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9 세상에는 없는 평화 / 요 14:25-31

20230219 세상에는 없는 평화 / 요 14:25-31

요 14:25-31/세상에는 없는 평화

230219 주일설교
1. 마음의 감기
이런 상상을 해보세요. 힘든 생업에서 벗어나서 원하는 여행지를 어디든 가서 맛있는 것을 먹고 사람들을 만나고 신나게 놀고 오는데 여러분에게 엄청난 돈까지 줍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동경하는 삶일 것입니다. 이런 삶은 산 사람을 소개합니다. 미국의 백종원이라 할 만한 앤서니 보데인이 바로 그입니다. 유명쉐프, 베스트셀러 작가, 여행작가, 두 번의 에미상을 수상한 CNN의 스타방송인인 그를 수많은 사람이 롤모델로 삼았습니다. 남부러울 것 하나 없을 정도로 성공한 그는 그러나 지난 2018년 6월 8일 여행 중이던 프랑스의 한 호텔에서 사망한 채 발견되어 큰 충격을 주었습니다. 사인은 우울증으로 인한 자살입니다. 이런 사람이 뭐가 아쉬워 우울증을 앓을까 싶지만 성공한 사람이라고 예외가 아닙니다. 미국의 CEO들이 일반사원에 비해 우울증을 앓을 확율이 5배가 높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미국 보건복지부는 팬데믹 이후 미국성인 다섯 명 중 두 명이 불안감과 우울감으로 고통받는다고 발표했습니다. 세계보건기구(WHO)도 팬데믹으로 불안증과 우울증 환자가 세계적으로 이전 해에 비해 25% 늘어났다고 발표했습니다. 건강상실의 두려움, 경제적 어려움으로 인한 불안, 고립으로 인한 불안은 노인을 더 빨리 쇠약하게 만들고 젊은이들도조차 지치고 낙심하게 만듭니다.
우울감은 마음의 감기라고 합니다. 감기를 방치하면 폐렴이 되듯 우울감을 방치하면 우울증이 됩니다. 과로하면 몸삼감기에 걸리듯 마음이 과로하면 우울감을 느낍니다. 병을 고치려면 약을 먹을 뿐 아니라 음식을 조절하고 생활습관을 바꾸고 운동을 하는 등 종합적인 노력이 필요합니다. 우울증 극복도 마찬가지입니다. 활동량을 늘이고 운동을 하거나 약이 필요할 수도 합니다. 휴식과 좋은 관계, 진솔한 대화를 통해 압박감과 긴장을 낮추는 등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여기에 더해 영적인 측면에서의 해결책이 필요합니다. 어떤 해결책입니까? 예수님이 주시는 해답입니다.
2. 세상에 없는 평화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예수님은 당신이 떠난다는 말을 듣고 근심과 불안에 휩쌓인 제자들에게 약속하셨습니다.
(요 14:27)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
예수님은 당신이 누리는 평안을 제자들에게도 나누어 주십니다. 이 평안을 누리면 근심도 두려움도 벗어납니다. 그 평안은 세상이 주는 평안과 같지 않습니다. 세상의 평안과 주님의 평안은 어떻게 다를까요? 빌립보서 4장입니다.
(빌 4:6)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다만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빌 4:7) 그리하면 모든 지각에 뛰어난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 마음과 생각을 지키시리라.
표준새번역은 7절을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라고 번역합니다. 그럼 사람의 헤아림에 의존하는 평화는 어떤 것입니까? 우리가 곰곰히 생각하는 것, 헤아려 보고 누리는 평화입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건강하고 돈을 벌고 성공하고 바라는 것이 다 이루어져 아무 걱정거리가 없구나, 그러니 마음이 평안하네.’ 이런 것이 사람의 헤아림에 의존하는 평화요, 조건이 주는 평화 곧 세상이 주는 평화입니다. 그러나 이런 완벽한 조건을 누리는 사람이 세상에 몇이나 되며, 그런 이라 할지라도 일생 내내 그런 상태에 머무는 이가 과연 있을까요? 그런 상태가 아닌데도 즉 건강을 잃고 돈을 못 벌고 실패하고 바라는 대로 되는 일이 별로 없는데도 마음이 평안한 상태, 아무리 곰곰히 생각해 봐도 걱정할 것밖에 없는데 마음은 평안한 상태, 이것이 사람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화, 모든 지각을 초월한 하나님의 평강, 예수님이 주시는 평안입니다. 돈을 벌든 못 벌든, 건강하든 못 하든, 성공하든 실패하든 누리는 진정한 평안입니다.
물론 이는 사고와 질병, 실패를 겪어도 전혀 아프거나 고통스럽거나 걱정이 안 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건 무념무상의 상태 곧 아무 생각이나 감각이 없는 상태로 제 생각에는 일종의 자기최면상태입니다. 그와 반대로 주님의 평화는 우리의 모든 감각과 감정이 생생이 살아있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이 최후의 만찬석상에서 마음이 괴롭다고 하셨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괴로워하며 기도하셨지만 곧 평안을 회복하신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부모의 사랑과 비슷합니다. 자녀가 속을 썩일 때 화가 나거나 야단을 치기도 하지만 그렇다고 자녀 사랑하기를 멈춘 것이 아닌 것처럼 참 평안도 아프고 힘들고 두려울 때도 있지만 그 기초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뢰가 사라지지 않기에 결국 평안을 회복합니다. 그럼 어떻게 이런 평안을 누립니까?
3. 깨닫고 믿게 하시는 분
먼저 이런 평안을 누리려면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바로 성령님과 예수님이 도우십니다. 26절의 성령님이십니다.
(요 14:26) “보혜사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 그가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생각나게 하리라.”
성령님은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의 의미를 가르치시고 생각나게 하십니다. 곧 깨닫게 하십니다. 29절에서는 예수님도 도우십니다.
(요 14:29) “이제 일이 일어나기 전에 너희에게 말한 것은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이 일은 이제 날이 밝으면 시작될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과 재림의 모든 사건을 가리킵니다. 이 모든 일을 미리 예고하셔서 제자들이 믿도록 하십니다. 즉 예수님과 성령님은 연합하셔서 제자들로 하여금 무언가를 깨닫고 믿도록 도우십니다. 그럼 우리가 무엇을 깨닫고 무엇을 믿어야 하기에 예수님과 성령님이 도우시는 것입니까? 그 깨닫고 믿어야 하는 진리를 설명해 주십니다. 30절입니다.
4. 주권자 하나님
(요 14:30) “이 후에는 내가 너희와 말을 많이 하지 아니하리니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
세상임금이란 죽음의 역사를 일으키는 마귀를 가리킵니다. 지금도 마귀는 우크라이나와 미얀마와 세계 곳곳에 전쟁을 일으킵니다. 마약을 퍼뜨려 인생을 망치고 생명을 빼앗고 공동체를 병들게 합니다. 거짓과 탐욕으로 가정과 공동체를 파괴합니다. 그런데 ‘그 마귀는 주님과 관계가 없습니다.’ 즉 예수님의 고난과 죽으심은 마귀의 계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주님의 패배가 아니며 마귀의 승리가 아닙니다. 마귀의 모략에 의한 것이 아니라면 왜 예수님은 고난당하고 죽으십니까? 31절입니다.
(요 14:31)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과 아버지께서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 하시니라.
즉 예수님은 사랑하는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따라 순종함으로 십자가를 지고 죽으신다는 뜻입니다. 그렇기에 하나님 아버지의 능력과 사랑으로 주님은 다시 부활하시고 승천하시고 마침내 그 계획대로 다시 오실 것입니다. 패배인 줄 알았던 고난이 사실은 승리요, 절망인 줄 알았던 죽음이 사실은 부활의 소망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슨 뜻입니까? 하나님이 모든 것을 통제하고 계신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주권자시요, 하나님이 주관하시고, 하나님이 다스리십니다. 마귀는 하나님을 이길 수 없습니다. 마귀가 다 망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하나님이 지키시고 살리시고 구원하십니다.
바로 이 진리를 예수님은 계속해서 제자들에게 가르치고 예고하셨습니다. 그들이 제대로 깨닫지 못 했지만 오순절에 오신 성령님이 예수님의 모든 가르침을 다시 생각나게 하시고 깨닫게 하시고 마침내 믿게 하셨습니다. 이 깨달음과 믿음으로 제자들은 인간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안을 누리기 시작했습니다. 오늘날에도 예수님은 성령님을 통해 우리에게 이 사실을 깨닫고 믿게 하시려 역사하십니다. 우리 역시 오순절 이전 제자들처럼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도 깨닫지도, 믿지도 못 하여 불안하고 근심하고 우울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5. 나의 평안을 주노라
급성패혈증으로 열흘 동안 사경을 헤매다 두 다리와 왼팔을 절단하는 대수술을 받고나서야 생명을 건진 이홍승 집사란 분이 있습니다. 그가 절망적 심정으로 누워서 기도하는데 고린도전서 말씀이 마음에 떠올랐습니다.
(고전 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아, 이 시련도 감당할 수 있겠구나.’ 마음에 절망이 사라지고 소망과 평안이 찾아왔습니다. 눈을 감고 있으려니 의사가 들어오더니 자는 줄 알고 곁에 있는 간호사에게 처방전을 불러 주더랍니다. ‘진통제하고 항우울제 놔주세요.’ ‘네, 선생님? 항우울제를 왜 주세요?’ ‘이런 일을 겪는 사람은 다 우울증을 겪습니다.’ ‘저는 괜찮을데요?’ ‘우울하실 거예요.’ 그리고는 나가버리더랍니다. 치료를 마치고 재활병원에 갔습니다. 의사가 진단을 하더니 ‘입원 안 하셔도 됩니다. 선생님은 재활 못 하십니다.’ ‘아니, 왜요?’ ‘선생님 상태로는 못 걸으세요.’ ‘아니요, 저는 다시 걷고 일상으로 돌아갈 것입니다.’ ‘안 된다니까요.’ 피눈물 나는 재활 끝에 이집사님은 의족과 의수, 휄체어와 목발을 의지하여 다시 걷고 직장으로 돌아가 임원까지 승진하였습니다.
그는 감당하기도, 이해하기도 힘든 고난조차도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고난마저도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의 선하심을 믿었습니다. 이 믿음으로 그는 절망과 두려움을 극복하고 소망과 평안을 회복하였습니다. 그것은 세상이 결코 주지 못 하는 평안이며, 인간의 헤아림을 뛰어넘는 평안이며, 주님이 자녀들에게 주시는 하늘의 평안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마 10:29) 참새 두 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마 10:30)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마 10:31)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이 하나님을 여러분은 신뢰하실 수 있습니까? 여러분의 머리털까지 다 세고 계시는 하나님의 은혜로 세상이 주시 못 하는 주님의 평안을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