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17 다리를 불태우지 마라 / 행 15:36-41

20231217 다리를 불태우지 마라 / 행 15:36-41

행 15:36-41/다리를 불태우지 마라

231217 주일설교
1. 치유의 소망
모두들 아시겠지만 지난 주일 공동의회에서 3분의 2의 지지를 넘지 못 하여 재신임이 부결되었습니다. 이는 분명히 하나님의 뜻입니다. 김목사에게는 14년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새로운 길을 준비하라는 뜻이고, 교회는 김목사와의 동행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라는 뜻입니다. 새시대를 잘 열기 위해서는 옛시대를 잘 마무리해야 합니다. 재혼을 한다고 칩시다. 옛배우자의 흔적을 곳곳에 남겨두고 새로운 배우자와 행복한 새삶을 시작할 수 있겠습니까? 마찬가지로 우리도 새시대를 열려면 옛시대의 마무리를 잘 해야 합니다. 중요한 마무리가 있는데 여러분의 마음에 남아있는 앙금을 깨끗이 씻어내는 것입니다. 안타깝게도 공동의회를 전후하여 서로 다른 입장으로 인해 많은 이들의 마음에 상처와 아픔이 남은 듯하여 무척 안타깝습니다. 제가 그 마음을 다 풀어드릴 수는 없으나 하나님의 말씀이 치유의 길을 열어보여주실 수 있다고 믿습니다. 초대교회에서 벌어진 가장 안타까운 다툼 중 하나를 들여다 봄으로써 여러분의 마음에 치유와 회복의 빛이 비취기를 기도합니다.
2. 다툼
오늘 본문 사도행전 15장 후반부는 초대교회 최초의 공식선교사였던 바울과 바나바의 2차 전도여행이 시작되는 장면입니다. 이 시점은 13-14장에서 이들의 1차 전도여행이 끝나고, 15장에서 2주 전에 살펴본 예루살렘공의회에서 이방인선교의 방향을 결정한 직후입니다. 36절을 보면 예루살렘공의회가 끝난 며칠 후 바울과 바나바는 1차 여행방문지를 돌아보는 2차 전도여행을 계획합니다.
(행 15:36) 며칠 후에 바울이 바나바더러 말하되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하고
그런데 전도여행은 시작부터 큰 장애물을 만납니다. 바로 선교팀의 리더인 바나바와 바울의 큰 다툼입니다. 37-38절입니다.
(행 15:37) 바나바는 ‘마가라 하는 요한도 데리고 가’고자 하나 (행 15:38) 바울은 ‘밤빌리아에서 자기들을 떠나 함께 일하러 가지 아니한 자를 데리고 가는 것이 옳지 않다’ 하여 (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로 바나바의 조카인 마가라 하는 요한을 2차 전도여행에 동행시키는 문제로 바나바와 바울이 크게 다툰 것입니다. 그의 이름 마가는 아람어 이름이고 요한은 헬라식 이름입니다. 저의 이름이 한글로 도완이고 영어로 대니인 것처럼 말입니다. 그는 1차 전도여행 중 선교팀을 떠남으로써 선교팀원들을 크게 실망시킨 적이 있습니다. 13장으로 가봅니다.
(행 13:13) 바울과 및 동행하는 사람들이 바보에서 배 타고 밤빌리아에 있는 버가에 이르니 요한은 그들에게서 떠나 예루살렘으로 돌아가고
마가는 왜 중도에 팀을 떠났을까요? 여러 가지 해석이 있습니다. 여행길이 너무 고통스러워서 부잣집 도련님으로 자란 마가가 견디기 힘들었을 것일 수 있습니다. 마가는 오순절성령세례가 있었던 마가의 다락방의 그 마가입니다. 마가의 어머니 마리아는 예루살렘의 부촌 upper city에서 120명이 들어가는 저택을 가진 부유한 여성이었습니다. 그 집의 아들이었으니 곱게 자라서 이 험한 선교여행이 너무 힘들었을 수 있습니다. 신학적 견해 차이라는 해석도 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자란 마가는 유대주의적 사고방식이 강했을 터이고 이방인에게 율법준수를 요구하지 않고 믿음으로만 구원얻는다고 전하는 바울과 바나바의 선교정책에 거부감이 있었을 수도 있습니다. 그랬다면 2차 전도여행 직전에 있었던 사도행전 15장의 예루살렘공의회에서 마가는 바울과 바나바와 반대편에 서서 논쟁을 했을 수도 있습니다.
3. 분열
어떤 이유였든 1차 전도여행시에 선교팀을 크게 실망시킨 마가가 2차 여행에 다시 따라나선다고 하자 바나바는 그를 받아주기를 원했지만 바울은 반대했습니다. 여기에는 바나바와 바울의 성향과 입장 차이가 한 몫했을 것입니다. 바나바는 마가의 외삼촌입니다. 거기에다가 그는 마음이 착한 사람입니다. 사도행전에서 바나바를 묘사하는 표현은 한결같이 착하다, 위로하고 권면하는 사람이다, 자기 밭을 팔아 가난한 자를 위해 내어놓았다는 식입니다. 마가의 허물을 너그럽게 볼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한마디로 바나바는 일보다 인간관계가 더 중요한 사람으로 이런 유형을 relationship oriented 유형이라 부릅니다. 거기에 비해 바울은 일이 더 중요한 task oriented 유형입니다. 그는 무엇을 하든 끝장을 보는 사람입니다. 교회를 핍박할 때도 앞장서서 열심을 다했고 회심하고 복음을 전파할 때도 목숨을 걸고 쉬지않고 돌아나닙니다. 그는 마가가 못마땅하기도 했겠지만 그가 또다시 팀을 실망시킬 경우 생길 피해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두 사람의 다른 성향은 결국 파국을 가져왔습니다. 이견을 좁히지 못 한 결과는 무엇입니까? 39-41절입니다.
(행 15:39) 서로 심히 다투어 피차 갈라서니, 바나바는 마가를 데리고 배 타고 구브로로 가고 (행 15:40) 바울은 실라를 택한 후에 형제들에게 주의 은혜에 부탁함을 받고 떠나 (행 15:41) 수리아와 길리기아로 다니며 교회들을 견고하게 하니라.
결국 선교팀이 둘로 갈라집니다. 바울선교팀의 행적을 우리는 이 사도행전을 기록한 선교팀의 일원인 누가에 의해 보고받았습니다. 반면 바나바선교팀에는 누가와 같은 기록자가 없었기에 우리가 자세히 알 길이 없습니다. 바나바는 후에 그의 고향 구브로섬에서 복음을 전하다가 유대인들에 의해 순교당했다고 교회 전승이 전합니다.
초대교회 최초의 공식선교사였던 두 선교사의 분열은 선교역사 초기에 일어난 안타까운 사건인 동시에 인간적으로 볼 때도 무척 가슴아픈 일입니다. 바울에게 바나바는 큰 은혜를 베푼 은인이었습니다. 사도행전 9장을 보면 바울이 교회를 박해하러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 회심한 후 예루살렘에 가서 사도들을 만나려고 했지만 모두가 그를 두려워하고 그의 회심을 믿지 않았습니다. 그 때 그를 데리고 사도들 앞에 가서 그의 회심이 진짜임을 보증해준 사람이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11장으로 가면 고향 다소에 가 머물던 바울을 스카웃해서 안디옥교회 목회사역에 데뷔시킨 것도 바로 바나바였습니다. 13장에서 안디옥교회의 지도자를 소개하는 표현에서 가장 먼저 바나바가 나오고 몇 사람이 더 나온 후 마지막에 바울이 나옵니다. 바나바가 안디옥교회 담임목사였다면 바울은 교육전도사 쯤 되었다는 뜻입니다. 안디옥교회가 성령의 인도로 두 선교사를 파송할 때에도 분명 바나바의 권위 아래 바울이 동행할 수 있었던 것이 틀림없습니다.
그랬기에 바울이 바나바의 뜻에 순종치 않고 끝까지 마가를 반대하여 결국 두 사람이 다른 길로 갈라진 것은 참으로 애석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바울은 인간관계보다 자신의 직무 혹은 사명이 훨씬 중요한 사람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4. 반전
아무튼 바울에게 마가는 결코 좋아할 수 없는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1차 여행 때는 선교팀에 중도에 떠나버려 큰 실망을 안기더니 2차 여행 때 또 따라나서겠다 하여 결국 자신의 은인인 바나바와 갈라서게 하고 선교팀마저 둘로 나뉘게 만들었으니 말입니다. 이 정도까지 관계가 틀어졌으면 바울과 마가의 관계가 회복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이 정도로 바울을 실망시킨 사람이라면 마가가 초대교회에 제대로 된 일꾼으로 쓰임받을 수 있을까요? 마가의 잘못, 바울의 성향, 분열된 선교팀을 볼 때는 가능성이 높아보이지 않습니다. 그런데 반전이 있습니다. 놀랍게도 도저히 회복될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바울과 마가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이 말년에 감옥에서 쓴 디모데후서를 보십시오.
(딤후 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그레스게는 갈라디아로, 디도는 달마디아로 갔고 (딤후 4:11)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그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다른 이들은 자신을 버렸거나 사역을 위해 보냈고 누가만 곁에서 그를 돌보는데 마가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마가가 바울에게 유익한 일꾼이 되었습니다! 빌레몬서에서도 자신의 동역자를 소개하는데 누가 있는지 보십시오.
(몬 1:24) 또한 나의 동역자 마가, 아리스다고, 데마, 누가가 문안하느니라.
마가가 동역자들 중에서도 가장 먼저 나옵니다. 2차 전도여행 시기였던 AD51년경으로부터 약 10년 이상이 지났을 바울의 말년인 60년대 초 즈음 어느 새 바울의 가장 큰 골칫덩이였던 마가가 바울의 가장 중요한 동역자 중 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마가는 이 때 즈음 바울에게뿐 만 아니라 초대교회에 없어서 안 될 일꾼으로 성장했습니다. 베드로 사도에게 마가가 어떤 존재입니까?
(벧전 5:13) 택하심을 함께 받은 바벨론에 있는 교회가 너희에게 문안하고 내 아들 마가도 그리하느니라.
베드로는 마가를 아들이라 부릅니다. 예루살렘의 부유한 집안에서 좋은 교육을 받아 아람어와 더불어 헬라어도 할 수 있었던 마가는 갈릴리의 어부출신으로 헬라어를 하지 못 했던 베드로를 위한 통역사로 사역했다고 교회전승은 전합니다. 바로 이 베드로로부터 배운 예수님의 행적과 말씀을 기록하여 우리 손에 마가복음을 전해준 것도 바로 그 사람 마가입니다. 얼마나 중요한 인물이 되었습니까! 골칫덩이 마가에서 복음서의 저자 마가로, 얼마나 놀라운 반전입니까!
5. 다리를 불태우지 마라
10여 년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정확히 알기는 어렵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한 번 골칫덩이가 되었다고 영원히 골칫덩이일 것이라 단정해서는 안 됩니다. 한 번 관계가 틀어졌다고 영원히 다시 안 볼 것이라 단정해서도 안 됩니다.
이런 서구의 격언이 있습니다.
‘Don’t burn bridges. you’ll be surprised how many times you have to cross the same river.’
다시는 이 다리 안 건널 것 같아서 태워버리고 갔는데 반드시 돌아와 그 다리를 건너야 할 때가 온다는 말입니다. 한국에도 이런 속담이 있지요. ‘침 뱉은 우물 다시 와서 먹는다.’ 동서양의 지혜가 한결같이 충고를 합니다.
서로 다른 길을 가야하더라도 마음에 미움과 분노를 품지 말라는 뜻입니다. 만날 때보다 더 중요한 것이 헤어질 때입니다. 우리의 기억은 만날 때가 아니라 헤어질 때의 것으로 간직합니다. 다리를 태우지 말고 침 뱉지 말고 가야 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도저히 회복될 것 같지 않은데요’, 이런 생각이 드신다면 예수님이 어떤 분이신지 생각해 보십시오.
(엡 2:14)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원수 된 것 곧 중간에 막힌 담을 자기 육체로 허시고
서로를 개처럼 멸시하던 유대인과 이방인도 하나로 만드시는 분이라면 그 어떤 관계를 회복시키지 못 하실까요? 영국시인 알렉산더 포프는 말하기를, ‘실수하는 것은 인간이요, 용서하는 것은 신이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또 볼 사람들이고 하나님 나라에서 반드시 보아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을 닮음으로 회복의 소망을 버리지 않는 여러분이 다 되시기를 축복합니다.