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 16:1-15/무지와의 전쟁
231008 주일설교
1. 계몽과 계시
여러분이 인도를 여행하시다가 달리트계급 곧 불가촉천민을 만났다고 하십시다. 가장 낮은 계급 수드라 중에서도 가장 천해서 낮에는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 하도록 집에서만 지내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화장실을 치우거나 다른 이들의 빨래를 해주고 해가 뜨기 전에 자기네 동네로 사라져야 하는 이들입니다. 만약 여러분이나 여러분의 자녀들이 미국에서 이런 대우를 받는다면 어떤 생각이 드시겠습니까? 격분하시겠지요? 사람이 이런 대우를 받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지요? 많은 인도인은 크게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데 여러분은 왜 분개하십니까? 계몽되었기 때문입니다.
계몽이란 무지를 일깨우다는 뜻입니다. 18세기 유럽에서 계몽주의라는 사고방식이 생겼습니다. 물론 갑자기 생긴 것은 아니고 16세기 르네상스운동, 17세기 과학혁명의 열매로 인간의 이성이 꾸준히 발전해 온 결과입니다. 그 때부터 서구인은 전근대적 사고방식을 버리고 이성과 합리성에 기초한 새로운 사고방식을 가졌습니다. 계몽된 인간은 모든 인간은 신이 주신 존엄함을타고 났다는 믿음 위에 정치, 종교, 사회, 경제 등 모든 생활에서의 자유와 평등, 사회계약 등의 가치를 세우고 인간의 삶을 재설계했습니다. 오늘날 서구선진국의 삶의 모습은 그렇기에 전근대적 그것과 크게 다릅니다. 무지와의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런 계몽의 노력 덕분에 우리는 힌두교의 신분제, 이슬람의 여성차별을 포함해 서구사회에도 남아있는 모든 인종주의, 계급주의, 성차별, 장애인차별 등에 반대합니다.
200년 전 계몽의 시대가 있었던 것처럼 2000년 전에는 계시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계시란 진리를 드러내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 때는 지적 어둠이 아닌 영적 어둠으로부터 해방된 시대입니다. 바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의 계시를 완성하신 때입니다. 구약시대부터 율법과 선지서를 통해 조금씩 구원의 진리를 드러내보이시던 하나님은 육신으로 오신 말씀 예수님을 통해 계시를 완성하셨습니다. 히브리서가 그 계시의 완성을 이렇게 선언합니다.
(히 1:2) 이 모든 날 마지막에는 아들을 통하여 우리에게 말씀하셨으니 …
마지막 날은 예수님이 오신 후부터 지금까지의 시대 곧 신약시대를 가리킵니다. 아들 예수님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분으로 모든 계시의 말씀을 완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다고 하셨고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계시의 완성이 묘사되는 장면이 바로 오늘 읽은 본문입니다.
2. 계시의 완성
오랜만에 요한복음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지난 3월에 요한복음 15장까지를 설교하고 반 년만에 돌아와 16장을 시작합니다. 본문은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시기 전 날 밤 최후의 만찬 자리에서 제자들에게 하신 고별설교의 일부분입니다. 분위기는 몹시 무겁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 했지만 거듭 자신들을 떠나 가신다는 말씀을 하시는 예수님의 표정과 어조, 몸짓에 비장함이 흐르는 것을 놓칠 수 없었습니다. 제자들은 막연히 근심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십자가를 지실 때 제자들이 더 큰 두려움에 사로잡히리라는 것을 아셨습니다. 그 때 믿음을 잃지 않도록 예수님은 예방주사를 1절에서 놓아주셨습니다.
(요 16: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
제자들은 예수님과 자신들을 향한 유대종교지도자들의 적대감을 마주할 때 몹시 놀라고 두렵고 혼란스러워할 것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 지도자들은 누구보다 하나님의 뜻을 잘 알고 하나님의 뜻을 대리한다고 믿어온 이들이고 또 다름아닌 하나님의 이름을 내세워 제자들을 핍박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2절입니다.
(요 16:2) 사람들이 너희를 출교할 뿐 아니라 때가 이르면 무릇 너희를 죽이는 자가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그런 일을 당할 때 제자들은 자신들이 정말 하나님으로부터 징벌을 받는 것이 아닌가 두렵고 혼란스러울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일은 사실 박해자들이 무지의 어둠에 갇혀있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하셨습니다. 3절입니다.
(요 16:3) 그들이 이런 일을 할 것은 아버지와 나를 알지 못함이라.
또한 제자들 역시 무지때문에 근심에 사로잡혀 있다고 하십니다. 6절입니다.
(요 16:6)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
그러나 때가 되어 그들의 무지를 깨우칠 분 성령님이 오시고 이것이야말로 제자들을 어둠에서 해방하여 빛 가운데로 인도하는 복이 될 것입니다. 13절을 보면 그 때는 오순절을 가리킵니다.
(요 16:13)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진리로 인도되어 무지의 어둠에서 벗어난 제자들은 근심과 두려움을 떨쳐버리고 진리를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성령님의 인도로 그 계시를 기록하였습니다. 그 기록이 바로 신약성경입니다. 인류가 역사와 철학과 과학을 통해 지적 무지로부터 벗어나듯 성도는 성경을 통해 영적 무지로부터 벗어납니다. 요한복음 8장에서 예수님은 성도가 완성된 계시인 성경을 통해 진리를 깨달으면 모든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리라 약속하셨습니다.
(요 8:32)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3. 진리의 성령님
성령님이 계시하신다는 그 진리란 무엇입니까? 8절을 보면 그것은 죄와 의와 심판에 관한 진리입니다.
(요 16:8)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이는 모두 법정에서 쓰는 용어입니다. 성령님은 재판장이 되셔서 세상을 재판하시고 판결하십니다. 9절을 보면 먼저 세상의 죄를 책망하십니다.
(요 16:9)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그 지도자들은 예수님과 제자들이 성전과 율법을 모독했으니 죽어마땅한 죄를 지었다고 주장하지만 사실상 진짜 죄는 그들이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믿지 않은 것입니다. 인류 최초의 죄는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먹으면 반드시 죽을 것’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지 않고 ‘죽지 않을 뿐더러 오히려 눈이 밝아져 하나님처럼 되리라’는 뱀의 말을 믿은 것입니다. 종교지도자들의죄 역시 하나님을 믿지 않고 탐욕과 거짓에 귀기울인 것입니다.
두 번째로 무엇이 진짜 의인가를 설명하십니다. 10절을 보면 의로운 분은 오직 한 분 죽음에서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이십니다.
(요 16:10)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세 번째로 11절을 보면 이 세상 임금 마귀는 이미 멸망의 판결을 받았습니다. 그가 아직 세상에 있는 것은 마치 사형수가 사형판결날까지 살아서 악을 쓰는 것과 같습니다.
(요 16:11)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마귀)이 심판을 받았음이라.
이 모든 성령님의 계시를 정리하면 제자들이 박해받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아니며, 오히려 그리스도의 종이기에 마귀의 종으로부터 받는 의로운 고난이며, 이미 승리하신 그리스도로 인해 최후의 승리를 거둘 것입니다. 이를 깨달으면 제자들은 더 이상 근심하지 않고 부활하여 승천하신 예수님의 구원의 소망을 가지고 기쁨과 담대함으로 하나님을 섬길 수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은 근심, 걱정 가운데 살아갑니까? 그 모든 근심은 무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모르면 두렵습니다. 알면 편안합니다. 진리를 알면 인생이 두렵지 않습니다. 성령님은 지금도 진리를 계시하셔서 성도들을 근심, 걱정, 두려움에서 해방시키시고 충만한 기쁨과 담대함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가 이 모든 근심, 걱정, 두려움으로부터 해방되려면 성령님의 계시를 들어야합니다. 성령님은 어떤 진리로 우리를 깨우치십니까?
4. 고난의 의미를 깨닫도록
첫째는 고난의 의미를 깨우치십니다. 우리는 고난을 불행과 실패, 재수없음, 억울함, 기가막힘, 괴로움 등으로 표현합니다. 그러나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하시는 하나님은 고난과 실패와 고통마저도 유익하게 사용하십니다. 성령님의 계시로 이 진리를 깨달은 시인은 노래합니다.
(시 119:71)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을 당하지 않았다면 결코 배우지 못 했을 주님의 법을 배우고 그 뜻을 깨달아 알고 그 법에 담긴 하나님을 알고 보니 고난으로 잃은 것보다 얻은 것이 훨씬 크다는 뜻입니다. 셋째, 넷째 늦둥이를 가진 부모들마다 하는 말이 있습니다. 가졌을 때는 놀랐고, 대개는 계획에 없던 일이라, 출산도 당연히 힘들었지만 얘가 없었으면 어쩔 뻔 했느냐는 것입니다. 고난은 마치 늦둥이와같습니다. 당하기 전에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며 도저히 감당치 못 할 것 같았지만 막상 당하여 견디고 이기다보니 이 고난을 통해 얻은 것이 너무 커서 이 고난을 겪지 않았더라면 어쩔 뻔 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진리의 성령님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이는 복됩니다. 성령님이 여러분 모두에게 이 깨달음을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5. 영을 분별하도록
둘째로 성령님이 깨우치시는 진리는 영을 분별하는 것입니다. 요한일서에서 요한 사도가 명하는 이 영분별이 사람 안에 무슨 귀신이 들었나 맞추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으로 선포되는 온갖 주장 가운데 진리와 거짓을 가려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요일 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분별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라.
오늘날 온라인에 쏟아지는 온갖 쓰레기 정보로부터 진실과 거짓을 구별하는 것이 이 시대의 숙제이듯 하나님의 이름으로 쏟아지는 온갖 주장도 참과 거짓을 구분해야 합니다. 고후 11장을 보십시오.
(고후 11:14) 이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니라 사탄도 자기를 광명의 천사로 가장하나니
그럼 어떻게 분별합니까? 그 기준은 바로 열매입니다.
(마 7:16)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또는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따겠느냐?
참된 말씀은 성령의 열매를 맺습니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가 그것입니다. 거짓된 주장은 마귀의 열매를 맺습니다. 미움과 짜증과 다툼과 조급함과 가혹함과 악함과 나태함과 과격함과 무절제가 그것입니다. 이를 분별하지 못 하면 하나님의 이름으로 악을 행하다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멸망합니다.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고 제자들을 돌로 치던 이들이 하나님의 이름으로 한 것처럼 말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깨어서 분별하고 진리의 길을 가야 합니다. 진리의 성령님이 여러분 모두에게 영분별의 지혜를 주시기를 축복합니다.
6. 하나님을 앎도록
셋째로 진리의 성령님은 하나님을 알게 우리를 깨우치십니다. 우리가 교회에 다니고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있으니 다 하나님을 아는 것 같지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주여, 주여 부르는 많은 자가 하나님을 모른다 하셨습니다.
(마 7:23)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
마 22장에서 예수님은 또 온갖 무지와 불의가 바로 이 하나님에 대한 무지에서 나온다고 하셨습니다.
(마 22:29)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알기를 힘써야 한다고 호세아 선지자가 강력히 권면합니다.
(호 6:3)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하나님을 그러면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먼저는 성경을 알아야 합니다. 성경을 즐거워하며 주야로 읽고 공부하고 묵상해야 하는 이유입니다. 성경을 참으로 즐거워하면 자연스럽게 맺히는 열매가 있습니다. 바로 사랑의 열매입니다.
(요일 4:7)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요일 4:8)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은 사랑이심이라.
이렇게 사랑으로 하나님을 아는 자는 진짜 행복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여러분을 손바닥에 새겨서 기억하시기 때문입니다.
(사 49:16)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
여러분 이름을 하나님의 손바닥에 새겼으니 어떻게 잊어버리시겠습니까? 손바닥에 이름이 적힌 이들은 얼마나 행복하겠습니까? 예수님의 약속대로 진리의 성령님이 사랑의 하나님을 여러분에게 알려주시기를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분 모두를 손바닥에 새겨서 아시기를 축복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