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04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 행 4:23-31

20230604 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 행 4:23-31

행 4:23-31/그는 흥하고 나는 쇠하리라

230604 주일설교
1. 이해불가한 비극 
여기 한 아름다운 한인가족을 소개합니다. 텍사스주 달라스의 어느 한인교회의 신실한 성도인 이들 가족은 변호사인 아빠, 의사인 엄마 아래 5살, 3살 사랑스러운 두 아들을 두어 남부러울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5월 6월 이 가족에게 예기치못한 큰 비극이 닥쳤습니다. 이 날 한 쇼핑몰에서 일어나 8명을 희생시킨 총격사건으로 아빠와 엄마, 동생이 세상을 떠나고 첫째 아들 윌리엄만이 큰 부상을 입은 채 살아남았습니다. 이들이 섬기던 교회는 물론이고 텍사스 한인사회 전체가 큰 충격을 받고 슬픔에 잠겼습니다.
이 아름답고 사랑스러운 가족에게 도대체 왜 이런 비극이 일어난단 말입니까? 이 아름다운 가족이 교회와 하나님 나라와 이 사회에 끼칠 선한 영향력이 얼마나 클텐데 왜 이렇게 허무하게 희생된단 말입니까?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런 비극을 허락하신단 말입니까? 이런 생각을 한 번도 안 해 보신 분들은 없으실 것입니다.
우리 삶에도 이 정도로 큰 비극은 아니겠습니다만, 그 이유를 이해하기 힘든 안타깝고, 허무하고, 억울하고, 기가막힌 희생, 비극, 모순, 불의가 가득합니다. 그 때마다 과연 하나님은 공정하시고 정의로우신가? 소위 신정론이란 질문을 던지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경에도 이런 안타까운 희생이 많습니다. 대표적으로 세례 요한과 스데반이 있습니다. 세례 요한은 얼마나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았던지, 예루살렘에서 온 바리새인들이 그에게 ‘당신이 메시야냐?’라고 물을 정도였습니다. 그가 살아서 예수님의 제자가 되었거나 예수님과 협력했더라면 얼마나 주님의 사역이 더 크게 열매를 맺었을까요? 헤롯 안티파스의 칼에 목이 잘려 순교한 것은 얼마나 큰 비극이요, 선교자원의 큰 낭비입니까! 그가 굳이 헤롯의 죄를 꼬집는 설교를 하지 않았더라면 더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스데반 역시 얼마나 탁월한 성경교사였는지 모릅니다. 그가 돌에 맞아 죽지 않았더라면 초대교회에 얼마나 많은 디아스포라 유대인을 전도하였을지 모릅니다. 바나바나 바울 못지않은 선교사가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가 회당에 모인 디아스포라 유대인들을 지나치게 자극하는 설교를 하지 않았더라면 좋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자, 하나님은 왜 세례 요한과 스데반을 살려서 더 크고 귀하게 쓰시지 않고 이렇게 희생되도록 허락하셨을까요?
2. 사명을 다 이룬 삶
첫째, 사명을 다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세례 요한은 자신의 사명이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사명대로 그는 사람들이 회개하고 메시야를 맞아들이도록 준비시키는 세례 운동을 성공적으로 이끌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자 자신의 제자들과 대중들을 예수님께로 보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세례를 받으심으로 사람들에게 큰 주목을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셨습니다. 그는 비로 오래 살지는 않았지만 자신의 사명을 다 이루었습니다.
만약 그가 헤롯에게 죽지 않고 사역을 계속 했다면 어떠했을까요? 그의 큰 영향력은 어쩌면 예수님의 사역에 짐이 되었을 수도 있습니다. 실제로 그의 사역 말기와 예수님 사역 초기가 겹쳐서 제자들끼리 어느 쪽의 세례자가 더 많으냐로 갈등이 일어나기도 하였습니다.
(요 3:26) 그들이 요한에게 가서 이르되 “랍비여, 선생님과 함께 요단 강 저편에 있던 이 곧 선생님이 증언하시던 이(예수님)가 세례를 베풀매 사람이 다 그에게로 가더이다.”
더구나 요한은 임박한 심판을 강조하는 자신과 달리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선포하는 예수님의 메시지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 했습니다. 그는 헤롯의 감옥에서 예수님이 메시야가 맞는지 의심하여 제자들을 보내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위대한 선지자에 틀림없었지만 역시 이해와 행동에 한계가 있는 인간이었습니다. 그런 그가 사역을 지속했다면 예수님과 메시지와 사역에서 충돌을 일으켜 짐이 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 역시 자신의 한계를 분명히 알고 있었기에 사역의 주도권이 예수님에게 넘어간다고 불평하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답합니다.
(요 3:30) “그는 흥하여야 하겠고 나는 쇠하여야 하리라.” 하니라.
3. 더 큰 열매를 남긴 삶
둘째, 우리는 이해하기 어렵지만 희생을 통해 더 큰 열매를 남기기도 합니다. 공회에서 한 스데반의 설교를 보면 성경 전체를 꿰뚫는 그의 통찰과 청중의 입을 막아버린 탁월한 스피치는 분명 초대교회의 큰 자원이었음에 틀림없습니다. 그는 당연히 살아서 아주 많은 선교의 열매를 남길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죽어서 더 큰 열매를 하나님 나라에 남겼습니다. 그의 죽음을 계기로 예루살렘 교회에 박해가 일어나 성도들이 일제히 예루살렘 밖으로 흩어졌습니다.
(행 8:1) … 그 날에 예루살렘에 있는 교회에 큰 박해가 있어 사도 외에는 다 유대와 사마리아 모든 땅으로 흩어지니라.
이는 예수님이 교회에 하신 예언이자 명령이었습니다.
(행 1:8)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명령을 이해하지도 순종하지도 못 했습니다. 그러자 하나님은 스데반의 순교를 통해서 강제로 이 사명을 이루도록 만드렸습니다. 그렇게 흩어진 이들은 비로소 예루살렘 외의 지역에도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행 8:4) 그 흩어진 사람들이 두루 다니며 복음의 말씀을 전할새 …
스데반은 그가 살아서 설교하고 전도하여 구원할 수 있었던 영혼보다 훨씬 더 많은 영혼을 전도하고 복음이 온 세상을 퍼져가도록 쓰임받은 것입니다. 물론 그는 죽는 순간까지도 하나님이 그의 희생을 그렇게 쓰시는지 이해하지 못 했지만 분명 하나님의 선한 뜻을 믿었습니다. 그 사실은 죽어가는 마지막 순간까지 원한을 품지 않고 예수님을 닮은 모습으로 원수를 위해 기도한 그의 모습에서 증명됩니다.
(행 6:15) 공회 중에 앉은 사람들이 다 스데반을 주목하여 보니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과 같더라… (행 7:60)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4. 참성도의 기도
세례 요한과 스데반의 삶은 참성도가 구하는 삶이 어떤 것인지를 가르쳐 줍니다. 그것은 자신이 흥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흥하게 하려는 삶이요, 자신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한 계획을 구하는 삶입니다. 오늘 본문의 박해를 직면한 성도들의 기도도 이 사실을 잘 보여줍니다. 베드로와 요한이 대제사장 무리에 의해 감옥에 갇혔다가 심문과 협박을 받고 풀려나 성도들에게 이 모든 상황을 알렸습니다. 감옥에 갇히는 것이 작은 일입니까? 이미 예수님도 잡아 죽인 그들의 심문과 협박을 받는 것이 얼마나 두렵고 또 모욕적인 일입니까? 아마 우리 중 누가 그런 일을 겪고 교회에 왔다면 듣고 우리가 특별기도회를 열어서 무엇이라고 기도했을까요? 울고 불고 부르짖으면서 마음에 받은 상처를 위로해 주시고 더 이상 이런 고난을 겪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을까요? 우리가 드리는 기도가 대부분 이와 유사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본문의 성도들은 무엇이라 기도합니까? 그들은 이 고난과 위협을 억울하게 당했다고 탄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첫째, 이 모든 고난이 하나님의 선한 계획 중에 있다고 고백합니다.
(행 4: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행 4: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행 4: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행 4:27) 과연 (예언하신 대로)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행 4: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그들은 이 모든 일이 예언대로 일어났다고 기도합니다. 곧 모두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의 선하고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둘째, 그렇기에 그들은 자신들의 안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을 감당할 힘을 달라고 기도합니다.
(행 4: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행 4: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그들의 기도는 그들이 어떤 사람인지를 드러냅니다. 그들은 세례 요한처럼 예수님이 흥하여야 하고 자신들은 그를 위하여 필요하다면 기꺼이 쇠하여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고난과 위협마저도 선하시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주권 아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런 믿음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으십니다.
(행 4: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5. 주님을 흥하게 하는 성도
오늘 우리는 성공과 실패를 얼마나 세상적으로 정의하는지 모릅니다. 우리가 어떤 이를 부러워하는지를 보면 됩니다. 부유하고 건강하고 명문대 가고 좋은 직장 가고 아메리칸 드림 이룬 성도가 예수 잘 믿어서 복받았다고 부러워합니다. 그러나 주를 위해 비난 받고 오해 받고 희생하고 고난을 겪는 성도를 부러워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불쌍하게 보고 심지어 믿음이 없어서 혹은 복을 못 받아서 저런 고생을 하나 생각합니다. 왜 그럴까요? 우리에게 ‘예수님이 흥하고 나는 쇠하여야 한다’는 세례 요한의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쇠하더라도 나는 흥해야겠다’는 욕망만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기도가 다 그렇지 않습니까?
왜 우리는 망해도 예수님이 흥해야 합니까? 예수님이 진정 생명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참 진리이시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참 아름다움이시기 때문입니다. 십자가의 사랑과 부활의 능력으로 영원한 죄와 멸망에서 우리를 구원하셨기 때문입니다. 그 분이 흥하면 우리는 쇠하여도 삽니다. 주님의 흥함으로 온 세상이 구원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참성도는 아메리칸드림을 이룬 이가 아닙니다. 주를 위해 기꺼이 쇠하는 길 가는 성도입니다. 주를 위해 실패도 감사하는 성도입니다. 주를 위해 희생도 즐겨하는 성도입니다.
(마 5:11) 나로 말미암아 너희를 욕하고 박해하고 거짓으로 너희를 거슬러 모든 악한 말을 할 때에는 너희에게 복이 있나니 (마 5:12) 기뻐하고 즐거워하라. 하늘에서 너희의 상이 큼이라. 너희 전에 있던 선지자들도 이같이 박해하였느니라.
참성도는 이해하지 못 하는 고난을 겪으면서도 하나님의 선하신 뜻을 믿습니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습니다. 성도의 희생을 헛되지 않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그러므로 세상은 실패라 하고 손해라 하고 절망이라 하지만 성도는 하나님을 신뢰하고 인내하고 감사하고 기도하고 찬양합니다. 여러분에게 이런 믿음과 찬양이 있습니까?
참성도는 자신의 안위를 모두 주님의 선하고 전능한 손에 맡깁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염려하지 않으니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구합니다. 그는 사명을 이루기를 구합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구합니다. 그의 기도를 살아계신 하나님은 외면하지 못 하십니다. 오늘 여러분의 간절한 바람은 주님이 흥하는 것입니까, 자신이 흥하는 것입니까? 주님이 흥하는 것만이 여러분의 모든 바람과 기도가 되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