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423 어떤 부활인가 / 마 22:23-33

20230423 어떤 부활인가 / 마 22:23-33

마 22:23-33/어떤 부활인가

230423 주일설교
1. 부활의 몸
우리는 인간이 지구의 주인이라 쉽게 여기지만 개체수를 기준으로 지구의 주인노릇하는 생명체는 무엇일까요? 바로 아메바와 같은 단세포 생물입니다. 눈에 보이지도 않기에 존재한다는 것도 잊어버리지만 자그마한 연못 하나에도 지구상의 모든 동식물보다 더 많은 수의 단세포 생명체가 존재합니다. 똑같이 지구상에 존재하지만 단세포생명의 몸체와 인간의 몸은 서로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차이가 납니다. 인간의 몸은 단세포의 그것과 비교할 수 없이 정교하고 오묘하고 단단하고 아름답고 기능적이고 오래 갑니다. 우리는 눈으로 무지개와 오로라를 보고 코로 꽃향기를 맡고 입으로 온갖 음식을 맛보고 노래하고 손으로 요리를 하고 발로 춤을 추고 황홀한 음악을 만들고 소설을 쓰고 우주선을 쏘아올립니다. 이 몸을 아메바의 그것과 비교하는 것은 불쾌할 정도이지요. 야 이, 아메바 같은 놈아… 이것은 엄청난 욕입니다. 이처럼 엄청난 영광의 격차를 보이는 서로 다른 몸이 이 세상에는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같은 원리로 인간의 몸과 비교할 수 없이 뛰어난 다른 생명의 몸도 존재할 수 있지 않을까요? 인간이 가진 가장 큰 약점, 쉽게 병들고 부러지고 마침내 죽고 썩는 이런 약점이 없는 몸 말입니다. 그런 몸을 우리가 입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그런 길이 있다고 성경은 가르쳐주십니다.
부활절이 2주가 지났습니다. 부활의 소망은 기독교 신앙의 가장 크고 놀라운 약속입니다. 부활이 가짜라면 기독교 신앙 전체가 거짓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도 부활을 전하며 이렇게 썼습니다.
(고전 15:14)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며 (고전 15:19)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반면 부활이 진짜라면 기독교 신앙보다 더 놀라운 약속은 세상에 없습니다. 사랑하는 이와 이별한 이들에게 다시 만난다는 이 부활의 약속 외에 어떤 약속이 위로가 될까요? 이 생의 마지막을 향해 날마다 걸어가는 우리 모두에게 이 부활의 약속말고 무슨 말이 진정한 소망이 될 수 있습니까? 이 생이 전부요, 죽은 후에 아무 것도 없다면 이 허무하고 덧없는 인생을 즐겨본들, 누려본들, 가져본들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럼 부활한 우리는 어떤 모습으로 어떠할까요? 우리가 사랑하던 사람들은 어떤 모습으로 만날까요? 여전히 지금 이 모습일까요? 아니면 다른 모습일갈까요? 이 질문의 답은 예수님과 사도들의 가르침 그리고 예수님의 부활사건을 통해 얻습니다. 오늘은 우리가 믿고 성경이 가르치는 부활의 몸에 대해 생각해 보겠습니다.
2. 천사처럼 변한다 
첫째로 부활하면 우리 몸은 천사와 같이 변합니다. 오늘 본문은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려 부활에 대해 던지는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은 부활을 믿지 않는 현실주의자였습니다. 당시 관습인 형사취수제에 의하여 형이 아들을 낳지 못 하고 죽으면 동생이 대신 형수와 결혼하여 아들을 낳아 대를 잇게 해주려다 일곱 형제가 모두 한 여자를 아내를 삼았다가 죽으면 부활할 때 이 여자가 누구의 아내가 되겠느냐고 질문하였습니다. 예수님은 그에 대해 답하시기를, 그들이 부활에 대해 무지하여 이런 생각을 한 것이라며 30절에서 부활 때에는 성적 구분이 없는 몸을 입을 것이라 하십니다.
(마 22:30)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천사의 몸은 성의 구분이 없습니다. 성은 종족번식을 위한 것이고 종족번식은 생명이 소멸되기 때문에 필요한 것인데, 더 이상 죽지않는 몸으로 산다면 종족을 번식할 필요가 없고 그렇다면 성기능도 필요가 없어질 것입니다. 똑같은 사건을 다룬 누가복음이 이 점을 강조합니다.
(눅 20:36) 그들은 다시 죽을 수도 없나니 이는 천사와 동등이요, 부활의 자녀로서 하나님의 자녀임이라.
죽지 않는 몸입니다. 이 천사의 몸은 분명 현재 우리의 몸과는 다릅니다. 그래서인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제자들은 비슷한 반응을 보이는데 처음에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 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마리아가 그러했습니다.
(요 20:14) (마리아가) 이 말을 하고 뒤로 돌이켜 예수께서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 예수이신 줄은 알지 못하더라.
막달라 마리아는 3년 동안 누구보다 가까이 예수님을 모셨는데 부활하신 주님을 보고 어떻게 알아보지 못 하였을까요? 그녀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누가복음은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 했다고 합니다.
(눅 24:15) 그들이 서로 이야기하며 문의할 때에 예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동행하시나 (눅 24:16) 그들의 눈이 가리어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
마가복음은 그 이유를 아예 예수님의 모습이 바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합니다.
(막 16:12) 그 후에 그들 중 두 사람이 걸어서 시골로 갈 때에 예수께서 다른 모양으로 그들에게 나타나시니
우리와 달리 죽지 않는 몸 곧 노화되거나 썩지 않는 몸, 성구분이 없는 몸은 분명 지금과 다른 몸이며 천사와 같은 몸입니다. 그렇더라도 제자들이 잠시 후 예수님을 알아 본 것을 보면 우리의 고유성이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는 아마도 비유하자면 다섯 살 때 본 아이를 20년이 지나 스물 다섯 살 때 보는 것과 유사할 것입니다. 분명 20년이 지났으니 알아보지 못 합니다. 다섯 살 꼬마와 비교할 수 없이 덩치도 커졌고 늠름해졌고 사나이다워져서 그 꼬마라고는 상상하지 못 합니다. 그러나 그 아이가 이 청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그 눈매와 얼굴과 특징이 떠오르며 비로소 알아볼 수 있는 것입니다.
3. 영광스럽게 변한다
둘째로 부활할 때 우리 몸은 지금과 비교할 수 없이 영광스럽게 변합니다. 사도 바울은 의인과 악인이 모두 부활한다고 선언합니다.
(행 24:15) 그들이 기다리는 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니이다.
그런데 이 두 부활은 서로 다른 종류의 부활이라고 예수님은 가르치셨습니다.
(요 5:28) 이를 놀랍게 여기지 말라. 무덤 속에 있는 자가 다 그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요 5:29)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
생명의 부활과 심판의 부활입니다. C.S.루이스는 성경에 바탕을 둔 상상으로 쓴 판타지소설 ‘천국과 지옥의 이혼’에서 지옥에 있는 이들의 몸을 그림자처럼 실체가 없는, 유령같은 몸으로 묘사합니다. 반면 천국에 있는 이들은 스스로 찬란한 빛을 내며 다이아몬드보다 높은 밀도와 비중을 가진, 생명의 영으로 충만한 실재로 묘사합니다. 천국백성의 몸을 충만히 채우는 것은 생명입니다. 이 생명으로 인해 그 몸은 영광으로 빛납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에서 그 몸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고전 15:42) 죽은 자의 부활도 그와 같으니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 15:43)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살아나며 (고전 15:44) 육의 몸으로 심고 신령한 몸으로 다시 살아나나니 육의 몸이 있은즉 또 영의 몸도 있느니라.
부활의 몸은 썩지 않습니다. 살과 뼈와 장기가 모두 다른 재료이고 다른 상태일 것입니다. 온갖 바이러스와 박테리아와 회충과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는 몸이 아닙니다. 이토록 쉽게 병들고 부러지고 상하고 찢기는 몸이 아닙니다. 마침내 죽고 썩어 흙이 되는 몸이 아닙니다. 우리 몸이 썩어 흙이 되는 이유는 흙으로 만들었기 때문입니다. 흙이 아닌 다른 것으로 혹은 다른 분자결합구조로 만들어 생기를 불어넣으신다면 흙으로 돌아가지 않는 몸이 되지 않을까요? 사도 요한 역시 우리가 입을 새 몸의 삶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계 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사망도, 애통함도, 아픈 것도 다 지나간 옛 일이 되어버린 몸과 삶 곧 영광의 삶입니다. 이런 몸이 어떤 것인지 희미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사건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데리고 변화산에 올라가셨을 때 영광이 그 분을 덮었습니다.
(마 17:2) 그들 앞에서 변형되사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졌더라.
그 영광이 얼마나 찬란하였으면 제자들은 황홀경에 사로잡혀 자신들이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랐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영광스러운 몸을 입을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는 사랑하는 이들을 이런 모습으로 다시 만날 것입니다.
4. 부활에 참여하다
어떻게 이런 소망이 현실이 됩니까? 그것은 십자가에서 죽으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그 죽으심에 참여하는 것입니다. 로마서 1장을 보십시오.
(롬 1:4)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자들 가운데서 부활하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선포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 (롬 6:5)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연합한 자도 되리라.
부활에 참여하려면 죽으심에 먼저 참여하여야 합니다. 이는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죄를 씻기 위한 대속을 위함임을 믿고 그 사랑과 은혜를 겸손히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또한 예수님을 주로 믿어 그 뒤를 좇아 십자가의 길을 감을 의미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주님의 뒤를 따라 부활에도 참여합니다. 성령님은 우리가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참여하고 부활에도 참여하도록 인도하십니다.
이것은 우리 모두의 소망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병들지 않고 죽지 않고 썩지 않는 부활의 몸을 입을 것입니다. 이별한 모든 사랑하는 이들과 이처럼 영광스러운 새 몸을 입고 다시 만날 것입니다. 그 영광의 몸으로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새로운 삶을 살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에 기꺼이 참여하는 성도가 되어 영광스러운 부활의 새 몸을 입을 날을 맞으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