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910 와서 보라 / 요 1:43-51

20230910 와서 보라 / 요 1:43-51

요 1:43-51/와서 보라

230910 주일설교 변증
1. 성혈과 성배
최근 한 교우께서 이런 질문을 하셨습니다. 영국에서 출간된 ‘성혈과 성배’라는 책과 BBC 다큐멘터리가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지않고 프랑스로 이주해서 살았다’는 내용을 증명했다는데 이를 어떻게 이해해야 하느냐는 것이었습니다. 구글링을 해보니까 여러 개인블로그에서 복사-붙이기를 한 듯 거의 비슷한 내용으로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려있었습니다.
1. 1982년 ‘성혈과 성배’란 책이 영국에서 출판되었다.
2. 이 책은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지 않았으며 프랑스로 이주해 살았음’을 증명했다.
3. BBC 등도 다큐멘터리로 제작하여 책의 내용이 사실임을 증명했다.
4. 재판이 열려서 이 책이 진실임을 판결하자 충격을 받은 영국 기독교인 80%가 신앙을 버렸다.
이 교우의 질문에 답을 설교시간에 하는 이유는 다빈치코드 등 이와 유사한 류의 기독교신앙에 도전하는 거짓이 너무나 많이 퍼져서 사람들을 속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 주장을 판단하는 과정을 이해하시면 다른 주장에 대해서도 당황하지 않고 쉽게 답을 찾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일단 공부가 업이 아닌 대부분의 교인은 이런 주장을 접할 때 진위를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활자화되거나 방송에 나오거나 누군가 진지하게 말하는 것만으로도 권위가 있는 듯 쉽게 착각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흔들리기도 하고 혹은 흔들릴까봐 아예 부정하거나 외면합니다. 모두 적절한 반응이 아닙니다.
2. 진실에 다가가기
이런 류의 주장의 진실여부를 확인하는 첫 번째 방법은 이 책을 가지고 직접 연구를 하여 진위를 밝히는 것입니다만 우리 대부분은 그럴 여건이 안 됩니다. 그렇다면 두 번째 방법으로, 이 책을 연구한 권위있는 전문가 곧 역사학자, 신화학자, 고고학자 등의 연구서를 참고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쏟아지는 이슈들마다 그들의 책을 다 읽을 여유 역시 안 됩니다. 그럴 때는 세 번째로 이들의 연구성과를 정리한 공신력있는 인용사이트를 참고하는 것입니다. 이 때 당연히 아무런 출처를 밝히지 않은 채 ‘~라고 합니다’라는 식의 개인블러그는 배제해야 합니다. 대표적인 카더라통신, 유언비어통신, 아니면말고통신, 믿고싶은대로통신입니다. 이럴 때 상대적으로 쉽게 접근할 수 있는 공신력있는 사이트가 위키피디아와 같은 온라인사전입니다. 이런 사전을 그래도 신뢰할 수 있는 이유는 출처가 된 책, 기사, 자료를 잘 소개해 주기 때문입니다. 바빠 죽겠는데 언제 위키피디아 뒤져봅니까? 그럴 때 쓸 수 있는 네 번째 방법은 그래도 이런 자료를 좀 다루어본 주변의 목사에게 물어보는 것입니다. 이 교우는 네 번째 카드를 아주 잘 쓰셔서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그래서 제가 세 번째 방법을 써서 답변을 해드립니다. 위키피디아에서 성혈과 성배(The Holy Blood and the Holy Grail)을 검색하시면 32권의 참고자료를 인용목록에 올려놓고 자세한 해설과 비평을 해두었습니다. 그 비평을 근거로 팩트첵크를 해 봅니다.
3. 모래성 같은 거짓
1번, 진실입니다. 이 책이 이 때 출판된 것을 부정할 아무런 이유가 없습니다.
2번, 거짓입니다. 이 책의 주장은 증명되지 못 했습니다. 과학적 주장은 과학자들의 검증에 의해 증명되거나 부정되고 혹은 잠정적 지지를 받듯이 역사적 주장은 역사학자들의 비평에 의해 그 설득력을 인정받거나 부정당하거나 혹은 보류됩니다. 여러 개인블로그가 책의 내용을 아무런 비평없이 그대로 옮겨놓고 ‘증명’되었다고 주장하는 반면 위키피디아는 관련분야 전문학자들의 자료를 인용하며 이렇게 언급합니다.
‘이 책에 대한 전문역사가와 관련분야학자들의 반응은 부정적이다. 그들은 이 책이 근거라고 제시한 주장, 고대의 미스터리, 음모론은 대부분이 유사역사적 내용이라고 주장한다.’
유사역사적이란 표현은 역사적 사실인 척 하지만 역사로 인정하기 어렵다는 뜻입니다.
3번, 거짓입니다. BBC 등이 이 책의 주장을 증명한 적이 없습니다. 위키피디아의 언급입니다.
‘성혈과 성배의 주장은 몇 년 동안 많은 조사와 비평의 소재가 되었다. 60 Minutes, Channel 4, Discovery Channel, Time Magazine 그리고 BBC 등 많은 독립조사기관은 이 책의 주장이 신뢰할 수 없거나 검증할 수 없다고 결론내렸다.’
BBC 등이 다큐멘터리로 제작한 것 외에는 거짓입니다.
4번, 거짓입니다. 이 책의 진위를 판단하는 재판이 열린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이 책이 진실이라는 판결도 내린 적도 없습니다. 일단 상식적으로 역사책의 진실여부를 학계가 아닌 사법부가 판단한다는 것이 말이 됩니까? 그런 재판이 열렸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습니다. 이와 관련한 재판은 2003년 출판한 책 다빈치코드가 이 책을 표절했다고 그 저자가 제기한 소송 뿐입니다. 소설가들의 표절소송이 뜬금없이 예수님의 죽음 증명재판으로 둔갑하더니 중학생이 쓴 것 같은 신파소설이 등장합니다. ‘쩔쩔매던 판사가 자신도 3대 기독교집안에서 자랐지만 이 책의 주장이 사실임을 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양심선언을 했으며 ‘충격을 받은 영국인 80%가 기독교신앙을 버렸다’는 식입니다. 위키피디아에서는 언급조차 없으며 복사-붙여넣기를 한 것 같은 몇몇 블러그를 제외하고는 어디서도 근거를 찾아볼 수 없는 소설입니다.
4. 나사렛에서 무슨
이렇게 진실을 찾는 것은 당신이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선포하시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고 선언하신 예수님을 좇는 제자라면 당연히 결코 게을리하지 말아야 합니다. 진리가 우리를 자유케한다는 말씀은 역으로 무지가 우리를 노예되게 한다는 뜻입니다. 진실에 관심이 없거나 진실을 외면하면 우리의 무지를 이용하여 죄와 악이 우리를 노예로 삼습니다. 보이스피싱에 대해 무지하다고 가정합시다. 우리의 피땀흘린 재산을 눈뜨고 코베이듯 다 빼앗기지 않겠습니까? 거짓과 모략에 대해 무지하다면 우리의 생각과 판단력을 빼앗기고 더 나아가 영혼과 생명까지 빼앗깁니다.
앞서 소개한 책 외에도 온갖 거짓이 우리를 속이고 영혼을 빼앗으려 합니다. 이런 세상에서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할까요? 첫째는 신중하고 열린 마음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예수님의 제자가 된 빌립은 친구 나다나엘에게 자신이 메시야를 만났다며 전도합니다. 그러자 나다나엘은 46절 전반부에서 이렇게 반응합니다.
(요 1:46) 나다나엘이 이르되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날 수 있느냐?” …
나다나엘은 무엇을 근거로 예수님이 메시야일 수 없다고 결론내립니까? 예수님의 출신지인 나사렛에 대한 편견입니다. 이방의 갈릴리라고 불릴만큼 이방인이 많아서 경건하다고 자부하는 유대인들로부터 멸시를 받았던 갈릴리 지역에서도 구석진 곳의 조그만 산골마을 나사렛에서 어떻게 위대한 메시야가 나느냐? 편견과 선입견은 진실의 실체를 접하지 않은 채 내리는 섣부른 판단입니다. 당연히 오류의 가능성이 높습니다. 이런 편견과 선입견을 이용해서 광고주들은 물건을 비싸게 팔고 사기꾼은 돈을 훔쳐가고 독재자들은 지지자들을 만들어내고 대제사장과 바리새인들은 군중을 선동하여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았습니다. 거짓에 속아넘어가면 돈이나 기회나 자유를 잃고 자칫 공의와 믿음과 영생까지 잃습니다.
종종 성경을 폄하하고 기독교 신앙을 거부하는 이들이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단편적인 정보, 이미지, 경험으로 섣부른 판단을 하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 대해 많이 들어보았다고 해서 제대로 안다고 할 수 없습니다. 여러분 매일 차를 몰지만 차에 대해 얼마나 아십니까? 타이어 하나 갈 수 있으세요? 엔진오일 하나 교체할 수 있습니까? 교회에서 실망한 경험이 있다고 해서 교회가 어떤 곳인지 제대로 판단할 수 있습니까? 부정직한 의사를 만났다고 합시다. 그렇다고 아프면 병원 안 가고 의사를 다 없애야 합니까? 한두 명의 사례로 전체 의료시스템을 판단할 수 없지 않습니까?
그리스 철학에서 진리에 다가가고자 하는 이는 가장 먼저 epoch 곧 판단중지를 배워야 한다고 가르쳤습니다. 편견과 선입견으로 진실을 가리지 못 하도록 섣불리 결론내리지 말고 열린 마음을 유지하라는 뜻입니다. 그러면 섣부른 판단을 멈추고 열린 마음으로 무엇을 해야 할까요?
5. 와서 보라
다음으로 필요한 것은 진실을 탐구하는 열정입니다. 다행히 나다나엘에겐 현명한 친구 빌립이 있었습니다. 그는 나다나엘의 문제가 무엇인지 정확히 지적해 줍니다. 46절 후반부입니다.
(요 1:46) … 빌립이 이르되 “와서 보라.” 하니라.
‘너는 예수를 직접 보지 못 했잖아, 그러면서 어떻게 메시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단 말이냐? 그가 진짜 메시야인지, 아닌지 알려면 최소한 네가 직접 와서 만나보고 말해보고 경험해 보고라야 판단할 수 있지 않겠니?’
2016년 트럼프가 당선되고 브렉시트가 통과된 후 옥스포드사전은 올해의 단어로 Post-Truth를 선정했습니다. 이후 사회학자들은 포스트 트루스 곧 탈진실의 시대라는 용어로 서구사회를 설명하기 시작했습니다. 객관적 진실보다 주관적 믿음이 더 중요한 시대 곧 각자가 믿고 싶은 것이 곧 진실로 둔갑하는 시대라는 듯입니다. 인터넷의 발명으로 쓰나미처럼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사람들은 무엇이 진실인지 분간하기를 부담스러워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소위 인지적 게으름이란 뇌의 상태로 들어갑니다. 즉 뇌가 진실여부를 판단하는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모하기 부담스러우니 이미 알고 있는 정보만으로 결론에 이르거나 지인이 내려준 결론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고 이 결론이 거짓이란 정보가 나와도 외면해버린다는 것입니다.
이런 현상을 다룬 재미있는 실험이 있습니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틴 사람들에게 각각 갈등을 해결할 방법을 적어내라고 하고 타이틀을 서로 반대로 붙여서 보여주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낸 아이디어에는 팔레스틴 사람의 아이디어라고 적고 팔레스틴 사람들의 아이디어에는 이스라엘 사람의 것이라고 적었던 것입니다. 과연 사람들은 그 아이디어의 내용과 아이디어 출처 중 어느 것을 선택했을까요? 양측 다 대부분이 자기네 사람의 것이라고 적힌 아이디어를 선택했습니다. 내용을 들여다보고 ‘합리적이고 우리에게 유익하다’고 판단한 사람은 소수였습니다. 다들 빌립의 말처럼 직접 보고 선택하지 않고 보지도 않고 진영논리로 선택한 것입니다.
이런 선택이 사람을 무지의 감옥에 가두고 세상을 진영논리로 나누어 갈등을 더 심화시켜 파국으로 몰고 갑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은 이들도 바로 이런 무지의 감옥에 갇힌 이들이었습니다. 요 7장을 보십시오.
(요 7:51) (니고데모가 말하되) “우리 율법은 사람의 말을 듣고 그 행한 것을 알기 전에 심판하느냐?” (요 7:52) 그들이 대답하여 이르되 “너도 갈릴리에서 왔느냐? 찾아 보라. 갈릴리에서는 선지자가 나지 못하느니라.” 하였더라.
6. 진리의 성령님
다행히 나다나엘은 빌립의 도움으로 편견의 감옥에서 벗어나 직접 예수님을 만나고 대화한 후 진실을 마주합니다.
(요 1:49) 나다나엘이 대답하되 “랍비여,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당신은 이스라엘의 임금이로소이다.”
진실은 더 큰 진실로 인도합니다.
(요 1:50)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를 무화과나무 아래에서 보았다 하므로 믿느냐? 이보다 더 큰 일을 보리라.”
반면 무지는 더 깊은 어둠으로 몰아넣습니다.
(마 13:12) 무릇 (지혜가) 있는 자는 받아 넉넉하게 되되 없는 자는 그 있는 것도 빼앗기리라.
나다나엘은 무지의 어둠에서 건져준 빌립처럼 성령님은 우리를 무지로부터 건져내십니다. 예수님에 대해 어렴풋이 아는 우리에게 와서 보라고 부르십니다. 성경에 대해 어렴풋이 알 뿐인 우리에게 진지하게 공부해 보라고 명하십니다. 근심, 걱정으로 가득 찬 우리에게 하나님께 부르짖어보라고 명하십니다. 쉽게 거짓에 속고 진실에 무지한 우리에게 열린 마음으로 탐구해 보라고 초청하십니다.
성령님은 초청하실 뿐 아니라 진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우리에게 힘을 주십니다. 지혜를 구하는 자에게 꾸짖지 않고 후히 주시고, 말씀을 깨닫게 하셔서 세상의 진짜 모습을 보게 하시고, 죄와 의, 악과 선, 거짓과 진실, 멸망과 영생을 분별하게 도우십니다. 성령님의 초청과 도우심으로 우리는 날마다 진리를 아는 것과 믿는 것과 행하는 것에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진리의 성령님의 도우심으로 죄와 죽음과 무지와 거짓으로부터 자유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