눅 24:13-35/엠마오로가시는주님
230507 주일설교
1. 부활의 주님을 만나다
한국 현대소설의 걸작 중 하나로 평가받는 ‘무진기행’의 작가 김승옥은 23세에 이 소설을 발표하여 천재로 인정받았습니다. 아내의 전도로 마지못해 교회를 출석하던 중 그는 네 번의 신비체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참 기독교인이 되었습니다. 그 신비체험 중 하나인 1983년 10월 쉐라톤워커힐 호텔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사건을 간증집 ‘내가 만난 하나님’에 이렇게 썼습니다.
…오전 10시경, 아침식사를 함께 했던 배감독은 시내외출하고 나는 침대에 발을 뻗고 베개에 등을 대고 비스듬히 누워 성경을 읽고 있었다. 참 재미나게 성경을 읽고 있는데 문득 내 바로 옆, 침대와 침대 사이의 공간에 하얀 옷자락이 보이는 것이었다… 고개를 쳐들어 올려다 보니 대리석으로 빚은 듯 하얀 머리털, 하얀 얼굴, 하얀 수염을 기르신 분이 나를 지긋이 내려다 보고 서계시는 것이었다. 예수님이구나! … 오전 햇볕이 환히 들어오고 있는 호텔 방안에서 영안(靈眼)이 아니라 내 육안(肉眼)으로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이다. 나는 그 위엄 때문에 마치 무거운 바위가 나를 내리누르고 있는 듯한 조심스러운 느낌이 나에게 밀려들었다…
종종 부활의 주님을 만난 신비체험을 경험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대부분의 기독교인은 이런 체험을 통해 주님을 만나지 않기에 부러워하거나 열등감을 느끼는 이들도 있습니다만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은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복되다’고 하셨고, 김승옥 작가도 자신이 ‘도무지 믿지 못 하는 무신론자였기에 하나님이 체험을 주신 것’이라고 고백하기 때문입니다. 부활주일부터 3주에 걸쳐 부활에 대해 설교했습니다. 아마 마음에 이런 질문이 떠오른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부활의 소식만 듣지 말고 부활의 주님을 만나라는데 도대체 어떻게 만나는 거야? 어떤 사람은 그 분을 만났다는데 나는 왜 만났다는 확신이 들지 않는 거지?’ 그래서 오늘은 부활의 주님을 왜 만나기가 어려운 것인지, 어떻게 만나는 것인지를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의 경험을 통해 깨닫고자 합니다.
2. 왜 만나기가 어려운가
먼저 왜 부활의 주님을 만나기가 어려운지 생각해 봅시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이 부활하신 바로 그 날 오후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는 이야기입니다. 특이한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한참이 걸렸다는 점입니다. 주님이 변형되셨기 때문이라고 지난 주에 설명드렸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제자들이 주님을 알아본 것에 비하면 훨씬 긴 시간입니다. 13절을 보면 예루살렘에서 엠마오까지는 이십오 리 약 10여 킬로미터 정도입니다.
(눅 24:13)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오 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
산길이고 천천히 대화하면 간다면 약 3시간 30분 정도 걸린다고 합니다. 30-31절을 보면 그들은 엠마오에 도착한 후 에도 예수님과 저녁식사를 하던 중에야 눈이 열려 부활하신 주님인 줄 깨닫습니다.
(눅 24:30) 그들과 함께 음식 잡수실 때에 … (눅 24:31)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 보더니
예수님이 언제쯤 이 여정에 동행하셨는지 정확히 나오지 않지만 모든 정황을 고려하면 대략 반나절 정도를 시간을 보내신 후에야 두 제자는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것입니다. 반면 안식후 첫 날 새벽 무덤을 방문한 여제자들은 마태복음과 요한복음을 보면 모두 몇 마디 나누지 않고 금방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왜 이 여제자들과 달리 엠마오의 두 제자는 예수님을 알아보는데 이렇게 오래 걸린 것입니까?
그 이유는 그들의 삶의 방향에 있습니다. 여제자들과 이 두 제자들은 삶의 방향이 달랐습니다. 여제자들은 예수님의 무덤을 향해 가고 있었습니다. 비록 부활의 믿음은 없었지만 그녀들은 예수님을 사랑했고 주검이라도 주님을 보기 원했습니다. 그들은 분명 ‘주님을 향해’ 걸어갔습니다. 하지만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들은 반대로 ‘주님을 떠나 세상을 향해’ 걸어가습니다. 22절 이하를 보면 분명 그들은 그 날 아침 빈무덤과 천사들이 전하는 부활의 소식을 여제자들을 통해 들었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와 요한이 무덤에 확인하러 달려가는 길에 그들은 동행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베드로와 요한이 돌아와 전하는 빈무덤의 소식을 듣고도 그들은 주님을 기다리기는커녕 예루살렘을 떠나 엠마로로 향하여 주님과 더 멀어지는 길을 택했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그들은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도 않았거니와 사실 부활의 진위여부가 그들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았던 것입니다. 17절을 보면 그들은 자신들의 바람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에 대한 인간적 슬픔에 잠겨 있었을 뿐입니다.
(눅 24:17) … 두 사람이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서더라.
그들의 바람은 21절을 보면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었습니다.
(눅 24:21)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
즉 자신들의 바람을 이루어주실 예수님을 믿은 것이지, 그 분의 뜻과 나라가 이루어지는 것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들의 삶의 방향이 주님이 아닌 세상을 향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삼일 전 십자가를 지시던 날 그들이 어디 있었는지만 봐도 알 수 있습니다. 18절은 두 제자 중 한 사람의 이름이 글로바라고 합니다.
(눅 24:18) 그 한 사람인 글로바라 하는 자가 대답하여 이르되 …
그의 아내는 예수님의 십자가 바로 아래까지 달려가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주님을 사랑했습니다. 요 19장입니다.
(요 19:25) 예수의 십자가 곁에는 그 어머니와 이모와 글로바의 아내 마리아와 막달라 마리아가 섰는지라.
그 자리에 글로바는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과 함께 그는 도망쳤을 것입니다. 그는 어쩌면 아내에게 이끌려 마지못해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에 합류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혹 오늘 이 예배에 가정의 평화를 위해 아내를 따라오신 분들이 있다면 소망을 가지십시오. 글로바를 찾아오신 주님께서 여러분도 찾아오실 것입니다. 한 마디로 그는 몸은 제자공동체에 두고 있었지만 마음은 예수님에게 향하지 않은 채였습니다. 바로 이것이 그가 부활의 주님을 알아보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 이유입니다. 이 마음의 상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는 데 큰 차이를 만들어 냅니다. 이는 마치 수학을 배우고 싶어 안달난 학생과 배울 생각이 전혀 없는 학생의 차이와 같습니다. 이미 동기부여가 끝난 전자는 수업을 스폰지가 물 빨아들이듯 흡수하여 금방 미분적분을 이해합니다. 동기부여가 안 된 후자는 물 위에 기름붓듯 수업내용이 머리속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마음이 콩밭에 가있으니까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 배운 미적분을 아직 이해 못 하시는 분들이 계시죠? 마찬가지입니다.
마음이 주님을 향한 제자는 주님이 찾아오실 때 금방 알아봅니다. 반면 마음이 세상을 향한 제자는 주님이 당신을 찾아오셔도 알아보지 못 합니다. 관심이 없기 때문입니다. 맨하탄에 나가 술집이 어디 있나 찾아보십시오. 교회는 거의 못 보고 지나칩니다. 반면 교회를 찾아다녀 보십시오. 술집은 대부분 못 보고 지나칩니다. 엠마오로 향하던 글로바와 다른 제자는 주님의 고난은 두렵고 주님의 부활은 믿기지 않고 하나님 나라는 관심도 없었기에 자신들을 찾아온 주님을 알아보지 못 했던 것입니다.
3. 어떻게 돌이키나
그러므로 주님을 만나려는 이는 세상을 향한 마음을 주님을 향하도록 돌이킬 필요가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와서 주님의 길을 예비한다며 한 일이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이는 마치 수학에 관심이 없는 학생에게 왜 수학을 배워야만 하는지 동기부여하는 것과 유사합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세상을 향한 우리의 마음을 돌이켜 주님을 향하도록 만드십니까? 그것은 사실 공생애 3년 내내 하신 일로 딱딱하게 굳은 마음밭을 일구어 말씀의 씨를 뿌리는 것입니다. 32절은 저녁을 먹다 눈이 열려 주님을 발견한 그들의 마음이 언제 어떻게 바뀌었는지를 설명합니다.
(눅 24:32) 그들이 서로 말하되 “(낮에)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 하고
진리와 하나님 나라에 관심이 없던 냉랭한 그들의 마음이 예수님이 성경을 풀어주실 때 뜨거워졌습니다. 단단하던 땅이 녹아 말씀의 씨앗이 떨어져 뿌리내릴 수 있게 부드러워졌습니다. 돌덩이 같던 마음을 예수님은 성령의 쟁기로 갈아엎으시고 고랑고랑마다 말씀의 씨앗을 뿌리셨습니다. 25-27절을 보십시오.
(눅 24:25)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눅 24:26)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눅 24:27)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주님은 그들의 눈을 가리는 불신앙을 책망하십니다. 그것은 바로 미련하고 모든 말씀을 더디 믿는 마음입니다. 주님은 그 마음을 갈아엎기 위하여 성령의 쟁기로 땅을 깨뜨리고 말씀의 씨앗을 뿌려 깨닫는 열매, 회개하는 열매, 순종하는 열매를 맺게 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씨앗은 당신의 그리스도되심과 고난과 부활에 관한 예언자들의 모든 말씀입니다. 두 제자의 마음밭에서 그리스도에 관한 참지식이 자라나자 그들의 마음이 뜨거져워지며 예수님을 알고자 하는 진지한 관심이 생겼습니다. 비로소 주님을 만날 준비가 된 것입니다. 그 때 성령님께서 그들의 눈을 열어 예수님이 바로 그리스도이심을 깨닫게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이렇게 성령으로 우리를 찾아오셔서 진리의 성경을 풀어 주십니다. 우리는 엠마오로 가던 제자들과 같습니다. 우리의 마음이 헛된 것에 이끌려 세상을 향해 걸어갈 때, 고난과 시련으로 슬프고 낙심될 때 우리를 찾아오셔서 동행하시며 말씀을 풀어주십니다. 언제가 그런 때입니까? 바로 이 예배시간 겸손히 설교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때, 진리를 알고자 진지하게 성경을 공부할 때, 고난을 당하여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자 성경을 읽을 때 우리는 곁에서 동행하시며 성령으로 성경을 풀어주시는 예수님을 만납니다. 좋은 마음밭은 그 분의 말씀을 듣고 열매를 맺습니다.
(막 4:20) 좋은 땅에 뿌려졌다는 것은 곧 말씀을 듣고 받아 삼십 배나 육십 배나 백 배의 결실을 하는 자니라.
좋은 마음밭은 말씀을 받으면 가슴이 뜨거워지며 예수가 훌륭한 스승이나 선지자나 종교지도자가 아니라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며 인류를 구원한 그리스도이며 부활하여서 우리에게 영생을 주실 참 하나님이심을 깨닫습니다. 그 발 앞에 엎드려 자신의 구주로 경배하며 그 분에게 삶을 드립니다. 그 때 우리는 부활의 주님을 만납니다. 부활의 주님을 영의 눈으로 봅니다. 부활의 주님을 때로 육의 눈으로까지 봅니다. 그 분은 살아계신 부활의 주님으로 우리 삶을 다스리십니다. 글로바와 같이 부활의 주님을 만나시기를 축복합니다.
4. 고난 중 만난 말씀
권은혜 자매의 둘째 아이 도운이는 출생 4개월 만에 소아암 말기진단을 받습니다. 혈관도 보이지 않는 4개월 아기의 온 몸에 바늘을 꽂고 수술을 받고 항암제를 투여하는 지옥처럼 끔찍한 암투병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녀는 무늬만 신앙인인 자신의 모태신앙이 이 고난을 견디는데 아무 소용이 없음을 깨달았습니다. 분노와 원망, 죄책감과 절망을 이길 힘이 없어 처음으로 진지하게 성경을 읽기 시작했습니다. 한 시각장애인의 고난이 그 누구의 죄도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라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마치 줄이 끊어지듯 마음에 가득한 어둠을 비로소 떨쳐버릴 수가 있었습니다.
(요 9:3) “이 사람이나 그 부모의 죄로 인한 것이 아니라 그에게서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고자 하심이라.”
‘아,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구나.’ 그제야 마음에 평화가 찾아왔습니다. 생사를 넘나드는 아이를 위해 기도하며 성경을 읽으니 요 3:16이 화살처럼 마음에 꽂혔습니다.
(요 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아, 주님, 정말 영생이 있나요? 우리 도운이에게 제발 영생을 주세요.’ 울며 기도하다가 대학병원구내식당에 내려왔는데 순간 신비한 경험을 하였습니다. 식당을 가득 메운 수백 명의 얼굴이 눈코입을 분간할 수 없는 회색빛으로 변하는 것입니다. ‘아, 이 사람들은 천국에 못 가는 것 아닌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때 한 남자가 계단에서 내려오는데 그의 얼굴만 마치 줌인한 것처럼 또렷하게 보였습니다. 이번에는 ‘아, 저 사람은 천국 가는구나’하는 생각이 드는 것입니다. 잠시 후 주차타워에서 차를 빼서 나오려는데 바로 앞에서 젊은 주차요원과 택시운전사가 싸움이 붙어서 주먹다짐 직전까지 가는 것이 보였습니다. 그 때 어떤 남자가 주차요원에게 다가와 뭐라고 하며 뒤에서 살포시 안아주니까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주먹을 내리더니 돌아서서 그에게 ‘감사합니다’하고 고개 숙여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안아준 남자가 돌아서는데 보니까 바로 잠시 전 식당에서 얼굴이 줌인되었던 그 남자였습니다. 그 순간 하나님이 그녀의 마음에 바로 이 사람이 영생의 자녀다, 하고 알려주시는 것만 같았습니다. 그녀는 즉시 남편에게 전화해서 울면서 말했습니다. ‘여보, 도운이가 문제가 아니야. 도운이 천국갈거야. 문제는 우리야. 우리가 천국가느냐, 못가느냐가 문제야, 여보, 우리가 문제야.’
아내의 전화를 받은 남편 최필립 형제도 마치 눈이 번쩍 뜨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 때까지 그는 오직 내 아이 도운이가 사느냐, 못 사느냐에 온 마음을 다 빼앗겨 지냈습니다. 그 순간 소아병동에 가득히 누운 다른 아기들과 부모들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밤에 그 아이들 울음소리 때문에 ‘잠을 못 자겠네, 내일 피곤해서 어떡하지’하고 걱정만 하던 그가 그 아이들과 부모들을 위해 기도하고 전도하기 시작했습니다. 성경과 찬양이 울려나오는 장난감을 선물하며 위로하고 전도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 부부는 도운이의 고난을 통해 자신들에게 말씀하시는 주님을 만났고 진정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고 간증하였습니다.
주님은 엠마오의 두 제자와 그러셨듯이 이 부부에게 찾아오셔서 뜨겁게 말씀을 풀어주시고 동행하시며 삶의 방향을 바꾸어 영생의 길로 인도하셨습니다. 그 주님이 지금 여러분에 곁에도 동행하시며 말씀하시는 줄 믿습니다. 주님이 풀어주시는 그 말씀으로 여러분의 마음이 뜨거워져 생명길로 돌이키는 은혜를 누리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