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1:1-14/추락하는 인생에 찾아오신 헤세드
230709 주일설교 룻1장
한 줄기 빛 같은 책
전쟁과 기아, 살인과 마약… 매일 쏟아지는 끔찍한 뉴스에 질린 분들을 위한 성경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룻기입니다. 룻기는 봄햇살처럼 따뜻합니다. 단 한 명의 악인도, 끔찍한 범죄도 등장하지 않는데다 아름다운 이야기로 가득합니다. 룻기는 끝없이 추락만 거듭하는이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역전의 소망을 주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 도대체 어디 있어? 뭘 하신단 말이야? 원망하는 이들을 위한 책이기도 합니다. 보이지 않지만 인생과 역사를 주관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보여주기 때문입니다. 이런 아름다운 이야기가 펼쳐지는 배경이 더 놀랍습니다. 1절은 그 때를 사사시대라고 설명합니다.
(룻 1:1) 사사들의 치리하던 때에 그 땅에 흉년이 드니라 …
사사시대가 어떤 시절입니까? 사람들이 각기 자기 소견에 좋을 대로 살았기에 온갖 끔찍한 일이 쉼없이 벌어지던 때가 아닙니까?
(삿 17:6) 그 때에는 이스라엘에 왕이 없으므로 사람마다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행하였더라.
그런 시대에조차 하나님의 은총의 빛이 결코 꺼지지 않았으며, 하나님의 법을 따라 하나님의 성품으로 사는 사람들이 여전히 남아있다는 진리를 보여주는 책이 바로 이 룻기입니다. 아무리 암울한 현실에서도 소망을 잃지 않아야 하며 아무리 어지러운 시기에도 하나님을올곧게 쫓기를 멈추지 말아야 함을 깨우쳐 주는 책이기도 합니다.
들음으로 시작되는 반전
이야기는 베들레헴 출신 여인 나오미를 주인공으로 시작합니다. 그녀는 복받은 여자였습니다. 결혼하고 두 아들을 두는 것은 분명 하나님의 은총이었습니다. 그런 인생이 흉년 때문에 모압으로 이주하면서 추락하기 시작합니다. 모압은 베들레헴에서 요단강을 동쪽으로건너면 바로 만나는 이방땅입니다. 10년의 이주기간에 먼저 남편이 죽습니다. 모압여자와 결혼한 두 아들도 죽습니다. 결국 이방 며느리둘과 남습니다. 한 번 잘 살아보겠다고 미국이민 왔는데 남편 죽고 두 아들 죽고 백인 며느리, 히스패닉 며느리 둘만 여러분 곁에 달랑 남았습니다. 얼마나 기가 막히겠습니까! 이민생활에 기가막힌 일이 한둘이겠습니까? 나오미의 이야기는 곧 우리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추락을 거듭하던 그녀의 삶에 반전이 일어납니다. 그 반전이 어디서 시작됩니까? 6절입니다.
(룻 1:6) 그가 모압 지방에 있어서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을 권고하사 그들에게 양식을 주셨다’ 함을 들었으므로 …
그녀는 하나님의 은총의 소식을 들었습니다. 절망에 빠져있던 그녀에게 이 소식이 한줄기 빛이 비추었습니다. 인생은 누구의 말을 듣느냐, 어떤 소식을 듣느냐에 따라 생명과 죽음으로 나뉩니다. 마귀의 거짓말을 들은 아담과 하와는 낙원을 잃어버렸습니다. 반면 하나님의 약속을 듣고 믿은 아브라함은 영원한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로마서는 생명 주는 믿음은 들음에서 나고, 우리가 들어야 할 것은 곧그리스도의 말씀이라고 하였습니다. 마귀의 거짓말이 아닌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은 이들은 영생을 얻습니다.
(롬 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돌아가는 이에게 열리는 구원
그래서 그녀는 돌아가기로 결심합니다.
(룻 1:6) … 이에 (나오미가) 두 며느리와 함께 일어나 모압 지방에서 돌아오려(בושׁ) 하여
여기서 ’돌아오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슈브’는 구약에서 ‘포로상태에서 돌아오다’ 혹은 ‘우상숭배에서 회개하다’라는 의미로도 쓰입니다. 양식을 얻고자 약속의 땅을 떠난 그녀가 돌아온다는 표현은 아버지를 떠나 자유와 즐거움을 구했다가 돼지우리까지 추락했던 탕자가’깨닫고 일어나 돌아갔다’는 표현을 떠올리게 합니다. 약속의 땅을 떠나 모압으로 이주키로 한 결정은 분명 최악의 결과로 돌아왔습니다. 반면 ‘여호와께서 자기 백성에게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여호와의 은혜의 날개 아래 돌아가기로 하자 반전이 시작되었습니다.
물론 돌아온 베들레헴에서도 극빈층의 생활을 벗어날 수 없었고 벗어날 소망도, 어떤 다른 희망도 없었지만 룻기를 끝까지 읽은 이는하나님이 그녀의 삶을 어떻게 극적으로 역전시키시는지 압니다. 그녀 자신은 깨닫지 못 했지만 하나님께 돌아가기로 한 순간 절망적 삶에반전은 이미 시작된 것입니다. 사랑하는 교우 여러분, 하나님께 돌아온 삶은 이미 역전이 시작된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곁에 있는 하나님의 헤세드
그녀가 받은 은총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이들 곧 이방인 며느리에게서 왔습니다. 보통 10대 초반에 결혼하는 당시 풍습과 10년의이주기간을 고려하면 두 며느리는 대략 10대 중후반에서 많이 잡아야 20대 초반이 넘지 않는 과부였습니다. 그런데 그녀들은 부모의 집으로 돌아가 재혼할 기회를 내버리고 늙고 가난한 시어머니를 섬기기 위해 그녀들에게는 낯선 이방땅 이스라엘로 이주하겠다고 따라나선것입니다. 나오미는 그녀들로 인해 얼마나 위로를 받았겠습니까!
세상에 이런 며느리들이 어디 있습니까! ‘목사님, 우리 며느리가 이 성경을 좀 봐야 돼요.’ 그러실지도 모르겠습니다만, 하나님의 은혜는 며느리들에게서 나오미에게로만 흐르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들이 이유없이 나오미를 따라나선 것일까요! 나오미 역시 며느리들을 어떻게 대하는지 보십시오.
(룻 1:8) 나오미가 두 며느리에게 이르되 “너희는 각각 어머니의 집으로 돌아가라. 너희가 죽은 자와 나를 선대한 것 같이 여호와께서너희를 선대(חֶסֶד)하시기를 원하며 (룻 1:9) 여호와께서 너희로 각각 남편의 집에서 평안함을 얻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고 그들에게 입맞추매 그들이 소리를 높여 울며
사람이 물에 빠지면 아무 것도 생각나지 않고 살기 위해 무엇이든 붙잡고 늘어집니다. 나오미는 지금 남걱정할 때가 아닙니다. 늙고가난한데 젊은 며느리가 둘이나 있으면 어떻게든 입에 풀칠하는데 도움이 되면 되었지, 손해가 되겠습니까? 그러나 그녀는 자신의 불행으로 그녀들까지 고통을 당할까 그녀들을 더 염려합니다.
(룻 1:13) … 내 딸들아, 그렇지 아니하니라. 여호와의 손이 나를 치셨으므로 나는 너희로 인하여 더욱 마음이 아프도다.”
그녀는 자신이 물에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데도 며느리들을 밀어 올려 살리려 애씁니다. 어떤 이는 자기 자식에게도 그렇게 하지 못 합니다. 나오미는 피한방울 섞이지 않은 며느리들에게 은총을 베풀고 있습니다. 한국 시어머니였다면 ‘서방 잡아먹은 년’이라고 욕을, 욕을했을 법도 합니다만 나오미는 그보다 훨씬 분별력 있고 너그럽습니다. 자신의 고난을 ‘여호와께서 자신을 치신 것이라’하고 며느리들을 원망하지 않습니다. 그럼 여호와를 원망한 것이 아닌가 싶지만 이것은 원망이 아니라 고난마저도 하나님의 섭리의 손길 아래 있다는 믿음의고백입니다. 어떻게 압니까? 그녀가 ‘여호와께서 양식을 주셨다’는 소식을 듣고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나 며느리들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녀가 여호와를 원망했다면 여호와의 은총을 입으러 고국으로 돌아가려 하지도 않았을 터이고 며느리들을 이렇게 대하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는 이는 사람도 원망합니다. 반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녀는 당시 이방인을 저주의 대상으로 여겼던 이스라엘 사람과 달리 세상 모든 민족이 아브라함으로 인해 복을 받아야 한다는 여호와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이였습니다.
(창 12:3) “… 땅의 모든 족속이 너(아브라함)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그녀는 이방인에게도 하나님이 은총을 베푸시리라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8절에서 여호와께서 며느리들을 선대하기를 원한다는 표현에서 ‘선대하다’로 번역된 히브리어 헤세드는 하나님의 자비, 긍휼, 사랑 등으로 번역됩니다. 이 헤세드는 룻기에서 여러 차례 하나님의 자비 혹은 그 자비에서 나온 성도의 자비를 묘사하기 위해 등장합니다.
나오미와 두 며느리가 서로에게 보여주는 이 애정과 헌신은 하나님의 은총이 고난 중에도 사실은 우리 곁에 늘 머물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나오미는 며느리들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하고 며느리들 역시 나오미에게서 하나님의 헤세드를 받습니다. 나오미는 특히룻에게서 이 헤세드의 은혜를 경험하고 그녀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갑니다. 나오미는 자신이 불행하고 절망적인 인생에 내팽개쳐졌다고생각했지만 그녀의 인생에는 사실 하나님의 헤세드 은혜가 떠나지 않고 함께 하였던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도 이런 헤세드가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참되고 영원한 사랑을 보여주신 예수님입니다. 모두가 우리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미워할 때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하여 채찍에 맞고 피흘리시고 수치와 고난을 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을 통해 부어주신 헤세드는 단 한순간도 우리 곁을 떠난 적이 없습니다. 우리가 평안할 때도, 고난 중에도 항상 함께 하십니다. 우리가 거룩하게 살 때도 심지어 죄를 지을때조차 함께 하십니다. 목사님, 하나님은 우리가 거룩하면 기뻐하시고 죄를 지으면 진노하지 않으십니까? 맞습니다. 그런데 진노가 곧 하나님의 사랑하지 않으심이 아닙니다. 진노 중에도 하나님은 여전히 죄인인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진노야말로 사랑의 증거입니다. 사랑하기에 돌이키기를 원하시며 진노하십니다.
하나님의 이 헤세드는 복음을 통해, 때로는 헤세드의 사건을 통해, 때로는 헤세드의 사람을 통해 우리를 붙드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통해 헤세드의 소식을 듣고 헤세드의 하나님께 돌아가는 이들에게 놀라운 역전이 시작됩니다.
헤세드를 경험한 목사
온라인상담사역을 하는 김유비 목사는 어린 시절 폭력적인 아버지의 학대와 찢어지는 가난으로 큰 상처를 안고 자랐습니다. 분노를주체하지 못 하여 자살을 시도하다가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를 경험하고 회심하여 기독교인이 되고 신학교까지 진학했습니다. 그러나 깊은 상처로 인한 트라우마는 한 순간에 치유되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난한 전도사 시절 어느 날 아내가 한참을 망설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어렵게 말을 꺼내는 것이었습니다. “여보, 우리 집 월세가 다섯 달 밀렸고 기저귀가 떨어졌고 분유값이 없어.” 순간 그는 자신도 모르게 ‘어쩌라고’ 하고 버럭 소리를 질렀습니다. 깜짝 놀란 아내가 바닥에 주저앉아 우는데 그 순간 거울에 비친 자신을 보고 자신도 소스라치게 놀랐습니다. 아버지에게 받은 고통 때문에 김목사는 결혼하며두 가지를 결심했는데 절대 폭력적인 가장이 되지 않겠다, 무능한 가장이 되지 않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거울에 비친 자신은 그토록 저주하고 미워했던 폭력적이고 무능한 아버지의 모습 그대로였던 것입니다. 너무나 놀라고 수치스러운 나머지 우는 아내를 두고 그 길로 가출을하고야 말았습니다.
차에서 자는데 아버지에게서 전화가 와서 ‘아빠가 이혼하는데 면목이 없어서 편지를 썼다’는 것입니다. 이메일을 열어 프린트해보니A4용지 60장 분량으로 평생 아버지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당신인생 이야기가 빼곡히 들어있었습니다. 그 편지를 읽고는 아버지가 아들인 자신에게 가해자였지만 그 아버지도 할아버지에게는 피해자였다는 사실을 처음으로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자신 역시 아버지에게는 피해자였지만 지금 아내와 아이들에게 가해자가 되어가고 있다는 것도 깨달았습니다. 김목사는 평생 아버지가 자신의 아픔을 숨겼던 것처럼 자신도 아내에게 숨기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고민 끝에 3일 만에 집에 들어가서는 식탁 위에 아빠의 편지를 툭 던지며 퉁명스럽게 ‘이거 버려’하고는 방에 들어가 이불을 머리 끝까지 뒤집어 썼습니다. 그리고 속으로는 ‘제발 버리지 말고 읽어줘’하고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아내가 한 장씩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리더니 흐느껴 울기 시작했습니다. 한참만에야 아내가 방으로 들어오더니 이불을 들추고는 말하기를, ‘여보, 살아줘서 고마워, 포기하지 않고 견뎌주어서 고마워.’라는 것입니다. 그 순간 김목사는 평생 이 말을 듣기 위해 살아온듯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는 아기처럼 아내의 품에 안겨 밤새도록 통곡을 했습니다. 그는 아버지에게서 받은 고통을 아내를 통해 하나님의 헤세드를 경험함으로 위로와 치유를 받았습니다. 그는 자신처럼 씻을 수 없는 고통을 겪는 이들을 넉넉히 위로하는 상담사역자로 이제는 수많은 이들을 돕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 곁에 계십니다. 마귀는 인생 곳곳에 죄와 악의 지뢰를 뿌려놓고 우리를 죽이려 하지만 하나님은 고단하고 지치는 인생곳곳에 헤세드의 복음, 헤세드의 사건, 헤세드의 사람을 예비해 두십니다. 죄와 악이 찢어놓는 영혼을 십자가의 사랑과 은혜로 치유하고살리십니다. 하나님의 헤세드는 다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헤세드가 없는 인생이 없습니다. 하나님에게 돌아가는 여러분의 인생이 놀랍고 풍성한 하나님의 헤세드로 가득 차기를 주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