오직 우리는 서로 사랑해야 합니다. 원수도 사랑하고 축복해야 합니다. 악하고 이기적인 인간이 서로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신비이요, 원수마저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하나님 체험입니다. 이런 신비와 연합을 통해 예수님이 우리 안에 거하십니다. 하나님이 당신을 드러내시고 보여주십니다.
우리는 사랑을 택하여 예수님과 동거할 수 있습니다. 미움을 택하여 마귀과 연합할 수도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예수님을 보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동거하고 계십니까? 하나님과 함께 거하여 영원한 나라까지 인도함 받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