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06 은혜로 사는 남자 / 룻 2:4-17

20230806 은혜로 사는 남자 / 룻 2:4-17

룻 12:4-17/은혜로 사는 남자

230806 주일설교
1. 우리 곁에 낯선 이
오늘 설교는 퀴즈로 시작합니다. 이제 보여드릴 조각상이 묘사하는 성경구절을 맞추는 것입니다. 주소를 말씀하시거나 그 내용만 비슷하게 맞추셔도 제가 식사를 대접하겠습니다. 이 청동조형물은 2019년 9월 29일 제105회 세계이민의날을 기념하여 성베드로광장에 처음 설치되었습니다. 캐나다 예술가 티모시 슈말츠(Timothy Schmalz)가 제작한 이 조각상은 현재까지 전 세계 90개국 이상에 설치되었습니다. 보시는 사진의 조각은 5시간 정도 차로 북쪽으로 올라가 캐나다 국경을 넘으면 만나는 몬트리올 성요셉성당 마당에 있습니다. 조각상 하부는 배를 묘사합니다. 배 위에는 실물크기의 체로키인디안, 아프리카노예, 어린이, 임산부 등 다양한 인종과 국적의 난민, 이민자들이 타고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 두 개의 날개가 삐죽 하늘로 솟아 있습니다. 이 날개는 그들 중 천사가 숨어있다는 것입니다. 조각상의 제목은 ‘Angels Unawares-숨겨진 천사들’입니다. 자, 이 조각상이 묘사하는 성경구절은 무엇일까요? 답은 히 13:2입니다.
(히 13:2) 손님(strangers)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
한글성경은 손님이라고 번역해서 귀한 이 대접을 강조하는듯 보이지만 영어성경은 원어에 좀 더 가깝게 strangers라고 번역하여 ‘낯선 이, 나그네, 약자를 환대하라’는 주님의 명령을 강조합니다. 이 본문의 배경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들을 대접하다가 천사들을 환대한 창 18장 사건입니다. 한 가지 더 퀴즈를 냅니다. 이 배에는 모두 몇 명이 타고 있을까요? 짐작해 보십시오. 정확히 140명입니다. 보기보다 많지요? 우리 곁에도 몰라서 그렇지 생각보다 많은 이민자, 난민, 고난의 바다 위를 위태로운 인생의 배를 타고 떠도는 이웃이 있습니다.
이 말씀과 조각은 난민과 이민자 문제로 큰 갈등을 겪는 이 시대에 중요한 도전을 줍니다. 그리고 타인과 낯선 이에게 무관심하고 오직 자신의 성공을 삶의 목적이라고 외치는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도 큰 교훈을 줍니다. 이 시대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본문의 주인공 보아스가 그 답을 들려줍니다.
2. 하나님의 사람으로
본문 4절은 보아스가 일꾼들과 소통하는 방식을 묘사하는데 이는 동시에 그가 어디에 속한 사람인지도 알려줍니다.
(룻 2:4) 마침 보아스가 베들레헴에서부터 와서 베는 자들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니 그들이 대답하되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니라.
보통 유대인들의 인사는 ‘샬롬’ 우리 식으로는 ‘안녕하세요?’ 정도이고 성경은 제한된 지면에 의례적인 인사를 거의 소개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4절은 굳이 보아스와 일꾼들의 인사하는 장면을 소개하고 그 인사도 무척 의미심장합니다. 교회에서나 들을법한 ‘여호와께서 너희와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는 인사에 일꾼들도 낯설지 않게 당연하다는 듯 ‘여호와께서 당신에게 복 주시기를 원하나이다’라는 정중하고도 은혜로운 인사로 답하는 것은 그들이 평소에도 그런 식으로 인사해 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주인과 종들, 고용주와 고용인의 관계는 늘 어느 정도 긴장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갑인 주인은 을인 종들에게 종종 고압적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일꾼들에게 정중하고 친절하며 진심으로 축복을 건낼 만큼 호의적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7장에서 병든 하인을 고쳐달라고 주님을 찾아와 간청한 로마의 백부장을 연상시킵니다. 그들은 모두  사회적 약자인 일꾼, 하인에게 인간적 존종과 배려, 애정을 보여줍니다.
이는 그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율법의 방식 곧 하나님 나라의 방식을 좇는 사람임을 드러냅니다. 율법은 왕, 주인, 지주가 세상에서 생각하듯 권력과 지위와 부를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고 가르칩니다. 율법에 의하면 이 모든 힘과 권위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기 위해 잠시 위임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에서는 왕조차도 고대의 모든 다른 나라와 달리 무소불위의 절대권력을 갖지 못 합니다. 율법이 정하고 가르치는 대로 백성을 다스려야 합니다. 사실상 인류최초의 법치주의입니다. 주님이 명하신 것처럼 주야로 율법을 묵상하는 자는 자신이 권력자가 아니라 청지기 곧 진짜 주인이신 하나님의 매니저임을 깨닫고 형제, 자매를 대합니다.
보아스는 율법의 시선 곧 하나님의 시선으로 자신과 일꾼을 보았고 그렇기에 그들에게 절대 고압적일 수 없으며 존중과 친절이 자연스럽게 드러났습니다. 사람의 시선으로는 절대 부자와 빈자, 강자와 약자, 배운 자와 못 배운 자, 의인과 죄인을 동일하게 볼 수가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시선으로만 모든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긍휼이 필요한 죄인임을 볼 수 있습니다. 보아스는 하나님의 시선으로 모두를 보고 그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3. 하나님의 시선으로
이런 보아스의 마음가짐은 낯선 이민자를 대하는 자세에서도 드러납니다. 5절입니다.
(룻 2:5) 보아스가 베는 자들을 거느린 사환에게 이르되 “이는 누구의 소녀냐?” 하니
부자에게 이삭을 주우러 온 가난한 여자는 손해를 끼치는 귀찮고 성가신 존재일 뿐입니다. 그런 이에게 관심 따위 가질 이유가 없습니다. 그러나 보아스는 관심을 가집니다. 온통 자신의 필요만 몰두하는 이들은 다른 이의 존재를 의식하지 못 합니다. 그는 룻이 이스라엘에서 가장 멸시받는 이방여인인 것을 안 후에도 여전히 따뜻한 시선으로 대합니다. 11절입니다.
(룻 2:11)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이방여자가 염치없이 이스라엘 여자들 사이에서 이삭을 줍느냐? 남편 죽게 만든 여자가 무슨 염치로 빈 손으로 와서 시모와 빌어먹느냐? 왜 하필 내 밭에서 이삭을 축내느냐?’ 온갖 부정적 시선으로 그녀를 대할 수 있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그는 룻의 잘한 점을 정확히 묘사하며 칭찬합니다. 이것이 쉬워보이지만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의 약점, 문제, 허물을 찾아내는 은사를 가졌습니다. 자연인으로 우리는 늘 누군가를 험담하고 불평하고 비난하는데 익숙합니다. 그것이 자신을 마치 의로운 존재요, 재판관과 같은 존재라는 자존감을 갖게 해주기 때문입니다만 이것이야말로 유일한 재판관이신 하나님의 자리에 오르려는 인간의 본성적 원죄입니다. 반면 타인의 장점, 공로, 가치를 보는 능력이 없습니다. 세상을 따뜻하게 바라보는 시선은 대부분 우리에게 없는 엄청난 능력입니다. 이는 우리의 무서운 죄를 그리스도의 피로 씻으시고 그 분의 의로 덮고 사랑의 눈으로 바라보시는 하나님에게서 오는 특별한 은사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이들이 이웃에게 가질 수 있는 태도입니다. 비판과 정죄 대신 사랑과 긍휼의 시선으로 이웃을 바라보실 수 있기를 축복합니다.
4. 은혜와 축복을
보아스는 그런 태도를 가졌습니다. 그래서 그는 은혜를 베풉니다.
(룻 2:8)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내 딸아, 들으라. 이삭을 주우러 다른 밭으로 가지 말며 여기서 떠나지 말고 나의 소녀들과 함께 있으라. (룻 2:9) 그들이 베는 밭을 보고 그들을 따르라. 내가 그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너를 건드리지 말라, 하였느니라. 목이 마르거든 그릇에 가서 소년들이 길어 온 것을 마실지니라.” 하는지라… (룻 2:14) 식사할 때에 보아스가 룻에게 이르되 “이리로 와서 떡을 먹으며 네 떡 조각을 초에 찍으라.” 하므로 룻이 곡식 베는 자 곁에 앉으니 그가 볶은 곡식을 주매 룻이 배불리 먹고 남았더라.
그는 손해를 감수해가며 그녀에게 은혜를 베풉니다. 그리고 그녀를 축복합니다.
(룻 2:12)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축복이 돈드는 것도 아닌데 뭐 어렵나 하실지도 모르겠지만 결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우리가 축복을 많이 하는지, 저주를 많이 하는지를 생각해 보면 분명해집니다. 주머니에 돈이 있어야 물건을 살 수 있듯 영혼에 은혜가 있어야 축복할 수 있습니다. 이웃이 잘 되기를 비는 축복은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목사로서 큰 보람과 기쁨을 누리는 것 중 하나는 매주 예배 때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모든 성도를 축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는 이미 예배를 드리고 주방에서 봉사하던 권사님들이 다음 예배가 끝날 시간이면 후다닥 본당에 올라가서 목사님 축도하는 것을 듣고 다시 내려가곤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는 축복에 권세가 있다는 것을 믿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생각에 말로 하는 축복, 누가 못 해, 하실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맞습니다. 모든 성도가 목사처럼 서로 축복할 수 있습니다. 다만 이 놀라운 능력을 사용하는 사람은 생각보다 적습니다. 그래서 베드로 사도가 이렇게 권유합니다.
(벧전 3:9)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받았으니 이는 복을 이어받게 하려 하심이라.
모든 성도가 서로 복을 빌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성도로 부르신 목적입니다. 서로 복을 비는 것은 당연히 기도이고 은혜의 하나님은 저주의 기도는 듣지 않으시지만 축복의 기도를 기쁘게 들으십니다. 이렇게 축복하면 어떤 열매를 맺습니까?
(룻 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성령님은 성도의 축복을 사용하여 마음이 상한 자를 위로하십니다. 축복은 이웃을 위로합니다. 세상을 위로합니다. 세상은 위로에 굶주려 있습니다. 위로를 받으려고 비싼 돈 내고 정신과 의사를 찾아갑니다. 우리는 세상 어디서도 줄 수 없는 위로를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의 마음으로 서로를 축복하면 됩니다. 날마다 모든 이에게 모든 상황에서 미움 대신 은혜를 베풀고 저주 대신 축복을 하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시길 축복합니다.
5. 주님으로 가득 차서
또한 보아스는 은혜를 베풀고도 자랑하지 않는 성숙함과 사려깊음을 보여 줍니다. 15절 이하입니다.
(룻 2:15) 룻이 이삭을 주우러 일어날 때에 보아스가 자기 소년들에게 명령하여 이르되 “그에게 곡식 단 사이에서 줍게 하고 책망하지 말며 (룻 2:16) 또 그를 위하여 곡식 다발에서 조금씩 뽑아 버려서 그에게 줍게 하고 꾸짖지 말라.” 하니라. (룻 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15kg)쯤 되는지라.
그는 겸손하고 성실한 룻에게 더 큰 배려를 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그녀가 더 많은 이삭이 떨어져있는 곡식 단 사이에서 줍도록 허락하고 티나지 않게 곡식 다발에서 이삭을 조금씩 뽑아 버리기까지 하고 탓하지 않도록 일꾼들에게 당부합니다. 그래서 약 15kg이나 되는 이삭을 줍도록 합니다. 그런데 이런 배려를 룻이 모르도록 합니다. 왜입니까? 룻이 혹시라도 느낄지 모르는 모멸감을 피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건강한 사람이 병자의 마음을 이해하거나 부자가 빈자의 마음을 이해하기란 정말 쉽지 않습니다. 아플 때는 작은 압박도 견디지 못 하고 가난할 때는 별것아닌 말에도 쉽게 상처를 받습니다. 가난을 겪어본 이거나 어지간히 사려깊은 이가 아니라면 이해하기 어려운 곤경에 처한 자의 마음을 보아스는 이해하고 배려합니다. 그녀를 책망하지 않게 하고 그녀가 수치심을 느끼지 않고 당당히 자신의 수고로 넉넉히 이삭을 줍도록 상황을 드러나지 않게 만듭니다.
보아스가 얼마나 성숙한지를 보여줍니다. 미숙한 이들은 자신을 드러냅니다. 성숙한 성도는 그리스도를 드러냅니다. 미숙한 이들은 자기만족을 구합니다. 성숙한 성도는 이웃의 입장을 생각합니다. 이런 성숙의 비밀은 그 마음이 무엇으로 가득 차 있느냐는 것입니다. 주님과 이웃을 생각하고 기도하는 이는 그의 모든 행위에서 주님이 드러나고 이웃을 배려합니다. 자신이 가득 찬 이는 선행을 하면서도 자신을 드러내고 자기만족을 구합니다. 여러분의 마음은 무엇으로 가득 차 있습니까? ‘네 마음과 뜻과 힘과 정성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몸과 같이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이 이것입니다.
6. 은혜로 사는 사람
보아스가 보여주는 이런 사랑과 배려와 사려깊음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입니까? 사람은 그가 믿는 대로 생각하고 행동합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네 믿음대로 되리라’고 하셨습니다. 보아스의 은혜로운 삶은 ‘그가 믿는’ 은혜로운 하나님을 반영합니다. 마치 달이 햇빛을 반사하여 밤을 밝히는 것처럼 말입니다. 달은 자체로 빛을 내지 못 하고 대낮처럼 밝은 빛도 내지 못 하지만 햇빛을 반사하여 어두운 밤을 밝힙니다. 성도는 그 자체로 은혜로운 존재는 아닙니다. 그러니 교인을 보고 종종 시험에 드는 것도 하나도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도는 동시에 하나님의 은혜의 빛을 받아 희미하지만 자기밭에 찾아온 낯선 이를 돌본 보아스처럼 주변을 밝힐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해처럼 온 세상을 밝힐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달처럼 우리가 몸담은 가정, 일터, 교회는 밝힐 수 있습니다. 그 비밀은 해처럼 찬란한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 이는 무한한 은혜의 하나님을 봅니다. 요한복음의 말씀입니다.
(요 14:9) 예수께서 이르시되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
예수님을 바라보면볼수록 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은혜로 가득 찹니다. 그 빛은 우리의 삶을 은혜로 빛나게 만들고 이웃에게까지 비취게 만듭니다. 은혜의 하나님을 바라보며 빛을 발하시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