롬 9:1-5/세상에 없는 사랑
230226 3.1절
1. 우크라이나 전쟁
지난 금요일 2월 24일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지 꼭 1년이 되는 날입니다. 지금까지 러시아에 맞서 싸우는 우크라이나의 모습은 그야말로 골리앗 앞에 선 다윗과 같습니다. 지난 1년 간 민간인 4만 명, 우크라이나 군인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고 약 3천만 명의 난민이 발생했습니다. 지금도 전장에서는 계속 무고한 생명이 희생되고 있습니다. 이들의 희생을 생각하면 그냥 러시아에 항복하고 속국으로 살면 안 되나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속국이 되면 차별과 멸시, 억압과 착취를 피할 수 없기에 맞서싸운다고 하지만 죽으면 다 무슨 소용입니까? 차별이나 멸시를 받아도 사는게 죽는 것보다는 낫지 않습니까? 그런데 왜 이들은 목숨을 걸고 여전히 싸우는 것일까요? 여기에는 자신의 안위만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이기적 인간이해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습니다. 그것은 동족과 조국을 향한 사랑입니다. 비록 자신의 목숨을 잃는다해도 조국을 지키고 동족들이 고통받지 않을 수 있다면 결코 아깝지 않다는 마음 곧 조국사랑, 동족사랑입니다. 우리는 총을 들고 사선을 누비는 우크라이나 젊은이들의 마음을 누구보다 잘 이해하는 이들입니다. 조국의 해방과 동족의 안녕을 위해 숱한 순교의 피를 뿌린 선조들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2. 삼일절
오늘은 해외한인장로회 산하 모든 교회가 매년 지키는 3.1절 기념주일예배입니다. 지금부터 104년 전 3월 1일에 일제식민치하의 우리 선조들은 고종장례일인 3월 1일에 맞추어 자주독립을 요구하는 만세운동을 일으켰습니다. 3개월간 106만 여명이 참여하여 전국에서 만세운동이 일어났습니다. 일제의 무력진압으로 47,000여 명이 구속되고 900여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3.1운동을 계기로 중국 상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일제는 민중들의 거센 저항에 직면하여 이전의 무단통치를 일명 문화통치로 전환하였습니다.
3.1운동에 기독교는 결정적인 기여를 하였습니다. 독립선언서를 작성한 민족대표 33인 중 절반에 해당하는 16명이 기독교인이었습니다. 만세운동 직후부터 5월까지 구속된 이들의 22%가 기독교인이었습니다. 서울 외 지방 만세운동은 대부분 교회가 중심이었습니다. 당시 기독교인구는 약 20만 명으로 1,600만 인구의 1.5% 정도였지만 참여도는 그 열 배가 넘었습니다. 당연히 가장 큰 탄압을 받은 조직이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긍휼과 우리 선조들의 희생으로 오늘 우리는 자유롭고 번영한 조국 대한민국 국민으로 살아갑니다. 비록 이국땅에서 이민자로 살아가지만 이토록 자랑스러운 뿌리를 가졌다는 사실은 얼마나 감사할 일인지 모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전세계에서 경제, 문화, 정치분야의 선진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작년 미국의 한 시사주간지는 전세계국가의 국력순위를 매기면서 한국을 당당히 6위에 올려두었습니다. 전년대비 2계단이나 상승한 것으로 일본과 프랑스보다 국력이 더 큰 것으로 나왔습니다. 불과 반세기 전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고 했다면 아마 미쳤다는 소리를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저는 지금 우크라이나를 위해 피흘리고 기도하는 이들의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나라에 일어난 기적이 우크라이나에는 왜 일어나지 못 하겠습니까? 선교지를 방문하여 설교할 때마다 이 사실을 강조합니다. ‘우리나라 한국은 지금 여러분의 나라보다 훨씬 가난하고 고통스러웠습니다만 지금은 세계적인 강국이 되었습니다. 여러분의 나라에도 이런 기적이 일어나지 말라는 법이 있습니까?’ 지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를 자신의 위성국가 쯤으로 취급합니다만 사실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의 기원이 된 나라입니다. 지금의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러시아의 기원이 된 키이우루시공국이 바로 지금의 우크라이나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지금의 러시아땅은 당시 키이우루시공국의 통치지역 변방이었습니다. 역사는 돌고돌아 변방의 땅이 거대한 러시아제국이 되어 오히려 우크라이나땅을 짓밟고 있습니다. 그 반대의 일도 언제고 다시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의에 편에 선 이들은 잠시 패배하는 듯 보여도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입니다. 이 소망을 붙들고 의를 위해 고난당하기도 두려워 않는 이들에게 하나님은 승리를 약속하십니다. 이 약속을 믿는 이들에게는 조국사랑, 민족사랑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마음입니다.
3. 성도의 조국사랑
오늘 본문은 동족사랑에 애끓는 사도 바울의 마음을 잘 표현해 줍니다. 그는 동족으로 인해 크게 근심합니다.
(롬 9:1-2) 내가 그리스도 안에서 참말을 하고 거짓말을 아니하노라. 나에게 큰 근심이 있는 것과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롬 9:3) 나의 형제 곧 골육의 친척을 위하여 내 자신이 저주를 받아 그리스도에게서 끊어질지라도 원하는 바로라.
동족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박해하고 십자가에 못박은 죄,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믿지 않고 교회를 탄압하는 죄를 짓고 그 대가가 영원한 멸망인 것을 생각할 때 그의 마음에 큰 근심이 사라지지 않는 것입니다. 동족들을 구할 수만 있다면 자신이 그 심판을 대신 받겠다는 마음입니다. 동족으로 인한 이런 근심은 참 신앙인에게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입니다. 모세도 동족이 큰 죄를 지었을 때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출 32:31) 모세가 여호와께로 다시 나아가 여짜오되 “슬프도소이다. 이 백성이 자기들을 위하여 금 신을 만들었사오니 큰 죄를 범하였나이다. (출 32:32) 그러나 이제 그들의 죄를 사하시옵소서. 그렇지 아니하시오면 원하건대 주께서 기록하신 책에서 내 이름을 지워 버려 주옵소서.”
느헤미야 역시 동족의 죄와 비참한 현실을 탄식하며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느 1: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느 1:6) “이제 종이 주의 종들인 이스라엘 자손을 위하여 주야로 기도하오며 우리 이스라엘 자손이 주께 범죄한 죄들을 자복하오니 주는 귀를 기울이시며 눈을 여시사 종의 기도를 들으시옵소서. 나와 내 아버지의 집이 범죄하여 (느 1:7) 주를 향하여 크게 악을 행하여 주께서 주의 종 모세에게 명령하신 계명과 율례와 규례를 지키지 아니하였나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무엇입니까? 동족의 죄를 슬퍼하며 회개합니다. 자신을 희생해서까지라도 그 죄를 사하여 구원하시기를 간구합니다. 이들은 왜 자신의 생명도 아끼지 않고 동족과 조국을 사랑합니까? 하나님의 은총을 입은 참 신앙인은 그 삶의 방식이 사랑으로 바뀌었기 때문입니다. 이런 면에서 성도의 조국사랑은 다른 이의 그것과 다릅니다. 이것이 어떻게 다른지를 깨달아야 합니다.
4. 사랑으로 살기
사람들의 ‘조국사랑’의 방점은 ‘조국’에 있습니다. 성도의 방점은 조국이 아니라 사랑에 있습니다. 조국에 방점이 찍힌 조국사랑은 그 대상이 자신의 조국이기에 사랑하는 것으로 당연히 배타적입니다. 조국이 아닌 나라, 동족이 아닌 민족은 사랑의 대상일 수 없고 조국을 괴롭히는 나라는 원수가 됩니다. 이런 조국사랑은 종종 배타적 민족주의로 발전하여 갈등을 일으키고 힘이 생기면 조국의 영광을 위해 타국을 짓밟을 수도 있는 제국주의로 발전합니다. 세상의 모든 조국사랑, 민족사랑은 이런 방식입니다.
그러나 성도의 조국사랑은 대상이 조국이라는 점이 아니라 삶의 방식이 사랑이란 점에서 시작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존재로 부름받았고 거듭났습니다. 이 사랑이 사명이자 특권이자 삶의 방식입니다. 이 사랑 때문에 조국도, 동족도 사랑합니다. 이 사랑은 다른 나라라고 해서 미워하거나 착취할 수 없으며 다른 민족이라고 해서 차별하거나 멸시할 수 없습니다. 이 런 사랑이라야 진정으로 이웃사랑이 가능합니다.
우리가 참 하나님의 자녀라면 바울과 모세와 느헤미야처럼 자신을 희생해서라도 조국과 동족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사랑은 조국과 동족을 위해 타국과 타민족을 짓밟는 배타적 사랑이 아니라 조국과 동족의 번영이 이웃나라, 민족에게도 복이 되는 그래서 더불어 살아가는 참된 번영을 추구합니다. 이런 사랑이야말로 이 시대를 구원한 사랑이요, 우리 삶을 구원할 사랑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세상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고 하셨습니다. 자신의 동족, 조국에만 복음을 전파하라고 명하지 않으시고 말입니다.
하지만 현실세계에 그런 사랑이 있습니까? 국제관계는 냉혹합니다. 우리 삶도 그렇지요. 말이좋아 공생이지, 내 코가 석 자인데 누구를 염려하며 자기를 희생해 다른 이를 위하는 이가 어디 있습니까? 그런 사랑이 여기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십자가에서 쏟아주신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사랑을 입은 성도는 그 사랑으로 치유받고 생명얻고 구원얻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세상을 구원합니다. 예수님의 사랑이 세상을 치유합니다. 이런 사랑을 하는 이들도 세상을 치유합니다. 죄와 악과 부정과 불의로 병든 세상을 고치는 것은 바로 이 사랑입니다.
우리의 조국사랑, 민족사랑이 이런 하나님의 사랑일 때 우리는 조국을 구원하고 민족을 사랑하고 세상을 치유합니다. 세상이 하는 배타적 사랑이면 우리는 사실 세상에 원한과 복수와 미움과 죽음만 더 퍼뜨릴 뿐입니다. 그것은 사실 사랑이 아닙니다.
삼일운동이 참 우리 민족을 구원하는 운동이 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런 사랑을 아는 그리스도인들이 주축이 되었기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오늘날 우리도 우리 민족과 세계에 참 치유와 구원이 되는 사랑을 하려면 우리 자신과 다르다고, 우리 민족이 아니라고, 우리를 괴롭힌 나라라고 원수로 삼는 배타적 사랑이 아니라 세상 모든 민족을 위해 기도하고 만민에게 복음을 전하는 하나님의 그것으로 사랑해야 합니다.
상해임시정부 수반이자 기독교인이었던 김구 선생은 백범일지의 ‘나의소원’에서 당신의 소원은 첫째, 둘째, 셋째도 평화로운 자주독립이라고 밝히면서 이렇게 덧붙입니다.
“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력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것이다…”
갈등과 전쟁이 가득한 세상에서 세상을 치유하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조국과 동족을 사랑하고 세상을 치유하는 성도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