룻 2:17-23/믿음으로 사는 여자
230820 주일설교
1.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근대 러시아 문학의 창시자로 찬양받는 시인 ‘알렉산드르 푸시킨’의 이 시를 들어보셨을 것입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우울한 날 지나면 기쁨의 날이 오리니/마음은 미래에 살고/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으로 다 지나가는 것이며/지난 것은 소중한 것이라네.” 삶이 여러분을 속이는데 정말 슬퍼하지도, 노하지도 않을 수 있습니까? 쉽지는 않습니다. 그렇다고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적어도 오늘 본문의 주인공 룻은 자신의 뺨을 후려치는 삶을 향해 왼뺨을 내미는 여자입니다.
룻기로 돌아왔습니다. 2주 전 은혜로 사는 남자 보아스를 만나보았다면 오늘은 믿음으로 사는 여자 룻을 만나봅니다. 룻은 삶을 대하는 태도와 은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가르쳐 줍니다. 먼저 그녀가 고난의 삶을 대하는 태도를 보십시오. 그녀는 삶에게 속고 뺨맞은 여자입니다. 부픈 꿈을 안고 결혼했지만 자녀 하나 갖지 못 한 채 젊은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아버지와 아주버님까지 졸지에 세상을 떠나더니 늙고 가난한 시모를 따라 남의 나라에서 외국여자로 극빈층의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남의 밭에 나가서 눈총을 받으며 얼마 안 되는 이삭을 주워와 입에 풀칠하는 것 뿐이었습니다.
여러분이 이런 처지에 놓인다면 아침에 일어나고 싶겠습니까? 진학이나 취업, 사업이나 결혼에 실패하고 무시와 조롱, 미움과 비방을 받으면 어떤 마음이 들까요? 만사가 귀찮고 아침에 눈뜨기가 싫고 아무도 만나고 싶지 않은 심정을 한 번쯤은 겪어 보셨지요? 그녀도 그런 마음이 전혀 들지 않았다면 거짓말일 것입니다.
2.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
그런데 2장에서 룻은 그런 삶을 원망하기는커녕 오히려 사랑하는 듯 보입니다. 2장 2절에서 그녀는 시어머니가 보내기 전에 자신이 먼저 나서 이삭을 주우러 가겠다고 합니다.
(룻 2:2) 모압 여인 룻이 나오미에게 이르되 “원하건대 내가 밭으로 가서 내가 누구에게 은혜를 입으면 그를 따라서 이삭을 줍겠나이다.” 하니 나오미가 그에게 이르되 “내 딸아 갈지어다.” 하매
남의 밭에서 눈총과 무시를 받아가며 이삭을 줍는 일이 쉬운 일입니까? 먼저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일까요? 그런데도 그녀는 자신의 처지를 슬퍼하고 한탄한고 원망하고 분노하는 대신 먼저 그 일을 하겠다고 나섭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그녀가 보아스의 밭에 이르기까지 여러 날이 지난 것이 틀림없습니다. 시어머니 나오미가 다른 날과 달리 룻이 많은 이삭을 주워온 것을 보고 놀라는 것을 보면 말입니다. 아마 이삭줍기는 요즘으로 치면 최저시급도 안 되는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 일을 그녀가 어떤 태도로 하는지 7절이 보여줍니다.
(룻 2:7) “그의 말이 ‘나로 베는 자를 따라 단 사이에서 이삭을 줍게 하소서’ 하였고 아침부터 와서는 잠시 집(움막)에서 쉰 외에 지금까지 계속하는 중이니이다.”
그녀는 여러 날이 지나도록 한결같이 태도로 부지런히 이삭을 주웠습니다. ‘이딴 것 주워서 어느 세월에 자리잡겠나’ 할수도 있었을텐데 오히려 이삭 하나도 하잖게 보지않았다는 말입니다. 물론 그렇게 했다고 슬렁슬렁 주운 다른 이보다 크게 많은 이삭을 주웠을 리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태도때문에 뜻밖의 기회가 찾아옵니다. 보아스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고 은혜를 입은 것입니다.
(룻 2:17) 룻이 밭에서 저녁까지 줍고 그 주운 것을 떠니 보리가 한 에바(15kg)쯤 되는지라.
한 에바 약 15kg의 곡식은 당시 남자 일꾼의 한 달치 품삯에 해당된다고 합니다. 아무튼 그 양은 시어머니 나오미를 놀라게 하기에 충분한 양이었습니다. 그녀는 혹독한 고난과 슬픔을 겪고도 여전히 삶을 사랑했습니다. 삶의 의지를 잃지 않았습니다. 이는 쉽지않은 일이지만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히브리서는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바라보아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히 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성도는 아무리 혹독한 고난으로 아무리 처절한 자리로까지 추락해도 그런 인생에도 하나님이 살아서 일하고 계심과 마침내 하나님을 의지하는 자들에게 상주심을 믿어야 합니다. 이 믿음을 가진 이는 룻처럼 삶의 의지를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삶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해 이삭을 주울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를 보아스의 밭으로 인도하십니다.
레오나드 디카프리오가 주연한 영화 ‘catch me if you can’에는 가난해 공부할 기회가 없었던 주인공이 이솝우화를 인용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두 마리의 쥐가 우유통에 빠졌지. 한마리는 포기하고 빠져 죽었는데 다른 한마리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허우적대며 마지막 힘이 빠지기 전까지 헤엄을 쳤어. 그러자 우유가 점점 굳더니 버터가 되었지. 그 쥐는 굳은 버터를 딛고 우유통 밖으로 나와 살았어. 내가 바로 그 쥐야.’ 우리 인생이 이와 같습니다. 길이 안 보인다고 포기하면 정말 살 길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고 포기하지 않으면 눈을 열어 길을 보여주십니다. 삶이 아무리 여러분을 속이고 뺨을 후려쳐도 결코 포기하지 말고 길을 여시고 상주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승리하시기를 축복합니다.
3. 은혜를 만나거든
룻의 믿음은 삶을 대하는 태도 뿐 아니라 은혜를 대하는 태도를 통해서도 드러납니다. 13절을 보십시오.
(룻 2:13) 룻이 이르되 “내 주여, 내가 당신께 은혜 입기를 원하나이다. 나는 당신의 하녀 중의 하나와도 같지 못하오나 당신이 이 하녀를 위로하시고 마음을 기쁘게 하는 말씀을 하셨나이다.” 하니라.
그녀는 은혜가 필요하다고 고백합니다. 이것을 인정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교만은 신세지기를 거부합니다. ‘내가 왜 당신 도움을 받아? 내가 거지야?’ 자신이 은혜가 필요없다는 생각이야말로 최고의 교만입니다. ‘나는 내 힘으로 여기까지 왔어. 누구 도움도 없이 성공했고 앞으로도 도움같은 것 안 받아.’ 마귀를 타락시킨 교만이요,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기로 결정한 아담과 하와의 교만입니다. 자기 힘만으로 살수있는 이가 세상에 어디 있습니까?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 할 수 있는 분은 하나님 한 분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창조되었습니다. 부모님의 은혜로 태어났습니다. 가족과 친지와 공동체의 은혜로 자라고 교육받고 일터를 찾았습니다. 지금도 동료와 고객과 사회의 은혜로 벌어먹고 삽니다. 우리 삶의 모든 순간에 은혜가 묻어있지 않은 곳이 없습니다. 더 나아가 우리는 그리스도의 은혜로 죄사함을 얻고 영생을 얻었습니다. 우리는 모두 은혜가 필요합니다. 룻은 또한 그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10절입니다.
(룻 2:10)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하며 그에게 이르되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하니
자신이 보아스의 하녀 중 하나와도 같지못한 이방여자라는 사실을 압니다. 그러므로 보아스의 은혜를 당연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당신은 부자이니 이 정도는 당연히 베풀어야 하는 것 아닌가요? 이 정도는 당신에게 별 것 아니니 대단한 은혜라 할 것도 없지 않아요?’ 겸손의 또다른 면은 자신이 누리는 것이 당연하지 않은 것 곧 진짜 은혜을 깨닫고 감사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참된 겸손입니다. 예수님이 이방땅인 두로를 방문하셨을 때 한 이방여자가 와서 딸을 고쳐달라고 간청합니다. 예수님은 그녀가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는지 확인하시고 제자들에게 이에 대해 가르치시려고 의도적으로 그녀를 유대인 들의 비하하는 표현으로 모욕하시는 척 합니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치 아니하니라.’ 이 때 그녀가 보인 반응을 예수님은 큰 믿음으로 칭찬하셨습니다.
(마 15:27) 여자가 이르되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하니
그녀는 자신이 율법에 무지한, 개나 다름없어 은혜받을 자격이 없음을 인정합니다. 동시에 그렇기 때문에 더더욱 자신은 주님의 은혜가 없으면 절망을 벗어날 수 없음을 깨닫고 은혜를 간청합니다.
4. 그 앞에 엎드리라
이런 큰 믿음이 룻이나 수로보니게 여인처럼 이방여인들에게 공통되게 나타나는 데는 이유가 있습니다. 당시 유대인 혹은 남자는 이방인과 여자에 비해 차별적인 사회적 지위와 대우를 누리느라 자신이 우월한 존재라는 헛된 자만심에 눈이 멀어 살았습니다. 자신의 영혼이 얼마나 헐벗고 빈곤하고 가련하고 절망적 존재인지를 깨닫기 어려웠습니다. 이런 교만에 눈먼 이들을 계시록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꾸짖으십니다.
(계 3:17)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자신이 은혜가 필요한 절망적 존재임과 그 은혜는 감당하기 힘든 과분한 것임을 깨닫지 못 하는 이의 영적 상태가 이와 같습니다. 우리는 모두 십자가의 은혜가 없이는 영원한 멸망을 피할 길이 없는 절망적 죄인입니다. 우리에게 베푸시는 죄사함과 구원의 은혜는 당신의 아들을 십자가에 내어주신 값으로 베푸신 감당키 힘든 은혜입니다. 당연히 받을만한 은혜가 아닙니다. 도저히 받을 수 없는 은혜를, 받을 자격없는 죄인이 누립니다. 이 은혜 앞에 꿇어 엎드려 간청하지 않는 자는 눈먼 자입니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벌거벗은 영혼입니다. 멸망의 폭포 앞까지 휩쓸려 내려가는 불쌍한 존재입니다. 오직 십자가의 은혜만이 그런 영혼을 구원합니다. 추악한 모든 죄를 남김없이 씻고 예수님이 이루신 거룩한 의의 옷을 입혀주시는 은혜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은혜를 우리에게 베푸시겠다고 초청하십니다.
(계 3:18)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고난의) 불로 연단한 (믿음의)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보혈로 씻은 의의)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죄악의)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진리의)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의 은혜를 간구하여 영원한 생명을 거저받아누리는 믿음의 자녀가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